哲學本色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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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토로그 마이가든



20100717 영화 '내 깡패 같은 애인' (-영민햄)

'내 깡패 같은 애인'에 대한 사적이고, 그래서 사소한 리뷰임.

박중훈은 이런 연기가 잘 어울린다. '오동철'이라는 사람.
연기 잘하기로 소문난 정유미. '한세진'이라는 사람.
영화는 지방대 석사 출신 아가씨의 서울 상경기, 아니 취업도전기. 처럼 보인다. 하지만...

그런데 이 영화는 끝이 이상하다.
경찰 담그러 갔다가 오히려 자기가 담금질 당한 '오동철'. 죽은 줄로만 알았고 죽었다고 이야기된 '오동철'이 이제 건실한 기업의 대리가 된 '한세진' 앞에 나타나는 것으로 영화는 마무리된다. 감독은 송장 다 치우고, 장례식 끝내고, 애도니 작별이니 한세진의 성공 후일담으로 영화를 마무리하는 듯 하더니 갑자기 삼류로 빠질 작정이라도 하는 양 해피엔딩을 만든다. '내 깡패 같은 애인'이 살아돌아온 것이다.

그런데 이 영화 다시 보자. 감독은 오동철 살리기로 말하려고 하는게 있었던 게 아닐까?
오동철은 처음부터 한세진의 환타지가 아니었을까? 한세진의 꿈 속에 존재했던 로망이 아니었을까? 한세진은 실직과 함께 실연했다. 그녀는 옆집에 깡패가 산다는게 찝찝하지만, 그 깡패는 자신을 대신해 분노를 표현해주고, 흥신소에서나 하는 일도 자발적으로 해준다. 취업을 빌미로 한세진에게 성상납을 요구하는 어떤 말종이 있었다. 한세진은 거부했다. 오동철은 가서 그 말종을 두들겨 팬다. 현실적이기 보다는 환성적인 이야기 아닌가? 아버지에게 오동철을 데려간다. 결혼할 사람으로 연기해 달라고 부탁한다. 오동철은 우스꽝스러운 연기를 해내지만 이내 자신의 정체가 들통 나버린다. 이 역시 한세진의 외디푸스 컴플렉스가 아닌가? 한세진은 오동철이 죽었는지 모른다. 오동철이 죽은 것은 첫눈이 말해준다. 그런데 한세진은 오동철을 기다린다. 기다렸고 그리고 어느 주유소 자동세차기 앞에서 오동철을 만난다. 한세진에게 오동철은 자신의 분노를 대리분출해줄 '내 깡패 같은 애인'으로 환상적 대상으로 만들어졌던 것은 아닐까?

'내 깡패 같은 애인', '내 애인 같은 깡패'
한세진에게 오동철은 '내 깡패 같은 애인'이라기 보다는 '내 애인 같은 깡패'이다. 둘은 하룻밤을 함께 했지만 단 한번도 서로를 애인으로 여기지는 않는다. 그런데 왜 제목은 '내 깡패 같은 애인'일까? 한세진의 현실이 깡패 같은 애인이라는 환상을 요청했다면 지나친 과장만은 아닐 것이다. 우리의 현실이 분노를 자아내고, 실재를 환상으로 덮도록 강제하기 때문이다. 영화의 한계는 그런 면에서 뚜렷하다. 88만원 세대에게 현실에 대한 투쟁 역시 실재의 차원이 아닌 환상의 차원에서 일어난다. 우리 젊은 세대의 분노는 우리 자신이 넘어서려 하기 보다는 우리 시대의 잉여적 존재인 '오동철'이 해줄 것으로 기대하는 한 이 땅의 어떠한 변혁도 일어날 수 없을 것이다. 영화에서 한세진은 건실한 기업에 취직해 성공 가도를 달린다. 오동철은 죽고, 한세진은 살고. 대졸 취업준비생은 살고, 고등학교도 못나온 이들은 죽고. 그러나 한세진은 오동철의 죽음도, 현실도 정확히 모르듯이 88만원 세대는 자신의 문제에만 골몰해 있을 뿐 이 사회의 고통 당하는 일반에 대한 궁금중도 없고 연대를 모색하지도 않는다. 한세진의 관심은 오동철이 깡패인가 아닌가 하는 것에 집중되어 있어 다른 물음이 증발해버렸다는 것고 오동철이 한세진의 숨기고픈 이력서와 고향집과 결심과 삶의 고민을 모두 들어주고 있음은 선명한 대비가 아닌가? 여기서 한세진의 또 다른 환상. 내 이야기를 들어주기만 하는 남자. '남자여 말을 하지 말아라'. 앞서 말한 영화의 한계는 오히려 영화의 새로운 가능성이기도 함을 주지하자.

