인문 육아 800일 아빠의 인문 육아(11) -상처 2012/05/17 01:41 by 철학본색

며칠전 외가에서 돌아온 아이의 손바닥에서 붉은 상처를 발견했다. 칼에 베인 흔적 같았다. 깜짝 놀라 손을 보려고 하니 아이는 아픈지 손을 움켜쥔 채 보여주지 않는다. 완력으로 손을 펴보니 아이는 죽겠다고 울어댄다. 아이 손에 손금이 하나 더 생긴 것처럼 긴 상처가 났다. 연고 하나를 얼른 가져와 행여나 다시 울까 조심스레 발랐다. 어디에 베였냐고 물어보니 '칼~'이라고 한다. '칼에 베였나 보다. 우리 선재는 손금이 하나 더 생겼구나' 하는 생각이 들다가 부끄럽게도 '칼에 베여 손금이 하나 더 생기면 운명도 바뀌는가' 하는 생각까지 나갔다.

전에 아이에게 크게 상처가 난 일은 두 번이 있었다. 하나는 파트너와 나의 결혼기념일에 여동생이 잠깐 아이를 보다가 아이가 넘어져 잇몸에서 피가 났던 일이 있다. 얼마나 호들갑을 떨었던지 소아과에 뛰어가 아이의 이가 상하지는 않았는지 물었다. 물론 아이는 당시 8개월이라 이가 있을리 없었다. 동생이 있다가 일어난 일이라 동생이 놀라지 않았으면 해서 최대한 태연하게 반응하려고 했지만 아이가 피를 흘리는 것을 보니 내 정신이 혼미해진다. 최근에도 아이가 많은 피를 흘린 적이 있었다. 아이와 침대에 잠들었다가 내가 잠시 나온 사이 아이가 침대에서 떨어져 코피를 많이 흘렸다. 아이를 안으니 내가 입은 흰색 면티가 붉은 피로 물들고, 지혈을 위해 눕히려니 아이가 하도 울어서 그날 밤 애 좀 먹었다. 아이가 흘린 피의 크기는 내 죄책감의 크기가 되어 몇일을 괴롭혔다.

최근에는 여동생의 아이도 얼굴에 상처가 났다. 얼마 전에 놀러갔던 낙동강둑 어느 횟집에서 신나게 뛰어놀다 앞으로 넘어져서 코를 갈았다. 이제 돌이 갓 지난 아이의 얼굴에 생채기가 났으니 부모 마음이 어땠을지 짐작이 간다. 아마 볼 때마다 미안한 마음, 안된 마음이 들었겠지.

아이 몸에 상처가 한번 나면 이건 아끼던 자동차가 흠집 나던 것과는 충격의 크기가 다르다. 사실 정말 심각한 상처가 아니라면 피부의 놀라운 재생력이 조금의 표시도 없도록 해버리지만, 자동차는 가만히 둔다고 해서 흠집이 사라지지도 않는다. 하지만 누군가 내 차를 긁고 갔을 때 느끼는 감정이 분노와 억울함이라면, 아이가 다쳐 상처가 났을 때 느끼는 감정은 죄책감과 자괴감이다. 어떤 감정이 더 고통스러운 감정인지는 굳이 설명하지 않아도 되리라.

아기의 상처와 자동차의 흠집. 이 두 종류의 스크래치를 비교하는 것이 두 종류의 세계관, 혹은 사고체계를 이해하는 한 방식이 될 수도 있지 않을까. 즉 아기의 상처는 시간이 지나면 상처가 나기 전의 상태로 회복한다는 사실과 자동차의 흠집은 시간이 지나도 변하지 않으며 노동력이나 자본이 투입되어야만 회복된다는 사실 말이다. 우리 문화는 자동차 외장 뿐만 아니라 인간의 신체와 정신조차도 상처가 아니라 '흠집'으로 여기도록 강요한다. 많은 부모들은 '본능의 이름으로' 아이에게 난 상처에 대해 극적으로 반응하는데 이 상처가 마치 일생에 거쳐 중요한 걸림돌이나 될 것처럼 염려한다. 더욱이 아이가 자라 청소년이 되면 아이는 범죄나 나쁜 성적과 같은 일생의 '흠집'을 만들지 않으려고 안간 힘을 쓴다. 그러다 이름 모를 대학이라도 결국 가게 되면 아이에게 흠집이 난 정도가 아닌 아이 자체가 사회의 '흠집' 인양 취급받게 된다. 여기서 끝이 아니다. 이제 성년이 된 아이는 보통 우리 문화가 과오라고 여기는 이혼, 부도, 병 등을 피하기 위해 노력한다. 우리 문화 속에 사는 사람들의 인생 주기는 이렇듯 '흠집'을 내지 않으려는데 집중되어 있다.

이렇게 흠집을 피하려는 사람들의 노력이 잘못된 것은 아니다. 아이에게 난 상처에 가슴 아파하는 것은 부모의 보호본능이 작동된 결과이며 이는 종의 보존이라는 관점에서도 필요한 것이다. 더욱이 만일 우리 인간이 흠집보다는 어떠한 것이든지 인간의 노력에 의한 어떤 '기념물'을 만들려는 노력이 없었다면 진보가 주는 안락함을 누리기 어려웠을 것이다. 하지만 진정한 문제는 '흠집'이라는 것이 마치 자동차의 그것처럼 자연적으로 회복되지 않을 것이라는 믿음에 우리 문명이 겪는 불행의 원인이 있다. 또한 그것이 설령 회복되지 않더라도 흠집의 발생을 자연스러운 것으로 받아들이지 않는 태도가 우리로 하여금 사물과 사태의 본성에 다가가기 어렵게 하고 결국 진정한 행복과 만족하는 삶으로부터 유리시키는 것이다.

상처 받기 쉬움. 이것은 인간성의 본질에 해당하는 부분이다. 우리 문화가 '상처'를 '흠집'으로 이해하는 한 우리 문화는 어떠한 상처도 받아들이고자 하지 않을 것이다. 그리고 노동이나 경제적 자원을 투입하는 것 없이 '되돌아 올 수 없다'는 특징을 지닌 흠집을 피하기 위한 강박관념 속에서 우리는 근원적인 행복을 잃어버리고 말 것이다. 하지만 상처는 결코 흠집과 같지 않다. 어떤 상처는 지울 수 없는 흠집을 남기지만 거의 대부분의 작은 상처들을 '시간을 통해' 회복시킨다. 상처가 나고 회복이 되는 것은 자연의 순환이다. 마치 나무의 모습이 시시 때때로 변하고 하늘과 대지의 풍경이 매부매초 변하더라도 항상 낙엽이 지면 다시 싹이 돋고 꽃이 피듯이 우리는 이 거대한 자연의 순환 속에 살고 있다. 니체가 말한 세계, 즉 전체로서의 힘은 불변하지만 항상 자기 창조와 자기 파괴의 순환이 이뤄지는 세계 말이다. 그리고 그런 세계에서 누릴 수 있는 디오니스소적인 행복이 바로 이것이다. 하지만 우리는 이 사실을 잊고 있다.

