읽고 오기 파르메니데스와 모세 (-권영민) 2008/02/26 17:50 by 철학본색

<이 글은 파르메니데스를 모세와 연결해서 생각해본 글입니다. 영화 '이집트 왕자'를 파르메니데스의 존재사유와 연결해서 써 논 글입니다. 이 글 역시 대학 3학년 때 썼던 글인데 참고가 되었으면 하네요. 우리 모두 그리스도교를 기초로 한 서양철학을 공부하고 있기 때문에 모세와 파르메니데스를 연결해서 생각해보는 것을 통해 여러분들도 창조적으로 희랍문화와 헤브라이즘을 연결시키는 '비약적'인 시도를 해보시길 도전해봅니다.>


400년 동안 이집트에서 노예생활로 복역한 이스라엘은 구원을 향한 강한 소망을 가진다. “우리를 구원하소서, 우리를 구원하소서!” 이집트 군사들의 채찍 아래 고된 부역을 감당하고 있는 장면과 이스라엘 사람들이 우람한 가슴을 한껏 드러낸 채로 강하고 튼튼한 팔로 밧줄을 메어 잡아 당기고, 구슬 같은 땀을 흘리며 구원의 소망을 담아 비장한 노래를 부르는 장면으로 영화 ‘이집트왕자’는 시작된다. 400년간의 이런 간절한 소망이 신의 권념으로 인해 모세를 통해 이뤄지고, 그들은 육체적, 정신적인 속박에서 해방되게 된다.



간절한 소망과 현실에 대한 불만족은 소망과 불만을 충족할 수 매개를 찾아 간절히 헤매이기 마련이다. 희랍에 있어서도 역시 이스라엘이 겪었던 유사한 역사적, 정신적 고통이 있었고 이스라엘이 400년을 기다렸듯이 그들도 사유에 있어 ‘해방’을 경험하는 데에 적지 않은 시간이 걸렸다. 그런 의미에서 파르메니데스는 모세와 다르지 않다.


역사적으로, 기원전 546년, 545년에 걸쳐 페르시아 제국의 침략은 당시 희랍인들의 공포와 두려움의 대상이 되었다는 것은 분명하다. 또한  지중해 안에서 일어난 무수한 전쟁은 희랍인들에게 고통과 죽음에 대한 두려움이 되었다는 것 역시 명백하다. 그렇다면 도대체 어떤 의미에서 파르메니데스가 모세와 다르지 않다는 것인지를 살펴보자.


“여신(Mnemosyne)이 나를 반갑게 맞아들였는데...잘 왔네. 그대를 이 길로 오도록 보내준 것은 나쁜 모이라(Moira)가 아니라 테미스(Themis)와 디케(Dike)니 말이네. 자, 그대는 모든 것을 배워야한다네. 한편으로는 설득력 있는(eupeitheos) 진리(Aletheia)의 부동의 가슴과, 다른 한편으로는 가사자들의 의견들을. 이것들 속에는 참된 확증(pistis)은 없네.”
파르메니데스는 그의 단편 1에서 암말들이 자신을 호위해 가고, 태워 날라졌으며, 처녀들이 길을 인도함으로써, 디케(Dike)가 열쇠를 가지고 있는 문을 들어서 여신, Mnemosyne를 만나게 되었다고 한다. 카리델리는 “오르페우스교에 의하면 침적화된 지역의 호수인 므네모쉬네 호수에서 나오는 므네모쉬네 여신의 물은 삶과 죽음의 경험으로부터 해방시켜 주는 효과가 있습니다. 다시 말해서 생사의 반복에서 벗어나 파르메니데스가 보았던 이상의 길로 들어서게 합니다.”고 하며 므네모쉬네 여신이 어떠한 상징적인 역할을 가지는가를 보여주고 있다.  

                                                                   <므네모시네 Mnemosyne>

 파르메니데스의 이와 같은 서두는 당시 희랍인들이 가진 정신적 상황, 삶에 관해서 잘 설명해주고 있다고 할 수 있다. 내 생각으로는 당시 전쟁과, 노략으로 고통 받는 희랍인들은 죽음을 ‘없음’ 즉 ‘무’로 간다는 것으로 알고 죽음을 맞이했는데, 이것은 인간이 가지는 극단적인 공포였기 때문에 이를 가공할 만한 위협으로 여기고 있었음이 보인다. 이러한 극단적이며 현실적인 위협으로서의 ‘없음’에 대해 파르메니데스는 역시 극단적이나 지성적인 위협을 상정하게 되는데 그것이 바로 ‘있음’이다. 있음에 없음을 대치시킴으로 고통과 죽음에 대한 두려움에서 희랍인들을 해방하는데 이 있음이 바로 파르메니데스의 ‘존재’ 개념이다. “있는 것은 생성되지 않고(agneton eon), 소멸되지 않으며(anolethron), 온전하고(oulon), 유일하며(mounogenes), 운동하지 않으며(atemes), 완전한 것이라는(edeteleston)" 것인데 곧, 있음이 생성하고 소멸한다면 그것은 없음과 다름 아닌 상태이며, 따라서 무로 돌아갈 것임으로 있음은 없음이 아니다. 따라서 있음이 없음이었을 리가 없고 없음으로 돌아갈 리가 없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없음은 불가능한 것이며 있음은 영원하고 생성소멸도 없는 불변의 것이라는 것이다. 파르메니데스는 이렇게 존재에 대한 확고부동한 선언은 마치 모세의 선언과 유사하지 않은가? 또한 그의 존재에 대한 설명은 “나는 스스로 있는 자”라고 자신을 소개한 이스라엘의 절대 신 여호와와 흡사하지 않은가?



 결론적으로, 파르메니데스는 doxa를 부정하고 경험을 배제한 철학자였지만 결코 현실적 문제를 떠나 있었던 사람은 아니다. 헤겔이 ‘철학은 그 시대의 아들’이라고 한 말처럼 파르메니데스 역시, 희랍인들이 가지고 있는 정신적, 역사적 정황을 가지고 있었고 당대의 문제를 인식하고 있었으며, 그 문제에 대해 적극적이고 활발하게 사유를 펼쳤다는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파르메니데스는 두려움에 사로잡힌 당대인을 ‘이상의 길’로 인도할 가능성을 열었다 할 수 있을 것이다.


2008.2.27 권영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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