명함 한장 달라는 오동철. 깡패 치고는 너무 착한 오동철. 자신은 몰락하지만 누군가를 구원하려는 오동철.
이 진술만으로도 현실적 인간의 범위를 넘어선다. 그는 '환상'이었던 것이다.

2010 한국이 월드컵 16강에 오른 것 (-영민햄)

2010년 남아공 월드컵에서 우리나라가 16강에 오른 것이 우리가 잘해서 오른 것인가요?
우리는 그리스에게만 2대0으로 이겼을 뿐 아르헨티나에게는 4대1로 대패했고, 나이지리아와도 아슬아슬한 무승부를 이뤘는데요.
우리나라의 16강을 기뻐한 것은 우리나라 축구 실력이 이처럼 대단하다 라는 점이 놀라워서인가요, 아니면 16강 자체가 목표가 된 걸까요?


지나친 경계인지는 모르지만 저는 우리나라가 잘해서 오른게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생각해보면 오히려 독일 월드컵 때보다 내용이 좋지 않은 것 같습니다. 이렇게 많은 실점을 하고 16강에 오른 것은 한 조에 아르헨티나가 있었다는 행운의 결과이지요. 그렇다면 우리는 행운을 기뻐한 것이지, 실력을 기뻐한 것이 아닌게 아닐까요?

축구의 실력, 축구 경기의 내용보다 16강에 올랐다는 사실이 중요하다고 받아들이는 것이 우리 사회의 가장 만연한 병폐 중 하나를 보여주지 않나 해요. 과정, 실력, 내용 보다는 결과, 배경, 행운을 중요시하고, 이것은 사람들로 하여금 요행을 바라게 한다던지 비정상적인 수단을 도입하게 한다던지, 서열화를 고착화시키니까요. 생각해보십시오. 화투를 쳐도 거기에는 단순한 행운이 아닌 화투판을 결정짓는 실력과 내용, 판을 읽는 해석의 눈이 있습니다. 그래서 신문선이 한국 축구 병들었다고 하는 것에 저는 동의가 됩니다. 
16강이 뭐라고 선수들은 고작 비겨놓고 그렇게도 기뻐하는 것일까요? SBS는 그 난리일까요? 오히려 많은 사람들은 나이지리아와 비긴 것과 16강 진출이라는 쾌거 속에서 기뻐해야할지 말아야할지 어리둥절했을지도 모릅니다. 저는 도대체 우리가 왜 기뻐하고 있는지를 모르겠더군요. 잘해서 간게 아닌데. 제가 16강의 의미를 너무 과소평가하는 것일까요? 그렇다면 용서하세요.



욕먹을 각오하고 몇 자 더 적습니다.
김연아와 박지성을 왜 그렇게 기계적으로 인터뷰를 하는 것일까요? 경기 후나 경기 전 박지성이 인터뷰를 하는 것을 보면 어떠한 진정성도 느껴지지 않습니다. 마치 박제된 연예인 '욘사마'를 보는 것 같이, 박지성은 똑같은 톤으로, 마치 멘트 내용을 외운 듯이 눈을 치켜 뜨고 말합니다. 제게는 박지성이 거만해보입니다. 욘사마가 돈 벌어서 선생님이 되듯이, 박지성도 맨유에서 돈을 벌어서 대표팀 안에서 뿐만 아니라 국민들 앞에서 대장질을 하려는 것처럼 보일 정도입니다. 차범근에게 느껴지는 온화함을 박지성에게 기대할 수는 없겠지만 최소한 눈만이라도 좀 힘을 뺐으면 해요. 차라리 마라도나가 낫지요. 얼마나 솔직합니까? 한국 축구판에는 잘하는 박지성 보다는 재밌는 마라도나가 더 필요한지도 모르겠군요. 16강 진출 후 박지성이 이영표를 보고 한 말, '그 형은 좀 감성적이라서'..  박지성은 마라도나가 되기는 힘들겠지요?