그것은 우리가 살고 있는 환경 세계가 온통 자연 재생력이 없는 흠집 나는 물건들로 가득 차 있는 것에 기인한다. 흠집나는 물건 속에 갖힌 채 자연의 순환이 가져다 주는 어마어마한 치유력을 잊고 살아가는 것이다. 아이폰의 뒷판이 행여나 조금이나 상처가 날까 우리는 보기 좋은 손전화기를 들고서는 한번도 못생긴 케이스를 벗기지 않는다. 뒷판에 만일 흠집이라도 나면 마음의 흠집이라도 난 것 같다. 아름다운 BMW를 사고서는 범퍼가 행여라도 다칠까 보기에도 흉한 고무판을 차에 달고 다닌다. 우리가 살고 있는집의 나무 바닥은 천연의 그것이지만 아이가 흠집을 낼까 카페트로 덮어버렸다.흠집에 대한 공포 내지 두려움으로 우리는 어떤 대상 조차도 있는 그대로 만지지 못하고 보지도 못한다. 손전화기 조차도, 자동차 조차도, 집에 깔린 천연 나무 바닥 조차도 있는 그대로 만지거나 밟거나 보지 못한채 '커버'로 흠집을 방지하기 위해 안간 힘을 쓴다. 사물을 있는 그대로 보는 눈, 사물을 그대로 느끼는 감각은 없다. 땅의 촉감을 신발 없이 느낄 수 없다. 카메라 없이 풍경을 누리지 못한다. 우리 문화는 사물을 그대로 보지 않도록 요구한다. 그러나 만일 우리가 아이폰에 나는 흠집을, 나무 바닥에 생기는 흠집을, 자동차 범퍼에 생기는 흠집을 자연스러운 현상이라고 받아들여보자. 우리는 대상과 사물을 온전하게 바라볼 수 있게 된다. 사물을 직접 경험한다.

나는 도시에 살고 있고, 내 주변의 모든 것이 '인공적인 것'이다. 나와 우리 아이의 환경 세계는 거의 인공적인 것으로 구성되어 있다. 우리가 좋아하는 아름다운 정원조차도 인공정원이다. 즉 자연적으로 원상회복이 불가능한 것이다. 내가 살고 있는 집은 오래된 집과 달리 시간이 지나 흠집이 쌓이면 헐어벼러야 할 집이고, 내 차는 결국 폐차장으로 가야 할 운명이다. 우리 주변에서 자연의 순환이 가져다 주는 치유력을 경험하고 있는 사물은 거의 보기 어렵다. 강박관념과 불안, 우리를 불행하게 하는 목표의식의 기원은 바로 '흠집나는 것들로 이뤄진 환경세계'에 있다.

아이의 상처에 대해서도 마찬가지이다. 아이에게 난 상처는 흠집이 아니다. 그것은 결국 회복될 것이며 원상으로 돌아올 것이다. 설상 흉이 남는다고 하더라도 그것을 이상한 현상이 아니라 자연스러운 현상이다. 그것을 받아들이지 못하는 것이 자연스럽지 못한 것이다. 부모가 아이의 상처에 호들갑을 떨지 말 것을 부탁하는 것이 아니다. 걱정스럽지만 아이에게 난 상처는 본질적으로 자연스러운 것이다. 인간은 상처받기 쉬운 존재라는 것을 이해하더라도 그것은 불가피한 것이다. 부모가 상처를 흠집으로 대하는 것이 아이가 사물을 있는 그대로 보는 것으로부터 멀어지는 시작이다. 언젠가 이야기할 기회가 있을 것으로 생각하지만, 아이들은 말을 배우기 위해서 사물을 직접적으로, 몸(살)으로 경험하고 그 사물에 '이름'이 있다는 것을 배우는 중이다.

아이에게 난 상처는 자연적으로 회복되는 것이며, 설사 큰 흉이 남더라도 이상한 일은 결코 아니다. 예수의 손과 발에 난 못박히 상처는 분명히 오명이었다. 그리고 그것은 예수가 부활한 후에도 흉터로 남았다.이 오명, 스티그마타(stigmata)라고도 하는 이 오명은 부활한 예수에게는 '성흔'이 된다. 사람들은 예수에게 흠집을 내려고 했고, 로마에서 이런 흠집은 부끄러운 일로 여겨졌지만 제자들의 믿음은 이 흠집, 이 상처의 흔적으로부터 시작되었다. 부활한 예수의 몸에 흠집이 없었다면 제자들에게는 아무런 증거도 없다. 우리 아이, 내 물건에 난 상처, 흠집은 성흔은 아니더라도 나의 흔적, 삶의 흔적, 내가 죽더라도 '남아 있다'. 아이에게 난 상처는 그래서 흉이 남더라도 부끄러운 일이 아니다. 예수에게 스티그마타가 부활의 증거라면 아이와 나에게 남은 흉은 회복의 증거이며, 생명과 자연의 증거이다.

내가 살고 있는 도시에서 아이가 사물을 있는 그대로, 자연의 순환을 이해하면서 자랄 수 있을까? 그것은 아이의 '직관'과 관련된 부분이다. 직관은 선천적으로 주어지는 것이 아니라 사물을 있는 그대로, 온전한 상태로 바라보는 훈련의 결과로 주어지는 것이다. 그리고 사물과 사태에 대해 커버로 덮어 씌우지 않고 그 자체로 다가갈 때 아이는 사물과 말을 나눌 수 있게 되고 자연의 순환에 몸을 맡기며 행복을 이룰 수 있다. 사물을 직접적으로 만날 수 있는 기회가 차단된 공간이라는 점에서 우리 도시는 흠집의 강박증에서 벗어나기 어렵다. 아이에게 사물이 드러나는 사태를 그대로 볼 수 있도록 도와주는 환경을 마련해주고 싶다. 고즈넉한 교회가 있고 개울이 있는 마을, 그것이 아니라면 100년이 넘은 아파트가 있고 200년이 넘은 빌딩이 있는 늙은 도시로 가고 싶다. 아이가 커가면서 자연의 회복, 자연스러운 상처를 받아들이도록 말이다.

아이야, 흠집을 내라. 그것은 상처다. 

반전이 있다. 아이의 상처에 대해 장모님께 여쭤 봤다. 장모님은 잊고 계셨단다. 아니, 아이가 칼을 잡았는데 그걸 잊으시다니..? 우습게도 아이 손에 난 상처는 칼로 인한 것이 아니라 붉은 볼펜 자국이다. 그러니 장모님이 굳이 기억하실 필요가 없으셨다. 아이의 상처는 부모의 '환상'이라는 것을 보여주는 멋진 은유 아닌가. 상처는 지워지지 않는 흠집이 아니라는 것을 알려주는 기막힌 비유 아닌가?  

아이야, 상처를 내라. 그것이 너와 나의 본성(nature)이다. 

인문 육아 798일 아빠의 인문 육아 (10) - 품의 박탈 2012/05/15 02:24 by 철학본색

사랑이 많은 부부 집사님 댁에 다녀왔다. 두 분은 늘 우리 가족을 환대해주신다. 두 분의 고등학생, 중학생 아이들도 늘 따뜻한 웃음으로 우리 아이와 나를 맞이해준다. 비가 와서인지 머리가 아팠는데, 환대를 받다보니 두통이 가신다. 아이는 더 어릴 적 늘 보던 집사님 내외가 아직도 낯설다. 내 품에 껌딱지처럼 붙어서 떨어지질 않는다. 식사 시간까지 포함하면 한 시간은 안겨 있었던 것 같다.

