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에 아이에게 크게 상처가 난 일은 두 번이 있었다. 하나는 파트너와 나의 결혼기념일에 여동생이 잠깐 아이를 보다가 아이가 넘어져 잇몸에서 피가 났던 일이 있다. 얼마나 호들갑을 떨었던지 소아과에 뛰어가 아이의 이가 상하지는 않았는지 물었다. 물론 아이는 당시 8개월이라 이가 있을리 없었다. 동생이 있다가 일어난 일이라 동생이 놀라지 않았으면 해서 최대한 태연하게 반응하려고 했지만 아이가 피를 흘리는 것을 보니 내 정신이 혼미해진다. 최근에도 아이가 많은 피를 흘린 적이 있었다. 아이와 침대에 잠들었다가 내가 잠시 나온 사이 아이가 침대에서 떨어져 코피를 많이 흘렸다. 아이를 안으니 내가 입은 흰색 면티가 붉은 피로 물들고, 지혈을 위해 눕히려니 아이가 하도 울어서 그날 밤 애 좀 먹었다. 아이가 흘린 피의 크기는 내 죄책감의 크기가 되어 몇일을 괴롭혔다.
최근에는 여동생의 아이도 얼굴에 상처가 났다. 얼마 전에 놀러갔던 낙동강둑 어느 횟집에서 신나게 뛰어놀다 앞으로 넘어져서 코를 갈았다. 이제 돌이 갓 지난 아이의 얼굴에 생채기가 났으니 부모 마음이 어땠을지 짐작이 간다. 아마 볼 때마다 미안한 마음, 안된 마음이 들었겠지.
아이 몸에 상처가 한번 나면 이건 아끼던 자동차가 흠집 나던 것과는 충격의 크기가 다르다. 사실 정말 심각한 상처가 아니라면 피부의 놀라운 재생력이 조금의 표시도 없도록 해버리지만, 자동차는 가만히 둔다고 해서 흠집이 사라지지도 않는다. 하지만 누군가 내 차를 긁고 갔을 때 느끼는 감정이 분노와 억울함이라면, 아이가 다쳐 상처가 났을 때 느끼는 감정은 죄책감과 자괴감이다. 어떤 감정이 더 고통스러운 감정인지는 굳이 설명하지 않아도 되리라.
아기의 상처와 자동차의 흠집. 이 두 종류의 스크래치를 비교하는 것이 두 종류의 세계관, 혹은 사고체계를 이해하는 한 방식이 될 수도 있지 않을까. 즉 아기의 상처는 시간이 지나면 상처가 나기 전의 상태로 회복한다는 사실과 자동차의 흠집은 시간이 지나도 변하지 않으며 노동력이나 자본이 투입되어야만 회복된다는 사실 말이다. 우리 문화는 자동차 외장 뿐만 아니라 인간의 신체와 정신조차도 상처가 아니라 '흠집'으로 여기도록 강요한다. 많은 부모들은 '본능의 이름으로' 아이에게 난 상처에 대해 극적으로 반응하는데 이 상처가 마치 일생에 거쳐 중요한 걸림돌이나 될 것처럼 염려한다. 더욱이 아이가 자라 청소년이 되면 아이는 범죄나 나쁜 성적과 같은 일생의 '흠집'을 만들지 않으려고 안간 힘을 쓴다. 그러다 이름 모를 대학이라도 결국 가게 되면 아이에게 흠집이 난 정도가 아닌 아이 자체가 사회의 '흠집' 인양 취급받게 된다. 여기서 끝이 아니다. 이제 성년이 된 아이는 보통 우리 문화가 과오라고 여기는 이혼, 부도, 병 등을 피하기 위해 노력한다. 우리 문화 속에 사는 사람들의 인생 주기는 이렇듯 '흠집'을 내지 않으려는데 집중되어 있다.
이렇게 흠집을 피하려는 사람들의 노력이 잘못된 것은 아니다. 아이에게 난 상처에 가슴 아파하는 것은 부모의 보호본능이 작동된 결과이며 이는 종의 보존이라는 관점에서도 필요한 것이다. 더욱이 만일 우리 인간이 흠집보다는 어떠한 것이든지 인간의 노력에 의한 어떤 '기념물'을 만들려는 노력이 없었다면 진보가 주는 안락함을 누리기 어려웠을 것이다. 하지만 진정한 문제는 '흠집'이라는 것이 마치 자동차의 그것처럼 자연적으로 회복되지 않을 것이라는 믿음에 우리 문명이 겪는 불행의 원인이 있다. 또한 그것이 설령 회복되지 않더라도 흠집의 발생을 자연스러운 것으로 받아들이지 않는 태도가 우리로 하여금 사물과 사태의 본성에 다가가기 어렵게 하고 결국 진정한 행복과 만족하는 삶으로부터 유리시키는 것이다.