김연아 인터뷰도 마찬가지지요. 인터뷰 금메달은 아사다 마오입니다. 얼마나 다정다감합니까? 그녀는 얼마나 서비스 정신으로 무장해 있나요? 저는 김연아 경기 볼 때 김연아는 예술가고 나머지는 운동선수라는 생각을 했습니다. 그런데 아이스링크 밖에서 아사다 마오는 '가까운 여동생'이고 김연아는 가까이 하기엔 너무먼 '사업가'입니다. 진정정 없는 인터뷰는 하지 않는 편이 백배 낫다는 생각이에요. 참고로 이영표 선수도 눈에 힘좀 빼주세요. 왜 그렇게 눈에 힘을 주나요? 누가 시키나요? 대표팀 코치가 그렇게 요구하나요? 차두리, 박주영, 이청용 선수, 허정무 감독은 눈에 그렇게 힘 주지 않던데요.


사상 최고의 전력, 한국대표팀.
누가 한 말이지 모르겠지만 사상 최고 전력 한국대표팀이 이뤄낸 성과는 사상 최초의 원정 16강 진출입니다. 1승 1무 1패, 조별예선에서 단 6골밖에 먹지 않았습니다. 아, 정말 사상 최고의 전력을 가진 대표팀이군요!!

20100706 존재론적 영성과 기독교 신앙에 대한 짧은 단상

                                                                                    

1.1 그리스도와 그리스도의 십자가가 의미하는 것은 무엇인가?  십자가 신앙과 존재 신학은 어떤 관계가 있는가? (존재신학을 존재론적 영성이라 할 때) 존재론적 영성은 기독교 신앙의 배타적 특이성을 허무는 것이 아닌가? 만일 그렇다면 타종교와 기독교의 경계를 허물게 되는 것이 아닌가? 예수 십자가의 본질 의미는 경계 허물기가 아닐까?

1.2 나는 이토록 중요하고 어려운 문제, 또 민감한 문제에 대해서 어떠한 할 말이 있겠는가? 그저 나의 어줍잖은 혼견을 나누는 것에 만족하고자 한다. 다소 난삽하더라도 용서하고 읽어주길 바란다.


2.1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그리스도가 '중요하다'라는 말을 그저 수사로 사용하는 것이 아닌 정말로 '의미있는 것'으로 받아들이려면 잠정적이지만 결정적인 그에 대한 해석이 동반될 수 밖에 없다. 기독교 교리에 대해서 맹목적인 이들과 기독교 영성에 들어가는 이들의 결정적인 차이는 거기에 있다. 대개 '십자가의 중요성'을 교조적으로 변증하려는 이들은 그것이 어떤 의미에서 중요한지를 말하기 보다는 그것이 기독교 신앙의 핵심임만을 기계적으로 강조하면서 많은 차이와 특이점들을 손쉽게 무화시켜버리는 것 같다. 물론 존스토트의 저술처럼 십자가와 그리스도의 중심성에 본질적으로 육박해 들어가는 이들을 모르는 것은 아니다. 따라서 기독교 신앙은 그리스도와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의미를 궁구하는 것에 본질이 놓여 있다. 강조하고 싶은 것은 기독교 신앙의 본질이 앞서 말한 것에 있다고 할 때, 존재 신학 자체가 기독교 신앙의 특이성을 구성하는 것은 아니라는 것이다. 존재, 즉 신은 기독교 영성에서도 물론 궁극적이지만 그것이 기독교 신앙에만 국한된 것은 아니라는 점을 말하고자 하는 것이다. 기독교 신앙은 그리스도와 그의 십자가를 통해서 존재의 빛으로 들어간다는 점에서 그 본질이 있는 것이지, 그리스도와 그의 십자가만을 강조한다거나 혹은 존재의 빛만을 강조하는 것만으로는 신앙의 본질적 구성 요소 중 하나를 결여할 수밖에 없는 것이다.