아이가 품에 안기면 부모는 간혹 설명할 수 없는 만족감과 충만감을 경험하게 된다. 아이가 생기기 전에 이런 느낌은 결코 받아보지 못한 것 같다. 오늘 아이를 안고 있을 때 다시 그런 느낌을 받았다. 아이를 유모차에 태우거나 안고서 산책을 다니다보면 아이를 한번 안아보고 싶다는 아주머니와 할머니들을 쉽게 만날 수 있다. 그들은 아이를 품에 안는다는 것이 어떤 느낌을 주는지 알고 있다. 아이를 안을 때만 느끼는 설명하기 어려운 만족감이 있다. 지금 내 아이는 17kg에 육박한다. 가벼운 무게가 아니다. 아이를 안은 채 몇 분을 버티기가 남자인 나로서도 여간 힘든 일이 아니다. 그럼에도 뛰어 다니는 아이를 안고 싶고, 팔이 아프더라도 조금은 더 견디고 싶다.

아이의 '싫어 싫어' 노래는 잦아들어 가는 중이다. 대신 요즘 많이 부르는 노래가 '안아'라는 곡이다. 돌이 되기 훨씬 전부터 걸어 다니고 뛰어다녔던 녀석이 이유불문 무조건 '안아'라고 억지를 부린다. 아무리 아이를 안으면 만족감을 느낀다고 하더라도 두 손에 짐이 있다거나 몸 상태가 좋지 않으면 아이의 '안아' 노래가 반갑지만은 않다. 아빠는 그 때마다 "걸을 수 있으니 걷자"라는 노래로 아이에게 응대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이에게 아빠의 사정이란 없다. 잔말말고 "안아, 안아!". 짐이야 나중에 들지, 아이가 나 아픈 걸 알까, 차라리 안아주자.. 이렇게 아이를 안으면 충만감이니 만족감도 느낄 여유가 없다. 짜증과 피곤함이 몰려온다. 아이더러 되도록 걷도록 요구하는 것에는 아이의 모든 요구를 받아주면 버릇이 없어진다는 생각도 깔려 있는 것 같다.

아이의 두 할머니와 아내는 '안아' 노래에 주로 '업히자' 노래로 응대한다. 안아 달라고 억지를 부리다가도 '업히자' 노래에 아이는 두 말 없이 업힌다. 나는 뚱뚱한 아빠라서 포대기가 없으면 두 팔이 짧아 아이를 업기가 어렵다. 더욱이 혼자 포대기를 사용해 아이를 업는 일이란 거의 불가능하다. 시도해봤지만 아이가 자꾸 흘러내리고, 아이도 어정쩡한 자세가 되어 1분을 버티지 못하고 다시 '안아' 노래를 부르기 시작한다. 하지만 두 할머니들은 아이를 포대기로 업은 채, 양손에 짐을 들기도 하시고, 심지어 운전도 하신다. 포대기에 아이를 업은 채 몇 시간을 보내기도 하신다. 경이로울 정도이다.

아이를 강하게 키우거나 독립심이 강하게 키우려는 부모들은 아이들의 '안아' 노래에 대해서 단호하게 대처한다. 심지어 잠자리도 따로 하는 것이 아이를 강하게 할 수 있다고 믿고 돌도 지나기 전에 아이와 잠자리를 분리한다. 하지만 과연 아이의 독립심이나 자립심이 부모와의 '격리'로부터 생겨날까? 아이에게 더 강해질 것을 요구함으로써 아이가 강해지거나, 독립할 것을 요구함으로써 아이가 독립적이 되는 것이 아니다. 그런 요구를 받고 자란 아이가 물리적으로는 부모로부터 독립할 수 있고 강해질 수 있더라도 내적으로는 오히려 의존성향이 강해지거나 정신적으로는 나약하게 될 가능성이 크다. 자신이 충분히 의존할만한 대상이 있다는 믿음이 형성되지 않고서는 인간은 독립적으로 성숙하지 않는다. 누군가가 자신을 보호하거나 지원하고 있다고 생각하고 느낄 때 스스로 뭔가를 하고자 결의하게 된다. 데리다의 통찰처럼 어떤 진리라고 불리는 것에는 그 안에 그 진리와 가장 모순되는 것이 내포되어 있다. 즉 가장 독립적인 아이는 사실 가장 의존적인 아이었던 것이다.

아이의 의존 욕구가 충분히 채워지지 않은 채 아이를 부모로부터 독립시키려는 시도는 인간의 본성과 조금도 맞는 것이 아니다. 진 리들로프의 <잃어버린 육아의 원형을 찾아서>에 따르면, 일찍 '품의 박탈'을 경험한 아이들은 만성적인 불안에 시달리고 충분히 사랑받지 못했기에 오히려 독립심이 부족해진다고 한다. 이런 아이들은 자라서 새 옷, 새 자동차, 승진 등을 끝없이 갈망한다. 병적인 자아도취에 빠지는 배우, 여러 개의 학위를 수집하는 학자, 끝없이 모험을 떠나는 모험가도 '품의 박탈'이 원인이 된 것이라 할 수 있다. '품', 즉 자신의 '존재'를 용납 받은 경험의 부족이 끊임없는 인정 요구를 낳고, 중독 증상을 유발한 것이다.

리들로프는 이러한 '품의 박탈'을 서양, 남성, 이성과 연결시킨다. 책에 나오는 예콰나족의 육아와 서양의 육아법은 완전히 상반된다. 권위 있는 남성이 쓴 육아법은 이성의 영역이라 할 수 없는 육아를 제대로 설명할 수가 없다. 리들로프는 육아는 이성의 영역이 아닌 우리의 '타고난 감각'에 의존하는 것이라 한다. 엄마품은 아이에게 모든 것이다. 아이들은 엄마품에서 인간을 신뢰하고 의존하게 되고, 엄마와 아빠가 아이를 안을 때 느끼는 것보다 더 큰 충만감과 만족감을 느낀다. 아이는 자신의 모든 것을 용납하는 품에 절대적으로 의존한다. 그리고 절대 의존 상태로부터 점점 독립심을 키워나간다. 이제 아이는 이 절대의존의 감정상태에 적절한 만족을 얻었으므로 불필요한 인정투쟁을 하지 않는다. 너무 많은 욕심을 내지 않는다. 불안과 공포로부터 벗어난다.

우리 아이 역시도 엄마, 아빠와 살을 맞대기 전에 유모차에 태워지고, 아기띠에 달려 있다. 걷고 나서부터는 안기기보다 걸을 것을 요구받아 왔다. 아이의 '안아' 노래는 아직 아이가 덜 안겼다는 신호이다. 부모가 아이를 안을 때 느끼는 충만감과 만족감도 같은 원리에서 설명될 수 있다. 아이가 아빠에게 안겨 있을 때 느끼는 감정의 정체는 분명 아이라는 존재로부터 부족하고 약한 존재인 아빠가 그럼에도 불구하고 용납 받고 있다는 기분일 것이다. 오래되어 묵은 상처도 아빠하고 달려와 안기는 아이로부터 치유된다. 나의 오래된 상처, 아주 예전에 박탈되었던 품이 아이로부터 돌아온다. 철학자들의 말처럼 주체성은 이성으로부터 비롯하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아이와 나, 존재와 존재 사이의 '품', 그 자리가 주체성의 기원이다.

리들로프의 품은 단적으로 '엄마품'이다. 그럼 아빠는? 또한 리들로프에게 육아는 '감각이자 본능'이다. 그럼 육아에 대한 '인문학적 성찰이나 반성'은? 아빠와 인문 육아는 폐기 처분되어야 하는 것일까? 아이를 아빠가 주도적으로 키우는 것은 인간 본성이나 육아의 원형에 부합하지 않는 일일까? 육아는 '타고난 감각'으로 하는 것이니 육아에 대해서 인문학적으로 반성해보려는 시도는 오히려 서구식 합리주의 육아의 변형적 모습인 것일까?