상처 받기 쉬움. 이것은 인간성의 본질에 해당하는 부분이다. 우리 문화가 '상처'를 '흠집'으로 이해하는 한 우리 문화는 어떠한 상처도 받아들이고자 하지 않을 것이다. 그리고 노동이나 경제적 자원을 투입하는 것 없이 '되돌아 올 수 없다'는 특징을 지닌 흠집을 피하기 위한 강박관념 속에서 우리는 근원적인 행복을 잃어버리고 말 것이다. 하지만 상처는 결코 흠집과 같지 않다. 어떤 상처는 지울 수 없는 흠집을 남기지만 거의 대부분의 작은 상처들을 '시간을 통해' 회복시킨다. 상처가 나고 회복이 되는 것은 자연의 순환이다. 마치 나무의 모습이 시시 때때로 변하고 하늘과 대지의 풍경이 매부매초 변하더라도 항상 낙엽이 지면 다시 싹이 돋고 꽃이 피듯이 우리는 이 거대한 자연의 순환 속에 살고 있다. 니체가 말한 세계, 즉 전체로서의 힘은 불변하지만 항상 자기 창조와 자기 파괴의 순환이 이뤄지는 세계 말이다. 그리고 그런 세계에서 누릴 수 있는 디오니스소적인 행복이 바로 이것이다. 하지만 우리는 이 사실을 잊고 있다.
그것은 우리가 살고 있는 환경 세계가 온통 자연 재생력이 없는 흠집 나는 물건들로 가득 차 있는 것에 기인한다. 흠집나는 물건 속에 갖힌 채 자연의 순환이 가져다 주는 어마어마한 치유력을 잊고 살아가는 것이다. 아이폰의 뒷판이 행여나 조금이나 상처가 날까 우리는 보기 좋은 손전화기를 들고서는 한번도 못생긴 케이스를 벗기지 않는다. 뒷판에 만일 흠집이라도 나면 마음의 흠집이라도 난 것 같다. 아름다운 BMW를 사고서는 범퍼가 행여라도 다칠까 보기에도 흉한 고무판을 차에 달고 다닌다. 우리가 살고 있는집의 나무 바닥은 천연의 그것이지만 아이가 흠집을 낼까 카페트로 덮어버렸다.흠집에 대한 공포 내지 두려움으로 우리는 어떤 대상 조차도 있는 그대로 만지지 못하고 보지도 못한다. 손전화기 조차도, 자동차 조차도, 집에 깔린 천연 나무 바닥 조차도 있는 그대로 만지거나 밟거나 보지 못한채 '커버'로 흠집을 방지하기 위해 안간 힘을 쓴다. 사물을 있는 그대로 보는 눈, 사물을 그대로 느끼는 감각은 없다. 땅의 촉감을 신발 없이 느낄 수 없다. 카메라 없이 풍경을 누리지 못한다. 우리 문화는 사물을 그대로 보지 않도록 요구한다. 그러나 만일 우리가 아이폰에 나는 흠집을, 나무 바닥에 생기는 흠집을, 자동차 범퍼에 생기는 흠집을 자연스러운 현상이라고 받아들여보자. 우리는 대상과 사물을 온전하게 바라볼 수 있게 된다. 사물을 직접 경험한다.
나는 도시에 살고 있고, 내 주변의 모든 것이 '인공적인 것'이다. 나와 우리 아이의 환경 세계는 거의 인공적인 것으로 구성되어 있다. 우리가 좋아하는 아름다운 정원조차도 인공정원이다. 즉 자연적으로 원상회복이 불가능한 것이다. 내가 살고 있는 집은 오래된 집과 달리 시간이 지나 흠집이 쌓이면 헐어벼러야 할 집이고, 내 차는 결국 폐차장으로 가야 할 운명이다. 우리 주변에서 자연의 순환이 가져다 주는 치유력을 경험하고 있는 사물은 거의 보기 어렵다. 강박관념과 불안, 우리를 불행하게 하는 목표의식의 기원은 바로 '흠집나는 것들로 이뤄진 환경세계'에 있다.