2.2 존재와 예수/십자가를 관계 맺는 문제는 더욱 어렵다. 이에 대해서는 현상학에서 한가지 단초를 얻어 예수와 십자가를 현상학에서 말하는 '판단중지', '초월론적 환원'으로 이해할수도 있지 않을까. 현상학에서 초월론적 판단중지는 '자연적 태도의 일반정립을 중지하는 것', 쉽게 말해 '세계가 존재자들의 총체라는 소박한 믿음을 중지시키는 것'을 의미한다. 이는 존재자들을 없애거나 존재자를 사소하게 여기는 것이 결코 아니다. 또한 초월론적이라는 말을 쓴다고 하여 신비적인 것이 아니다. 자연적태도의 일반정립을 중지시킨다는 것은 하나의 '태도변경'이다. 즉 존재자들의 존재정립을 '유보'하고 그것이 주관에 의해 의미로 구성된 것임을 드러내는 것이야말로 초월론적 판단중지가 의미하는 바이다. 후설에 따르면 초월론적 판단중지를 통해서야 비로소 세계가 그저 있는 것이 아니라 초월론적 주관의 작용에 의해 구성된 의미적인 대상임이 드러난다고 한다. 그때야 주관, 즉 자아는 초월론적인 세계 개방을 경험하여 세계와 적극적으로 관계맺고 있는 자신을 확인하게 되고 자신의 의미 구성 작용 자체를 검토하고 반성하며, 존재자의 총체로서의 세계가 아닌 세계의 존재 그 자체로 들어갈 수 있다는 것이다.. 그래서 예수의 죽음, 십자가가 이 같은 판단중지를 가능하게 하고, 초월론적 자아가 궁극적으로 도달해야 하는 하나의 이념으로 제시되고 있는 것이 아닌가 한다. 예수의 죽음이야말로 모든 육체적, 세속적 요구를 거부한 죽음이요, 세계를 부활로 몰고가는 계기의 새로운 단초로 작동하기 때문이다.


3.1 만일 그렇다면 타종교와 기독교의 관계가 문제가 될텐데, 타종교 역시 존재에 대한 하나의 해석을 담고 있다고 할 때 기독교인들은 존재일반에 대한 탁월한 예시와 해석, 존재일반론적 영성으로 들어가는 빠른 길로 그리스도와 십자가를 믿는 이들이라고 생각할 수 있을 듯하다. 그렇게 되면 존재에 대한, 기독교 신앙에 대한 상대적 입장이 아닌가 하는 이들이 있을지도 모르지만, 인간이 두 시간과 두 공간을 동시에 살아갈 수 있는 존재일 수 없다는 점에서 기독교 신앙을 선택한 자들은 그들 입장에서 기독교를 절대적으로 여기는 것이 한편으로 당연하며, 절대적이고, 이에 대해 나의 시간 안에서의 '나의 신앙'으로, 또한 존재가 기독교를 통해서도 알려지고 드러나는 한, 타종교의 진리성을 인정한다고 하여 상대적 입장에 떨어지는 것은 결코 아니라는 것이 논리적으로도 자명하다.

3.2 정리하자면 내게 절대적인 것은 절대적이다. 내게 명증적인 것은 명증적이며 그것을 부정할 수는 없다. 그렇다고 할 때 타인에게 명증적인 것은 명증적이며 그것이 내용상 다르다고 하더라도 사태상 같은 것을 지시할 수 있는 가능성은 얼마든지 존재한다. 이것은 내포와 외연의 관계이다. 내포는 내포대로 절대적이지만 다른 내포적 의미를 지닌다고 해도 같은 외연적 의미를 지시할 수 있기 때문이다. 개밥바라기와 샛별은 각기 저녁 서쪽 하늘에 밝게 빛나는 별, 새벽 동쪽 하늘에 밝게 빛나는 별이라는 다른 내포적 의미를 지니지만 같은 외연적 의미인 금성을 지시체로 갖는다. 그 때 개밥바라기와 샛별은 금성을 지시하는 다른 길을 보여준다고 해서 그 의미가 상대적이거나 반감되는 것은 아니다. 그것은 구체적인 인간의 경험에서는 절대적으로 개밥바라기이며, 또 한편 샛별이다.