글쎄, 나는 리들로프의 품-엄마(여성)-동양(비서양)-감각(본능)의 연결고리를 하나의 이미지, 은유로 이해하고 싶다. 오리엔탈리즘이 탄생시킨 그 이미지 말이다. 동양은 여성이며, 비이성이며, 대지의 여신은 모든 것을 '품'는다. 그러나 이건 어디까지나 이미지이다. 현실에서는 품-아빠(남성)-동양(비서양)-이성(합리)도 가능한 것이며 이런 이분법은 현실을 이해하는데 도움이 되지만 어느 곳에도 오로지 감각만을 가진 동양 여성은 존재하지 않는다. 아빠도 엄마만큼이나 아이를 품에 안고 싶다. 그리고 아이가 원하는 만큼 안아줘야겠다는 결의와 다짐은 내가 이 일기에서 시도하는 최소한의 '인문학적 반성'조차 없었다면 쉽게 이뤄지지 않았을 것이다.

아이로부터 품을 박탈하지 말자. 아이가 오래된 나의 박탈된 품을 되돌려 줌에 감사하자. 
의존적인 존재와 상처받은 존재가 만나 생겨나는 '품'에서 독립적인 존재와 치유된 존재가 탄생하는 것을 보자.
부모가 아이를 자라나게 하는 것이다. 부모와 아이가 서로 안으므로 생겨나는 그 비어있는 틈, 그 품이 아이를 자라게 한다.
그 빈 틈은 존재하지 않으면서도 존재를 존재로 자라게 하고, 가능하게 하는 자리다. 이 틈을 빼앗지 말고 채우지도 말자. 


덧붙임. 
유모차의 계보학.

아이에게는 몇 가지 이동 수단이 있다. 아이 스스로 걷거나, 부모가 포대기나 아기띠를 이용하거나, 유모차에 태우거나, 아이를 안거나 목마를 태우는 것 등이 있겠다. 그 중 유모차에 관해서.

우리 아이가 유모차에 앉아 있는 시간은 평균 30분이 되지 못한다. 걷지 못할 때는 유모차 유효시간도 꽤 길었는데, 그 때도 역시 아이가 유모차에서 벗어나면 벗어나려 했지 일단 아빠나 엄마 품에 안기면 결코 유모차로 돌아가려고 하지 않았다. 유모차의 쇼바가 주는 편안함은 옵션이고 유모차의 브랜드는 아빠, 엄마의 자존심이기 때문에 비싼 돈을 지불하고 유모차를 샀지만 우리 집 유모차는 자동차 트렁크의 짐짝 신세를 벗어나지 못한 지 오래 되었다. 유모차는 아빠, 엄마의 자존심이지만 아이에게는 외로운 공간인가 보다. 마주보도록, 최대한 아빠, 엄마를 가까이서 바라보도록 설치해 불안감을 최소화하려고 해보지만 아이는 30분만 지나면 몸을 꼬며 '안아' 노래를 부른다. 아빠, 엄마를 사랑해주니 고맙긴 한데, "이 놈아 아빠 죽겠다" 탄성이 나온다.

예콰나족은 어떻게 유모차 없이 아이를 키웠을까? 왜 인류는 수천년 동안 유모차 없이 아이를 키워왔을까? 위키피디아의 도움을 빌려, 인류에게 유모차는 1733년 영국에서 등장했고 오늘날 필수적인 출산 준비물이 되었다.1733년 영국에서는 존 케이 방적기거 등장했고 산업혁명 부흥기였다..


 


인문 육아 796일 아빠의 인문 육아(9) - 마더 2012/05/12 02:05 by 철학본색

이글루스의 육아 밸리에 올라온 다른 분들의 일기 몇 개를 읽어봤다. 주로 아이들의 사진을 정리하고, 가족들과 보낸 소중한 추억을 갈무리하는 내용이 많다. 가장 주를 이루는 것 중 하나는 아이 키우는 엄마들의 다양한 고민들이다. 예방 접종, 아이 이유식, 아이의 감기, 아이 교육 등과 관련된 내용이 많다. 한결 같이 따뜻한 내용이다.

블로그에 글을 쓰는 사람들은 놀랍게도 전혀 상반된 성격의 사람들이다. 한 유형은 대단히 공적 자의식이 강한 경우이다. 사회적 인정과 관계를 중요하게 여기며 블로그를 그 수단으로 활용하는 사람들이다. 트위터와 페이스북이 많은 블로거들을 옮겨가게 했다지만 그런 매체들보다 블로그는 더 개방적이고, 더 많은 정보를 공유할 수 있고, 더 익명적이다. 또 한편으로는 사적 자의식이 강한 경우이다. 블로그에 완전히 사적인 이야기만 올리면서 이름을 밝히지 않는 은둔형 블로거들이다. 페이스북, 트위터가 실명을 기반으로 하기에 완전히 사적인 이야기를 하기에는 적합하지 않다고 여기는 사람들은 블로그에 모인다.

육아 일기를 블로그에 쓰는 유형도 마찬가지다. 어떤 엄마들은 공적 자의식이 높은 사람들이라 블로그에 아이에게 자신이 해준 이유식도 찍어 올리고, 하루동안 다닌 모든 식당과 쇼핑몰, 휴양지를 사진으로 업로드 하는 사람들이다. 이런 블로거들은 높은 인기를 구가한다. 육아와 관련된 특별한 정보를 주지는 않지만 '멋있는 육아'를 하는 멋있는 엄마는 동경의 대상이다. 어떤 엄마들은 사적 자의식이 높은 사람들이라 블로그에 아주 제한된 개인 정보를 올린다. 자신들의 얼굴은 노출하는 법이 없다. 아이의 얼굴 정도만 간혹 올라오는 경우가 많고 대체로 자신의 육아에 확신이 없는지 노심초사 육아 때문에 고민하고 마음 아파하는 내용의 일기가 많다. 비슷한 고민을 하는 엄마들끼리 서로 위로하는 댓글들이 한번씩 보인다. 이런 엄마들에게 멋있는 육아는 없다. 블로그는 불특정 다수 익명에게 자신이 얼마만큼의 스트레스를 받고 아이로 인해 마음 아픈지를 토로하는 장이다.

육아 일기는 그저 일기와는 다르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일기는 일기다. 육아 일기가 일기와 다른 부분은 일기가 '자신'과 관련한 일에 대한 기록이라면 육아일기는 자신이 아닌 '아이'와 관련한 일의 기록이라는 점이다. 아이 스스로 자신의 일을 기록할 수 없기에 양육자가 대리해서 기록하는 것으로 이해할 수도 있겠다. 하지만 좀 더 생각해보면 단순한 대리 기록은 아니다. 육아일기에는 아주 어려운 철학적 문제가 제기된다. 보통의 일기에는 일기의 주인공-일기의 작성자가 일치한다. 하지만 육아일기에는 일기의 주인공-일기의 작성자가 일치하지 않는다. 즉 통상적인 일기에 요구되는 '동일성'이 육아일기에서는 필연적으로 불일치한다.

물론 육아일기의 주인공이 아이가 아니라 육아의 주체인 엄마나 아빠라고 할 수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육아 과정에서 엄마나 아빠가 주체라고 하는 것은 절반의 진실에 불과하다. 오히려 엄마와 아빠는 육아에 있어서 아이에 대해 어디까지나 보조적인 역할만을 수행한다. 언어 학습에 있어서나 신체 발육에 있어서 주체는 어디까지나 '아이'이지 결코 부모가 그것을 대리할 수는 없다. 육아일기에서 제기되는 '동일성'의 문제, 즉 일기의 주인공-일기의 작성자가 불일치하는 문제, 이것은 일기에서만 제기되는 동일성의 문제만은 아니다. 우리는 우리가 접근할 수 있는 다양한 육아일기의 내러티브를 분석함으로 부모, 특히 엄마와 아이의 동일성 문제까지도 고민하는 단계까지 나갈 수 있을 것이다.