아이의 상처에 대해서도 마찬가지이다. 아이에게 난 상처는 흠집이 아니다. 그것은 결국 회복될 것이며 원상으로 돌아올 것이다. 설상 흉이 남는다고 하더라도 그것을 이상한 현상이 아니라 자연스러운 현상이다. 그것을 받아들이지 못하는 것이 자연스럽지 못한 것이다. 부모가 아이의 상처에 호들갑을 떨지 말 것을 부탁하는 것이 아니다. 걱정스럽지만 아이에게 난 상처는 본질적으로 자연스러운 것이다. 인간은 상처받기 쉬운 존재라는 것을 이해하더라도 그것은 불가피한 것이다. 부모가 상처를 흠집으로 대하는 것이 아이가 사물을 있는 그대로 보는 것으로부터 멀어지는 시작이다. 언젠가 이야기할 기회가 있을 것으로 생각하지만, 아이들은 말을 배우기 위해서 사물을 직접적으로, 몸(살)으로 경험하고 그 사물에 '이름'이 있다는 것을 배우는 중이다.
아이에게 난 상처는 자연적으로 회복되는 것이며, 설사 큰 흉이 남더라도 이상한 일은 결코 아니다. 예수의 손과 발에 난 못박히 상처는 분명히 오명이었다. 그리고 그것은 예수가 부활한 후에도 흉터로 남았다.이 오명, 스티그마타(stigmata)라고도 하는 이 오명은 부활한 예수에게는 '성흔'이 된다. 사람들은 예수에게 흠집을 내려고 했고, 로마에서 이런 흠집은 부끄러운 일로 여겨졌지만 제자들의 믿음은 이 흠집, 이 상처의 흔적으로부터 시작되었다. 부활한 예수의 몸에 흠집이 없었다면 제자들에게는 아무런 증거도 없다. 우리 아이, 내 물건에 난 상처, 흠집은 성흔은 아니더라도 나의 흔적, 삶의 흔적, 내가 죽더라도 '남아 있다'. 아이에게 난 상처는 그래서 흉이 남더라도 부끄러운 일이 아니다. 예수에게 스티그마타가 부활의 증거라면 아이와 나에게 남은 흉은 회복의 증거이며, 생명과 자연의 증거이다.
내가 살고 있는 도시에서 아이가 사물을 있는 그대로, 자연의 순환을 이해하면서 자랄 수 있을까? 그것은 아이의 '직관'과 관련된 부분이다. 직관은 선천적으로 주어지는 것이 아니라 사물을 있는 그대로, 온전한 상태로 바라보는 훈련의 결과로 주어지는 것이다. 그리고 사물과 사태에 대해 커버로 덮어 씌우지 않고 그 자체로 다가갈 때 아이는 사물과 말을 나눌 수 있게 되고 자연의 순환에 몸을 맡기며 행복을 이룰 수 있다. 사물을 직접적으로 만날 수 있는 기회가 차단된 공간이라는 점에서 우리 도시는 흠집의 강박증에서 벗어나기 어렵다. 아이에게 사물이 드러나는 사태를 그대로 볼 수 있도록 도와주는 환경을 마련해주고 싶다. 고즈넉한 교회가 있고 개울이 있는 마을, 그것이 아니라면 100년이 넘은 아파트가 있고 200년이 넘은 빌딩이 있는 늙은 도시로 가고 싶다. 아이가 커가면서 자연의 회복, 자연스러운 상처를 받아들이도록 말이다.
아이야, 흠집을 내라. 그것은 상처다.
반전이 있다. 아이의 상처에 대해 장모님께 여쭤 봤다. 장모님은 잊고 계셨단다. 아니, 아이가 칼을 잡았는데 그걸 잊으시다니..? 우습게도 아이 손에 난 상처는 칼로 인한 것이 아니라 붉은 볼펜 자국이다. 그러니 장모님이 굳이 기억하실 필요가 없으셨다. 아이의 상처는 부모의 '환상'이라는 것을 보여주는 멋진 은유 아닌가. 상처는 지워지지 않는 흠집이 아니라는 것을 알려주는 기막힌 비유 아닌가?
아이야, 상처를 내라. 그것이 너와 나의 본성(nature)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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