4.1 예수는 '경계'를 허물고, 또한편으로 그 자신 경계 그 자체이다. 예수가 경계를 허물었다함은 그 자신 어느 한 영토에 귀속되기를 거부했다는 것이며, 예수님께서 경계 그 자체라는 것은 그 경계 위에 서 있는 것, 경계 그 자체가 되는 것이야 말로 (예컨대 신과 인간, 유대인과 이방인, 삶과 죽음, 십자가) 영토에 귀속된 어떠한 존재론적 입장(앞서 말한 자연적 태도의 일반정립)에서 벗어나는 것으로 여겼기 때문이다. 이런 표현이 어떻게 들리지 모르지만 그런 의미에서 예수는 해체적이며 데리다식으로 말해서 '유령적'이다.

4.2 반성적이고 소박한 믿음의 영역을 벗어나게 새로운 태도와 의미 구성을 가능하게 한다는 점에서 현재적이고, 해석적이고, 그래서 미래적이다. 그래서 최소한 기독교 영역 내에서는 존재 없이 그리스도가 없고(그리스도는 존재 사건 자체이기에), 그리스도 없이 존재는 없는 것(존재는 그리스도와 그의 죽음, 부활을 통해서만 드러나고 드러나짐을 보증했기에)으로 말할 수 있는 것이라 생각할 수도 있다.

4.3 따라서 누군가의 말처럼 존재일반과 그리스도의 십자가는 긴장관계를 유지해야 한다고 하는 것은 전혀 사태에 부합하지 않는 언설이다. 오히려 양자는 상호공속적이고, 한편으로는 필연적인 관계이다. 문제는 양자 사이를 필연적이라고 한다면 타종교의 진리와 존재 사이의 관계는 우연적이 된다는 것인데, 나는 그에 대해서 다음과 같이 말할 수 있다. 필연성은 단지 고백의 차원일뿐 우리는 존재라는 단적인 사태 앞에 얼마든지 타종교와 대화하는 것이 가능하며 이러한 입장(타종교와 대하할수 있으면서도 기독교 진리는 필연적이다라는 입장)에는 어떠한 역설도 존재하지 않는다. 왜 그런지에 대해서는 이미 3.2에서 밝혔다. 어느 누구도 샛별과 금성의 관계를 개밥바라기와 금성의 관계보다 존재론적으로 탁월한 필연적 관계성을 지니고 있다고 말할 수 없다.


5.1 지금 나는 예전처럼 이와 같은 대단한 어려운 문제에 대해서 문체적 악습과 혼견으로 더욱 이해되기 어려운 것으로 만들고 있는지도 모른다. 더욱이 철학도 답지 않게 제기된 어려운 딜레마를 사태 자체에 즉해서 보기 보다 현상학적 교리에 따라 편의대로 설명하고 이해하려는 경향이 있을지도 모른다. 만일 그랬다고 한다면 용서를 구한다.

5.2 이 글은 내가 아는 한 선생님께 보낸 글에다가 어투를 고치고 내용을 조금 더 보완하여 수정한 것임을 밝혀둔다. 따라서 맥락이 닿지 않는 부분이 있으리라. 만일 그랬다고 한다면 부디 다시한번 더 용서를 구한다.            

<알림> 존재와 시간 윤독회

그간 쉬어오던 <존재와 시간>윤독회를 이번 목요일부터 재개합니다.
시간은 매주 목요일 7시, 장소는 제게 전화로 문의를 주세요.
식사 후 모이는 것으로 하겠습니다.