어거스틴의 <고백록>은 자서전적인 성격을 갖는 글이지만 넓은 의미에서 일기로 이해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는 자기 자신을 가장 중요한 텍스트로 여기고 탐구했으며, 자신의 삶에 신과 실재가 반영되어 있을 것이라 생각했다. 그리고 <고백록>은 그런 자아 탐구 여정의 기록이라 할 수 있다. 그는 철저한 자아 탐구를 통해 인간의 본성이라는 보편적 성찰에까지 나아갔으며, 선과 악 사이의 관계, 신앙의 본질과 같은 철학적 주제를 해명해 냈다.

우리가 일기를 쓰는 이유는 뭘까? 왜 자신의 삶을 기록하는 것일까? 어거스틴과 같이 자기 자신을 철저히 연구하기 위해, 그럼으로 실재를 탐구하기 위해 일기를 쓰는 것일까? 많은 부모들이 육아일기를 쓰는 이유는 무엇일까? 왜 아이들에 대한 기록을 남겨두려고 애를 쓰는 것일까?

어거스틴의 설명이 마음에 들지 않는다면, 사무엘 베케트의 설명도 있다. 일기는 허구적인 것이다. 삶은 문제적인 것으로 관습적인 장르에 구속되지 않는다. 일기는 실재를 반영하는 것이 전혀 아니며, 반영할 수도 없다. 일기는 우리의 기억을 재구성하는 작업이다. 실재와 삶이 우리 일기의 내용을 결정짓는 것이라기 보다 일기에 무엇을 쓰는 가에 따라서 실재와 기억이 결정된다. 이것은 의미있는 역전이다. 기억은 망각의 힘을 통해 원하지 않는 기억은 삭제 시키기 마련이며, 프로이트가 안나 프로이트와 관련한 기억을 떠올릴 때 보여주는 통찰처럼 기억은 사후적으로 구성되는 것이라 도무지 믿을만한 것이 못된다. 일기를 통해 실재를 탐구할 수 있다는 것은 일기가 이루어내는 내러티브 재구성의 측면을 보지 못했기에 가능한 말이다.

나는 최소한 지금의 우리 부모들이 쓰는 육아일기와 관련해서만큼은 베케트의 지적이 더 많은 것을 설명해낼 수 있다고 생각한다. 내가 접근할 수 있는 많은 육아일기, 어쩌면 나의 육아 일기 조차도 사실에 대한 기록이라기 보다는 기억을 재구성하는 작업처럼 보인다. 여기에는 육아일기가 일기의 주인공-일기의 작성자가 다른 것도 크게 기여하고 있다. 공적 자기의식이 강한 엄마들 유형은 육아일기에서 아이에 대한 관심은 어디까지나 부차적이다. 엄마들은 엄마 자신에 대해서 쓰고 있다. 아이는 엄마를 더욱 돋보이게 하는 존재다. 아이와 관련된 용품들을 리뷰하고, 아이와 함께 명소를 다녀오지만 엄마 자신에 대한 일기일 뿐이다. 여기서 일기의 주인공과 일기의 작성자가 일치하지 않는다는 동일성 문제는 엄마가 아이를 '자기화'시킴으로 해소된다. 그렇게 되면 육아일기는 더 이상 언필칭 육아일기일 뿐 실상은 '엄마일기'가 된다. 엄마는 이런 내러티브를 구성하는 과정에서 아이를 자신의 기억에서 삭제시킨다. 한편 사적 자기의식이 강한 엄마들 유형은 육아일기에서 자신에 대한 관심은 거의 존재하지 않는다. 오로지 아이에 대한 미안함과 부채감으로 이뤄져 있다. 여기서 동일성 문제는 엄마가 자신을 잃음으로써, 즉 엄마가 아이와 자신을 '동일시'함으로 해소된다. 그렇게 되면 육아일기는 엄마가 쓴 아이의 '대리일기'에 불과하게 된다. 엄마는 내러티브를 구성하는 과정에서 아이에 대한 기억만을 갖게 되며 자신의 자아는 상실하고 만다.

육아일기가 제기하는 동일성의 문제는 이처럼 어려운 것이다. 일기의 주인공-일기의 작성자가 다른 까닭에 주인공이 강화되어 작성자가 사라져버리던가, 작성자가 강화되어 주인공이 사라져버리던가 하는 문제가 생겨난다. 어느 경우에도 진정한 해결책이라고 할 수는 없다. 나는 사무엘 베케트의 지적이 지금 우리가 쓰는 육아일기를 분석하는 도구라고 생각하지만, 일기의 진정한 기능은 어거스틴의 일기처럼 그것이 베케트 지적대로 완전히 허구적인 내러티브 구성작업이라 하더라도, 자아에 대한 진실한 탐구가 되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일기는 '나'가 '나 자신'에 대한 기록을 작성하는 것이라는 점에서 반성적이며, 일기를 쓰는 작성자 '나'와 주인공 '나'를 더 나은 존재로 상승킨다는 점에서 해석학적 순환을 가져오는 작업다. 육아일기에서 일기를 쓰는 것은 '나'지만 '나 자신'과 함께 '아이'도 추가된다는 점이 결정적으로 다른 것이리라. 육아일기를 쓰는 작업은 따라서 부모인 '나'에 대한 탐구와 반성, '아이'에 대한 탐구와 반성이 반드시 포함되어야 한다. 

만일 이 반성, 이 해석학적 순환이 이 일기를 쓰게 하는 존재론적 힘에 이끌린다면 분명 아이는 일기 작성자에게 환원되어 말소되지도 않을 것이며, 그 반대로 아이에게 일기 작성자가 환원되어 말소되지도 않을 것이다. 두 존재를 완전히 '보지'한 채 두 존재는 고양될 것이다. 내가 쓰는 이 육아일기도 나와 아이의 기억을 재구성, 아니 어쩌면 조작하는 폭력의 한 형태일 가능성은 완전히 배제될 수 없다. 하지만 진정한 반성과 성찰을 하게 되면 '나'와 '나 자신' 사이에, '나'와 '아이' 사이에 신적 개입이 있을 것이며 우리를 신 자신의 내러티브의 일부를 이루도록 견인해줄 것이다. 그리고 그렇게 되어야만 내가 나 자신 안에 아이를 용해시켜버리지 않을 수 있으며, 나도 생존 기계인 아이로부터 나 자신을 보호할 수 있을 것이라 믿는다.

진정한 반성의 기능이 상실된 육아일기는 아이 존재 말소의 기록이며, 엄마 존재 말소의 기록이다. 육아일기가 제기하는 동일성의 문제를 거친 방식으로 해소한 것에 불과한 것이 된다. 봉준호의 <마더>를 상기해보자. 마더(mother)는 마더(murder)가 되었다. 성년이 되었지만 유아의 정신 연령을 가진 아이를 보호하려는 엄마의 모성 본능은 기계이며, 엄마를 마더로 만들었다. 또한편 아이는 한 여자를 죽였고, 그것을 믿지 못하는 엄마는 그 사실을 알고 있는 남자를 죽였다. 엄마도 마더지만, 아이도 마더가 되었다. 아이의 생존, 생식 본능은 기계이며, 아이를 마더로 만들었다. 이 영화가 아이가 여자를 죽이고 엄마는 남자를 죽이는 죽음의 연쇄를 통해 보여주려고 했던 것은 무엇일까? 아이와 엄마의 동일성 문제가 만들어 낸 비극적 결과 아닌가.

파더가 마더가 되지 않기를. 아니 않을 것이라 아이에게 다짐해본다.

덧붙임.
대체로 모든 육아일기는 따뜻하다. 이 뜨거운 동일시, 모성기계의 뜨거운 동일시는 확실히 '사랑'이다.


인문 육아 795일 아빠의 인문 육아(8) - 말 배우기에 관하여(1) 2012/05/11 01:29 by 철학본색

만 24개월이 지나자 아이에게 나타난 가장 큰 변화는 아이의 '말'이다. 아이는 발레리의 표현대로 하자면'언어라는 아름다운 사슬'에 묶이고 있는 중이다. 아니 그보다는 무의식의 독재로부터 벗어나는 꿈과 가능성의 도구를 획득하는 중이다. 아이가 새로운 말을 배워 사용하는 것은 하나의 '경이'다. 아빠는 아이가 어디에서 그런 말을 배웠는지, 어떻게 그런 방법으로 표현하는지 알지 못한다. 그저 경이로울 뿐이다.

우리 아이는 남자라서 말이 늦는 편이다. 심지어 아들 치고도 말을 빨리 하게 된 편은 아니다. 옹알이도 많지 않았고, '아빠'라고 부르게 된 것도 돌이 훨씬 지나서였던 것으로 기억한다. 놀이터에서 18개월 된 딸아이를 가진 엄마들이 못하는 말이 없다고 딸 아이를 치켜 세우면 우리 아이는 언제쯤 못하는 말이 없어질까 아줌마들 앞에서도, 아이 앞에서도 내색할 수 없는 질투감이 솟아난다. 특히 비슷한 월령의 남아가 우리 아이보다 말을 유창하게 하는 경우에는 내 교육방식이 잘못된 것이었던 것은 아닐까 하는 생각에 괴롭기까지 하다.

남아보다 여아의 언어 습득이 빠른 것은 생물학적 요인이 크다는 것이 학계의 보고이다. 언어 부분을 담당하고 있는 뇌의 특정 부분이 여아에게서 통상적으로 더 빨리 분화된다는 것이다. 즉 더 빠른 생물학적 분화가 더 빠른 언어 학습을 낳았다. 그럼 같은 남아들 사이의 언어 습득의 속도를 결정 짓는 요인은 무엇일까? 여기에는 사회적, 경제적 요인이 있을 수 있다는 보고가 있다. 통상 부모가 경제적으로 풍요로울수록, 사회적 관계가 다양할수록 아이의 언어습득이 빨라진다는 것이다. 이것은 어디까지나 상관관계일 뿐 생물학적 분화와 같은 인과관계는 아니다. '대체로' 그러하다는 것인데 양육자가 아이를 의사소통 과정에 더 적극적으로 초대하고 아이의 표현을 잘 이해하는 경우 아이는 더 성공적으로 언어를 학습해 나가게 된다고 한다.

잘 알려진 것처럼 아이의 언어 습득 속도와 아이의 지능에는 상관관계는 없다고 한다. 만일 그렇다면 모든 여자들이 모든 남자들에 비해 지능이 높아야 할 것이지만 현실은 그렇지 않다. 뿐만 아니라 4세가 다 되기까지 말하기에 어려움이 있는 아이들조차 지능에는 문제가 없다고 한다. 즉 언어 능력과 지적 능력이라는 것이 다른 영역에 해당하는 것이며 양자를 결정 짓는 다른 요인이 있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리라. 그냥 그저 말을 할 수 있는 정도가 되는 것을 언어능력을 갖춘 것이라 본다면 대체로 지적 능력은 더 나은 언어능력을 의미하기에 지적 능력은 더 빠른 언어습득과 관련된 것이라기 보다 더 훌륭한 언어 생활과 관련된 것이라고 보는 편이 맞을 것이다. 지능, 지적 능력도 많은 부분이 후천적인 것에 영향을 받기에 부모의 도움, 교육이 중요하다는 것은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치지 않을 것이다.

나는 그동안 우리 아이가 말이 늦된 것을 걱정했다. 부모인 우리가 충분한 자극을 주지 못한 것은 아닌가, 아이에게 말을 거는 것에 소홀했던 것은 아닌가 셀프 문책성 질문을 던졌다. 이제와 돌이켜보면 분명히 부족한 부분이 있었다. 단적으로 아이에게 책을 읽어주는 것만 해도 아빠편에서는(물론 엄마편에서도) 만만한 일이 아니다. 뿐만 아니라 이상하게 아이와 있으면 몸이 마치 코끼리처럼 무거워져 아이의 의사를 예민하게 파악하고 소통하는 것이 매우 힘이 들었던 것 같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대체로 나는 나 스스로에게 'not so bad' 정도로 자평하고 싶다. 

하지만 진정 걱정해야 할 일은 아이가 얼마나 말을 빨리 배우는가 하는 것이 아니다. 아이가 정상 범위 내에서 보여야 할 다양한 지표들을 보여주고 있다면 그런 걱정은 어디까지나 기우이고 사실은 부모 욕심이다. 진짜 고민해야 할 부분은 아이의 '언어 생활'이다. 단적으로 대체로 노할머니와 함께 생활하는 아이들은 더 빨리 말을 한다. 그렇다고 해서 더 나은 '언어 생활'을 영위하고 있다고 할 수는 없다. 왜냐하면 영어를 빨리 배운다는 것과 좋은 영어를 구사하는 것이 다른 것과 같기 때문이다. 

언어 문제와 관련하여 두 사람을 언급하고 싶다. 하나는 소쉬르, 다른 하나는 메를로-퐁티. 아마도 소쉬르가 이룩한 구조주의 언어학의 가장 유명한 개념은 랑그와 파롤의 구분일 것이다. 랑그는 언어 속에 있는 구조적, 사회적인 부분을 의미하며, 파롤은 가변적이고 개인적인 것을 의미한다. 랑그는 이런 저런 개인적 메시지를 전달하기 위해 내가 사용하는 코드(le code)이다. 나의 파롤과 타자의 파롤은 항상 우리들의 랑그라는 공동의 보물창고에서 나온다. 소쉬르에 따르면 "따라서 랑그와 파롤은 상호의존적이다. 랑그는 파롤의 도구인 동시에 산물이다". 그런데 소쉬르는 사회 현실을 반영하는 랑그가 파롤에 대해서 보다 우위에 있다고 한다.(이건 당위가 아니라 사실 기술이다) 즉 고유한 문화, 문명 체계를 랑그는 반영하게 되며 우리 각각의 파롤, 즉 개개인의 내적 목소리는 랑그의 체계에 지배된다는 것이다

메를로-퐁티는"이런한 침묵은 희미한 파롤(소리)을 내고 있다. 이러한 내적 생명은 내적 언어이다"라는 멋진 말로 이 파롤의 기원이 우리의 생명, 우리의 몸, 신체임을 알려준다. 우리의 파롤은 우리의 언어이고, 이는 우리의 생명으로부터 비롯한다. 메를로-퐁티에게서 그렇다면 랑그는 아직은 부차적인 것이다. 물론 메를로-퐁티와 소쉬르가 말하려는 사태가 다르지는 않다. 언어 이전의 사유란 하나의 '덩어리', '애벌레', 미분화된 어떤 것이라는 것이다.