이번 주는 15절에서 17절까지 읽어오시면 되겠습니다.

참석을 원하시는 분은 늦지 말고 와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20100623 내가 다시는 비유로 말하지 않고. (설교의 정치성을 묻는다)

'직접적인 것'에 대해 직접적으로 말을 하는 것은, 싸구려 장식과 같은 거짓 정열로써 자신의 꼭두각시들을 치장하고, 기계 부속품에 지나지 않는 등장인물들을 무엇인가 실제로 바꿀 수 있는 주체들인 양 행동하게 하는 소설가와 같다. '삶'을 향한 시선은 '삶이 더 이상 존재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기만하는 이데올로기로 넘어갔다. -아도르노 '미니마모랄리아'의 서문

 

이주노동자와 비정규직 노동자들의 투쟁을 지지하며 성명성에 이름을 올리거나 지지방문을 하고 정치적 이슈를 다루는 논문을 쓸 수 있지만, 이상하게도 그것을 시로 표현하는 것은 쉽지가 않다. 사회참여와 참여시 사이에서의 분열, 이것은 창작과정에서 늘 나를 괴롭히는 문제이다.(진은영, 감각적인 것의 분배, 창작과 비평 2008년 겨울호) 

시인 자신의 정치적 참여는 물론 가능하다. 그리고 시의 경우에도 그것이 불가능하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그 사이에는 어떤 분열과 거리가 있으며 그 둘 사이를 좁히는 것은 쉽지 않다. 둘 사이의 연결통로를 만드는 것은 어떻게 가능한가? 시는 어떻게 정치적일 수 있는가? 이러한 판단과 질문들이 '문학과 정치' 논의의 핵심이었다.(권희철, 당신의 얼굴이 되어라, 창작과 비평 2010년 여름호)


1.1 아도르노가 말하는 최소한의 도덕은 '직접적인 것'에 대해 직접적으로 말하지 않는 것이다. 나는 아도르노에 관해서 무언가 말할 형편에 있지 못하지만 위의 말이 드러내고자 하는 사태가 무엇인지에 대해서는 이해할 것 같기도 하다.


1.2 <창작과 비평>을 중심으로 '시와 정치의 관계'를 묻는 물음이 활발하다. 지난 겨울 진은영 시인의 랑시에르가 쓴 '감각적인 것의 분배'와 관련한 글이 이 문제에 대한 수많은 평자들의 다양한 성찰을 불러 일으켰다. 이 문제에 대해서도 나는 무언가를 말할만한 처지에 있지 못하다. 랑시에르에 대해서도 잘 모르겠고, 혼자 힘으로 진은영 시인의 시들을 이해할 능력도 부족하다. 근래 <창작과 비평>에서 선정한 어느 신인비평가의 평문으로부터 그녀의 시를 따라가는데 필요한 이정표를 소개받았다.

1.3 이번 <창작과 비평> 여름호에서도 또 다시 '시와 정치', '문학과 정치성'의 관계를 묻고 있다. 이름하여 '문학의 정치성을 다시 묻는다'. 어떻게 정치를 정치적으로 말하지 않을 수 있을까, 어떻게 시를 시로써만 쓰지 않을 수 있을까, 시도 삶이고 소설도 삶이라면 삶/정치를 어떻게 말할 수 있을까? 이는 이 문제에 대한 거친 정식화인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이러한 문제의식은 가라타니 고진의 문맥에서 '근대문학은 끝났다'고 하는 사망선고에 대해서 다시 문학의 새로운 시작을 이야기하는 부활의 전조를 담고 있는 것처럼 보이지 않는가? 삶과 정치에 대해서 더이상 소설이, 문학이 예전에 했던 역할을 더 이상 해내갈 수 없다는 것에서 근대 문학의 종언이 있다면, 우리네 논자들은 문학의 가능성을 다시 물어 그 부활을 예비하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2.1 문학계의 이런 논의에 대해서 나는 별로 할말이 없다. 예전의 노동시가 직접적인 것을 직접적으로 말하고 있는만큼 시적 요구와 정치적 요구의 이중구속을 손쉽게 해소해버리고 있다는 것에 공감한다. 소위 뉴웨이브라는 경향의 시들 역시 그러한 이중구속에 대한 근본적 반성에 이르지는 못한다. 내 식으로 말하면 그들은 모두 사이비 해결사들이다.