두 학자들의 말과 관련해서, 아이의 언어 생활을 더 생각해보고자 한다. 아이의 '말 배우기'와 관련해 부모의 진정한 관심은 아이의 '말'이 아이의 생명의 반영이라는 점, 우리 아이의 신체적, 몸의 특성에서 나오는 매우 세밀하고도 고유한 떨림, 목소리라는 것에 있어야 한다. 아이가 풍요로운 언어 생활을 한다는 것은 자신의 언어로 자신의 생명을, 독자성을, 고유성을 표현할 수 있도록 하는 것이다. 메를로-퐁티가 우리에게 가르쳐주는 것처럼 아이의 '파롤'은 아이의 내적 생명이다. 

두 학자들 모두가 공통적으로 지적하는 것은 언어가 우리 인간 사유의 도구라는 점이다. 인간은 언어를 통해서 사유하는데, 이 때 언어는 우리 문명과 문화가 전승해준 '언어'이며 벌이나 고래의 언어처럼 유전적, 생물학적인 것이 아니다. 즉 인간의 언어는 표현도, 상징도 넘어서 있는 특이성을 갖는 것이다. 아이가 풍요로운 언어 생활을 한다는 것은 아이가 꼭 생각하고 정확하게 이해해야 할 것을 그렇게 하도록 언어를 가르친다는 것을 의미한다. 예를 들어 아이에게 사물의 '이름'을 정확히 알려주는 것, 더 나아가 사물의 이름의 이름, 즉 범주를 가르쳐 주는 것, 양상 문장이나 시제 표현을 알려주는 것 등이 포함될 것이다. 

정리해서 아이가 풍요롭게 언어 생활을 하려면 아이의 내적 생명으로부터 비롯한 내적 언어를 지켜야 하며, 동시에 우리 문화와 문명이 알려주는 언어의 체계 속에 들어와야 한다. 만일 후자만을 강조하면 아이는 언어의 '사슬'에 묶이게 된다. 또한 전자만을 강조하면 아이는 무의식의 '사슬'에 묶이게 된다. 아이가 풍요로운 언어 생활 즉, 자신이 물려 받은 언어의 규칙을 따르면서도 그 규칙을 시인들처럼 교란하고, 유희하려면 부모는 아이에게 말(랑그)을 가르쳐 주는데에만 집중할 것이 아니라 아이의 말(파롤)을 보호하고 이해하려고 노력해야 한다. 창조성의 절멸은 랑그를 파롤에 비해 지나치게 중요한 것으로 사회가 여기도록 하는 것에 있다. 즉 지나친 말 가르치기 풍토 때문이다. 양자가 이루어야 할 긴장에서 놓여나게 되면 아이는 그 즉각 창조성을 잃어버리게 된다. 더욱이 레비스트로스가 말의 교환이 경제적 교환으로 이어졌다고 하는 말을 생각해보면 아이들이 부모의 지나칠 정도로 사회적 언어를 중요하게 가르치는 태도로 인해 언어적, 사회적, 정서적 자유를 잃어버렸다고 진단하더라도 결코 틀린 말은 아닐 것이다.

다시 발레리의 말로 돌아가서,
우리 아이는'언어라는 아름다운 사슬'에 묶이는 중이다. 왜 '아름다운'이라는 말이 붙었을까? 언어가 사회적 규범 속으로 불러 들인다는 점에서는 '사슬'이지만 동시에 우리에게 무한한 '자유'를 주기도 하기 때문일 것이다. 마치 누군가로부터의 끝없는 구속이 아름다울 수 있는 이유가 '사랑'인 것과 마찬가지로. 아이가 자신의 생각을 말하도록 하자. 그리고 아빠의 언어를 가르치자. 아이를 언어 제국의 시민으로 살아가게 하자. 그리고 그 제국의 시민은 자유로울 수 있도록 하자.

아이야, 네 생명이 알려주는 소리를 내렴. 네 생명이 알려주는 문법을 배우렴. 네 생명이 알려주는 단어를 말하렴.
그걸 배우는 동안 아빠의 소리, 아빠의 문법, 아빠의 단어는 조금 천천히 배우도록 하자.


인문 육아 794일 아빠의 인문 육아(7) - 힘내라 엄마들! 2012/05/09 13:39 by 철학본색

지난 일요일부터 몸이 좋지 않더니 병원에 가니 몸살, 인후염이란다. 의사 선생께서 무슨 일을 하시길래 이렇게 피곤하냐고 묻는다. 어제는 열이 하도 많이 나서 그런지 턱이 빠질 것 같이 아팠다. 몇 일째 몸이 찌뿌뚱하다. 입맛도 없다. 의욕도 없다. 그래서 아이도 제대로 못봤고 때문에 육아일기도 건너 뛰었다.

아이는 이 할머니, 저 할머니께 왔다갔다 하며 잘 지낸다. 한동안 내게 떨어지지 않으려 해서 고생스러웠는데 지난 일요일에 아주 실컷 놀았더니 아이가 평화로워졌다. 하루 종일 잘 놀고, 자다가도 깨지 않는다. 아빠가 아픈 것을 아는지 아빠 잠자리를 방해하지도 않고, 오래 안기지도 않는다. 

내 파트너와 나의 여동생은 육아와 자기 일을 해나가느라 여념이 없다. 오늘날 많은 '엄마'들이 자기 일과 육아를 병행하고 있을텐데 아이가 어릴수록 엄마들은 육아와 관련해 무거운 죄의식을 안고 살아가는 경우가 많다. 이유는 아이의 중요한 시기에 함께 있어주지 못한다는 미안함 때문이다. 육아 전문 서적을 펼쳐보면 예외 없이 만 3세 이전에 양육이 아이의 평생을 결정한다 라던가 같은 시기에 엄마의 역할이 중요하다는 내용이 꼭 나오기 마련이다. 그리고 거기에는 꽤 다양한 '과학적 근거'들도 있다. 만 3세 이전에 주양육자가 바뀌지 않는 것이 아이의 애착에 도움을 준다는 것은 20여년 전부터 알려져 오는 대단히 신빙성 있는 가르침이다.  그런데 여기에는 '엄마' 역할의 중요성만 있을 뿐 '아빠'의 역할은 보조적인 수준에서만 이야기하는 경우가 많다. 아빠인 나는 그렇게 쓰인 글을 읽을 때마다 '소외감'을 느낀다. 또한 만 3세 이전 양육이 절대적인 중요성을 갖는다는 것과 그것이 중요하다는 것은 아주 다른 말이거니와 육아 서적들은 만 3세 이전의 교육이 평생을 결정 짓는 것 같이 이야기한다. 내가 보기에 이것은 일종의 '환원주의'이다. 아이가 성장한 이후에 겪게 될 모든 성공과 모든 실패는 만 3세 이전 엄마가 어떻게 양육했느냐로 설명하는 것이다. 이것은 일종의 사이비 과학이다.

내 파트너와 여동생이 '육아'와 관련해서 갖게 되는 죄책감도 위의 나의 질문들과 연결되어 있다. 우리 사회는 육아의 책임을 '엄마'에게 묻는 것에 익숙하다. 엄마가 잠시라도 떨어져 있으면 한결같이 '아이가 불쌍해서 어쩌나' 걱정을 한다. 그런 걱정들 속에서 아이의 '엄마'는 아이의 '노예'가 된다. 자기 일을 하더라도 마음 편하지 않고, 육아를 할 때도 바깥 일 하느라 이미 지쳐 질 좋은 육아가 안된다. 그리고 시아버지, 시어머니, 친정 엄마, 신랑은 엄마의 감시자 노릇을 한다. '애를 잘 보는 것도 중요한 일이다. 너는 왜 그렇게 이기적이냐.'그래서 아이가 조금이라도 다치기라도 하면 아이는 태연한데 엄마가 아이에게 '미안해서' 어쩔 줄 모른다. 그리고 그걸 본 감시자 중 한사람은 꼭 이렇게 말한다. '애를 잘 봐야지, 엄마가 되어서 뭐했냐?'. 이쯤되면 엄마는 떼고 싶은 계급장이다. 여기서 아이 양육은 엄마에게 '책임'이 된다.

만 3세 이전의 육아가 중요하다는 전문가의 지적을 들을 때면 즉시 내 주변의 엄마들은 자신이 현재 무엇을 잘 하고 있지 못하는가를 묻게 된다. 다른 엄마들은 아이에게 이렇게 해주고 있는데 나는 그렇게 해주지 못하기에 우리 아이가 뒤처지거나 잘못되지나 않을까 하는 생각을 하는 것이다. 그것은 아이를 향한 엄마의 사랑이기도 하겠지만 엄마의 이기심이기도 하다. 

대학 갓 들어간 신입생 시절 프로이트를 어줍잖게 알고서 궁금한 게 있었다. 무의식은 언어화 이전인데 언어화 되기 이전의 것을 어떻게 존재한다고 말할 수 있을까 하는 질문이었다. 즉 무의식은 증명될 수 있는 것이 아니며, 따라서 정신분석학은 엄밀한 과학이 될 수 없다고 섣불리 단정지어 버렸던 기억이 난다. 만 3세 이전 육아의 중요성이란 것도 마찬가지이다. 아이가 한 사람의 훌륭한 인격체가 되는 것이 만 3세 이전 엄마의 양육과 연결될 수 있겠지만 그것은 아이가 고백하거나 보고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 누군가가 외부에서 관찰하여 그 상관관계를 설명한 것일 수 밖에 없을 것이다. 마치 무의식이 의식과 자아가 자라나도록 하는 영양소라면 우리는 의식과 자아를 통해서 무의식을 사후적으로 의제할 수 있을 뿐, 무의식에 직접적으로 다가갈 수 없는 것과 마찬가지이다. 아이는 만 3세 이전 엄마와의 관계로 더 질 좋은 애착을 갖고 그 애착을 통해 더 잘 성장할 수 있겠지만 마치 거기서 아이의 많은 부분이 결정되는 양 말해서는 안된다. 증명 될 수 있는 영역이 아니며, 어디까지나 사후적으로 추론된 것일 뿐이다. 훌륭한 인격체라는 말에서 '훌륭한'에는 많은 기준이 존재할 수 있고, 훌륭한 인격체로 자라도록 하는데는 만 3세 이후의 양육도 대단히 중요하다. 오해하지 마시라. 만 3세 이전이 안중요하다는 말이 아니라 만 3세 이전이 절대적으로 중요하다는 것이 이상한 말처럼 들린다는 것이다. 그것이 엄마들의 죄책감을 더욱 증폭시킨다.

직장을 가지고 있거나 공부를 하는 엄마들은 아이에게 책임을 다하지 못하고 있다는 죄책감에 시달리고, 동시에 내 아이가 문제 없이 다른 아이보다 더 나은 아이가 되어야 하는 이기심을 만족하지 못한 자격지심에 시달린다. 여기에는 우리 사회가 아빠는 일을, 엄마는 가사를 담당한다는 전통적인 성역할을 고수하고 있다는 것도 한 몫하고 있고, 우리 사회가 지닌 성공에 대한 다소 편협한 가치 기준도 한 몫하고 있다. 엄마들을 죄책감에서 벗어나도록 하기 위해서는 두 가지가 필요하다. 첫째, 아빠들이 육아의 중심에 엄마와 함께 서야 한다. 둘째, 엄마들이 아이를 믿어야 한다.

아빠들은 육아를 '돕는 것'이 아니라 육아에 중심에 서야 한다. 돕는 것은 어디까지나 보조적인 역할만을 하겠다는 것이다. 그리고 사회가 아빠들이 육아를 담당하는 것에 대해 조롱해서는 안된다. 아빠의 육아 담당을 부끄럽게 여기도록 하는 사회적 규범이 있는 한 엄마들은 아이들에 대한 끝이 없는 부채감 속에서 살아야 하며, 이런 감정을 여자들에게 심어주고서 출산 장려라든지 가정의 행복이라든지 하는 것은 기대조차 하기 힘들 것이다. 또한 엄마들이 아이를 믿어야 한다. 아이들은 생각보다 강하다. 보통 엄마와 아빠가 집을 비운 동안 육아를 담당하는 할머니나 베이비시터, 가정 어린이집 교사들로부터 내 아이는 많은 것을 자발적으로 배우며 성장해 나가고 있다. 마치 자신만이 아이에게 모든 것을 줄 수 있는 양 믿는 것은 교만하고 탐욕스러운 것이다. 거기에는 암묵적으로 아이에 대한 '소유욕'도 있다. 아이는 독자적 인격으로 자라나고 있다. 아이와 얼마동안 함께 있느냐가 중요할 수도 있지만 그보다 훨씬 중요한 것은 아이편에서 내 부모가 자신에 대해 신뢰를 주고 사랑을 베풀고 있다는 것을 인지하는 것이다.

부모인 우리가 아이에게 줄 수 있는 가장 좋은 것은 무엇일까? 만 3세 이전에 형성하는 애착이 아주 중요할 것이라 생각한다. 하지만 그보다 더 중요한 것은 아이에게 부모가 삶을 어떤 자세로 대했느냐 하는 것을 몸소 보여주는 것일 것이다. 내 파트너와 내 여동생은 우리 아이들에게 '최선을 다해서 꿈을 향해 도전하는 삶'이 가치있고 의미 있다는 것을 몸소 보여주고 있다. 그냥 일이 아닌 일생을 걸고 도전할만한  일을 위해 자신의 삶을 경주하고 있고, 새로운 경주를 준비하고 있다. 아이가 커서 엄마에게, 아빠에게 왜 만 3세 이전에 자신과 매일 많은 시간을 놀아주지 않았느냐고 원망할까? 오히려 왜 엄마, 아빠는 삶을 그렇게 대충 살아왔느냐 하는 물음이 더 무섭고 엄준한 질문이 아닐까. 우리는 최선을 다하고 있다. 두 엄마들이여, 죄책감에서 벗어나시라! 자신의 삶을 경주하시라. 우리 아이들은 강하다.

내가 존경하는 어느 선생님의 이야기로 마무리 해보자. 이 분은 만 3세 이전에 자신의 아이를 주양육자를 자주 바꿔가며 어린이집도 없던 시절에 동네 아주머니들께 맡기고 자신이 일생을 걸고 도전하는 일을 하기 위해 나섰다. 그럼 이 아이는 어떻게 됐을까? 이 선생님은 우리 나라 최고의 큐레이터가 되었고, 이 선생님의 아이는 세계 최고의 에니메이션 회사(Walt Disney)의 디렉터가 되었다. 

부모의 죄책감과 이기심, 그리고 그로부터 기인하는 '불안'이 아이를 망친다. 그리고 부모의 '자유'가 아이를 '자유'롭게 한다. 아이에게 '기대'보다는 '신뢰'를, 아이에게 '집착'보다는 '사랑'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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