2.2 지금부터 내가 하려는 이야기는 문학이 아니라 설교에 관한 것이다. 시인이 당면하고 있는 이러한 이중구속의 과제는 '설교가'에게도 똑같이 주어진다. 시와 정치 모두를 고려할 때 진정한 문학적 성취가 시적 요구 혹은 정치적 요구 어느 하나를 만족할 때만 완수될 수 있는 것이 아니라면, 문학의 문학성은 시와 정치 너머에 있고 동시에 시와 정치 모두를 포괄하는 것일테다. 마찬가지로 설교자가 말씀과 정치 모두를 고려할 때 진정한 영성은 신앙적 요구와 정치적 요구 모두를 넘어서고 동시에 포괄하는 자리에 놓여 있는 것일테다.

2.3 시인은 시의 정치성을 묻는데 설교가는 설교의 정치성을 어째서 묻지 않는가? 이 물음은 설교가 정치적이지 않아야 한다던가, 설교가 정치적이어야 한다던가 하는 것을 의미하지 않는다. 오히려 근대문학의 종언을 이야기할 수 있는 것처럼 '설교의 종언'을 이야기할 수 있다면 설교가 역사적으로 감당해온 역할을 어떻게 다시 복권시킬 수 있느냐 하는 데에 이 물음의 본질이 있다. 다시 말해 오늘날 -최소한 남한에서- 행해지는 설교는 대개 무의미해졌다. 고진의 언급처럼 김종철이 문학을 버리고 환경운동을 하듯이 오늘날의 설교가는 설교를 버리고 밥을 퍼고, 행사를 하고, 코미디를 한다. 그것이 아니라면 여전히 80년대에 사는 설교가들이 있을 뿐이다. 그들은 삶을 방기한 채 주석에 파묻혀지내던지 아니면 그와 정반대로 강단에서 반공 이데올로기만을 강연하던지 또 한편 신자유주의에 대한 정치적 투쟁만을 강조한다. 그래서 설교를 통해 진정한 영성으로 돌입할 길은 사라져버렸다.

2.4 리처드 로어의 말대로 영성은 '안으로 들어가는 길'과 '밖으로 나가는 길' 사이에서 끊임없이 오가는 것이다. 편의상 안으로 들어가는 길을 성서에 대한 언어적 이해, 밖으로 나가는 길을 정치적 행위로 생각하기로 하자. 성서에 대한 철두철미한 의미론적 이해, 주석적 이해, 신학적 이해는 항상 밖으로 나가는 길을 생각해야만 한다. 밖으로 나가는 길을 쉽게 '실천'이라 할 때 그것은 당연히 정치적 실천도 포함될 것이다. 하지만 진정한 어려움은 안으로 들어오고, 밖으로 나가는 길 사이를 오고감, 이러한 이중적인 요구에 설교가가 '지혜롭게' 응답할 수 있는가 하는 것이다.

2.5 민중신학 계열의 사람들 혹은 친미 신학을 하는 사람들은 밖으로 나가는 길만을 생각한다. 그들에게는 안으로 들어오는 길이 부재한다. 그래서 주석적으로, 역사적으로, 의미론적으로 맞지 않는 말을 떠벌리고 성서를 아전인수한다. 민중신학 계열의 많은 이들이 그렇고 친미 신학을 하는 사람들은 더하다. 이런 의미에서 그들은 상황-근본주의이며, 노동시를 써내려가던 시인들과 다르지 않다. 노동시를 쓰던 시인들도 역할이 있었다. 다만 대개 그들에게는 문학적 성취가 없다. 민중신학 노선의 목사도 역할은 있다. 다만 대개 그들에게는 진정한 영성가를 보기 드물다. 그들은 목사이기보다 정치가다.

2.6 말씀, 말씀 하는 자들은 대개 안으로 들어오는 길만 생각한다. 그들은 밖으로 나가는 길이 부재한다. 그래서 대개 자폐증 환자처럼, 아니 강박증 환자처럼 성서를 되뇌이고 목이 쉬도록 기도한다. 그들은 삶과 아무런 상관 없는 말들을 한다. 밖으로 나가는 길만을 절대시하던 자들이 정치가라면 이 사람들은 -세계를 망각한- 정신병환자들이다. 이들도 역할은 있다. 대개 이들은 문자주의적 근본주의자로서 철저한 성서 주석을 만들어나간다. 그러나 이들도 '위대한 진리'가 우리 너머에 있다는 사실을 깨닫지 못한 채 자신의 성서 이해만을 절대시하는 인식론적 오류에 흔히 빠져 버린다.


3.1 설교에서 '남북통일'을 말하고, '4대강'을 말하고, '노무현'을 말하는 것은 '북침전쟁의 필요성'을 말하고, '천안함'을 말하고, '이명박'을 말하는 것과 조금도 다르지 않다. 그래서 설교에서 '정치'를 말한다고 해서 그 설교가 '정치성'을 갖게 되는 것이 아니다. 나이브한 방식으로 정치적 현안, 정치적 감정을 설교에서 언급하는 것은 싸구려 장식처럼 보일 때가 많다.
아도르노의 말처럼 설교자는 그렇게 정치에 대해서 말하는 것만으로 세상이 바뀔 것인양 믿는다. 우리가 정말 도달해야 할 곳은 '위대한 진리'의 새로운 영토인 '영성' 그 자체이다. 그것은 정치적 유토피아와는 다르지만 가장 급진적인 정치성이다. 따라서 정치에 대해 바둑판 훈수두듯 강단에서 이따금씩 설교하는 설교가들은 시인들이 그러하듯이 설교와 정치성을 물어가는 성찰이라고는 찾아볼 수 없는 자들이다.

3.2 예수, 바울이 직접적인 것에 직접적으로 말하지 않았다는 것을 기억하자. 특히 예수의 비유를 상기해보자.
예수는 늘 눈 앞에 있는 것들 너머에 있는 진실을 추구하라고 우리에게 요구했다는 것을 생각해보자. 어느 한 길만을 따라가는 자는 예수의 멍에와는 무관한 채 눈 앞에 있는 것만을 좇는 자이다. 그런 자들은 할 수 없다. '죽은 자는 죽은 자로 하여금 장사지내게 할 수밖에 없다'. 
예수는 늘 우리에게 다른 사람의 말을 잘 들을 것을 요구했다는 것도 생각해보자. 귀가 았는 자들이 들어야 할 것은 비유 그 자체가 아니라 비유의 속사정이며, 육체의 누룩이 아니라 영적인 누룩이었다.

3.3 안으로 들어오는 길-밖으로 나가는 길. 삶을 향한 시선-삶이 더 이상 존재하는 않는다는 사실. 문학-정치성. 설교-정치성. 명상-실천.
이러한 양자 사이가 변증법적인 길항 관계정도로는 설명될 수 없는 복잡한 연관이 있음은 말할 것도 없을 것이다. 언제고 기회가 된다면 진은영의 뛰어난 시처럼, 설교에서 설교의 정치성을 소화한 설교를 읽고 소개할 수 있었으면 한다. 시와 정치가 그러하듯이 설교와 정치의 이중구속에도 쉬운 화해는 없을 것이다.

3.4 하지만 우리에게는 약속이 있어 반갑다.

"지금까지는 이런 것들을 내가 너희에게 비유로 말하였으나, 다시는 내가 비유로 말하지 않고 드러내서 아버지를 일러줄 때가 올 것이다." (-요한복음 16장 25절)


<그림>
맨 위 : 르네 마그리트의 그림. "이것은 파이프가 아니다"
중 간 : 다이안 아버스의 사진. "뉴욕 센트럴 파크에서 손에 수류탄을 든 아이"(1962)]
아 래 : 다니엘리베스킨트의 건축물. "펠릭스누스바움 하우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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