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4일 철학본색 모임 후기 (영돈님 글, 영민 추가) by 철학본색

철학본색 시즌II 후기 ; 네 번째



안녕하세요. 이영돈입니다.(누구인지 기억이 나지 않으신다면 머리가 가장 짧았던 사람을 떠올리시면 될 겁니다.) 네 번의 모임 중에서 두 번 출석했지만 이런 긴장되는 일(?)을 맡게 되어 기분이 대단히 묘하군요. 글쓰기를 잘하는 편이 아니기 때문에 넓은 마음으로 졸문(!)을 읽어주셨으면 합니다.


네 번째 모임은 역시 시애틀 경북예고점에서 했습니다. 참석한 인원은 총 13명으로 오실 수 있는 모든 분이 오셨다고 합니다. 오신 분들의 이름은 다음과 같습니다. : 권영민, 류선희, 배종열, 배종욱, 손정슬, 이동신, 이영규, 이영돈, 이은희, 정지윤, 조보미, 황덕수, 황수진(가나다순) 모임은 10시 반부터 시작했습니다.

모임을 시작하면서, 먼저 종열군이 작성한 후기를 보았습니다. 지난 주에 참석하지 못한 저로서는 지난주에 살펴본 내용에 대해서 간단히 볼 수 있고 또 모임에 오신 분들에 대해서도 알 수 있어서 즐거운 시간이었습니다. 더불어서 블로그에 올라온 배종욱씨의 글을 보면서 용산 사태에 대해서 생각해보는 시간을 보내었습니다.

(「」표시로 문제를 제기한 분의 이름을 표시하였습니다.)

§1. 본론에 들어가서, 우선 「소크라테스에서 포스트모더니즘까지」(이하 ‘책’) 204쪽 아우구스티누스 부분부터 읽어나갔습니다.


아우구스티누스의 생애

1) 아우구스티누스의 생애와 惡의 문제에 대해서 간단히 살펴보았습니다. 그리고 아우구스티누스가 초기에 가졌던 유물론적인 견해가 현대철학자의 유물론과 어느 정도 유사하다는 점도 지적하였습니다.(para.1-3.)

(영민추가 : 아우구스티누스의 유물론이 현대철학자의 유물론과 비슷하다는 것은 아닙니다. 존재론적 일의성을 추구했던 아우구스티누스, 예컨대 신이라는 한 존재론적 근거에서 악과 선의 기원을 찾으려 했던 것이 들뢰즈가 존재론적 일의성을 그리고자 했던 것과 맞닿아 생각해볼수도 있지 않을까 하는 것이었습니다)

2)플로티누스의 견해를 간단히 살펴보았습니다. 만물이 ‘일자(一者)’에서 유출되고 이런 유출된 것들 사이에는 계층(hierarchy)이 있다는 내용을 보고, 마니교와 달리 일원론적인 입장이라는 점도 보았습니다. 그리고 기독교와 관련한 설명에서, 죄인은 유출의 최하 단계에 있는 것으로 볼 수 있고, 성화(聖化)는 일자의 유출을 거슬러 올라가 일자와 가까워지는 개념으로 볼 수 있다고 영민씨가 설명을 덧붙여 주었습니다.(para.4-5.)


§2. 플로티누스의 사상이 아우구스티누스에 영향을 끼친 바가 많기 때문에 「그리스도교 사상사」(이하 ‘사상사’)의 발췌 내용을 함께 읽었습니다. 사실 저는 플로티누스에 대해서 매우매우매우 단편적인 지식을 ‘주워 들은’ 정도라서 사상사를 읽는데 어려움이 있었습니다. 그래서 플로티누스에 대한 내용은 저도 불확실하니 간단히 분위기만 살피는 정도로 읽어주셨으면 합니다.(ㅎㄷㄷ)

***

알렉산드리아 학파 : 신플라톤주의


1) 고대철학에 대한 간단한 소개가 있었습니다. 영민씨가 고대철학이 신화와 많은 관련이 있다고 설명해주셨습니다.(para.1-2.)


「영돈」 고대에는 철학과 종교에 큰 차이가 없는 것 같다.


배교자 율리우스에 관해선, 기독교 공인 이후에 기독교에 반대한 황제로 알려져 있다는 이야기를 했습니다. 더불어서 에드워드 기번은 기독교가 로마 멸망의 원인이라고 했지만, 기독교 사학자들은 그렇지 않다고 주장한다는 점에 대해서도 이야기를 했습니다.


2)플로티누스는 신을 절대적으로 초월한 ‘일자(一者)’로 설명합니다. 그리고 이 일자에서 모든 만물이 유출(流出)됩니다. 이는 신이 만물을 창조하는 것과 비슷한데, (기독교에서 신이 했던) 창조와 같은 적극적인 것이 아니라 그저 ‘흘러나오는 것’이라고 합니다. 일자에서 최초로 유출되는 것은 누스(nous)라는 것입니다. 사상사에서는 일자가 첫째 원리이고 누스는 둘째 원리로서 일자가 누스를 통해서 자기직관을 하는 원리라고 설명합니다.(아~ 정말 어렵습니다. 이건 뭐, 선문답인지?)


영민씨가 다음과 같은 내용을 설명해주었습니다. : 초기 기독교에서는 누스(nous)를 로고스(logos : 그리스어로 말, 언어)로 보았다고 합니다. 요한복음 1장 1절에서는 ‘태초에 말씀이 계시니라 이 말씀이 하나님과 함께 계셨으니 이 말씀은 곧 하나님이시니라’라고 이야기하고 있지만 초기 기독교인들은 하나님과 로고스를 완전히 동일한 것으로 보지 않았다고 합니다. 로고스는 신의 창조원리, 신, 예수 등으로 이해된다고 합니다. 그리고 일자에서 나온 최초의 것(따라서 신과 가장 가까운 형태이겠지요?) 또한 일자가 자기 자신을 나타내는 원리라는 점에서 로고스와 예수는 거의 같은 것으로 이해된다고 합니다.


「영돈」 만물은 자신이 유출된 일자의 특성을 가지는가? : 일자에서 유출된 만물은 일자의 특성을 가지지만, 유출된 정도가 일자에서 멀어질수록 일자의 특성을 희박하게 가진다.

「종욱」 참된 온갖 것과 아름다운 온갖 것은 같은 의미인가? : 아마 고대에서는 그렇게 사용된 것 같고, 이미 중세에 진선미라는 개념을 사용하고 있었는데 역시 거의 같은 뜻으로 사용한 것 같다.(이 부분은 불확실해요~-_-;)

「정슬」 일자에서 만물이 유출되듯, 인간에서도 유출되는가?(이것도 불확실한데, 이때 잠시 다른 생각하고 있었습니다;.. 죄송합니다;ㅅ;)


대화를 하면서 근본, 보편을 왜 추구하게 되는지에 대해서 이야기가 나왔습니다. 근본, 보편에 대한 추구는 정치 이데올로기에서 보편성에 의한 통합을 필요로 하기 때문에 그러하다고 영민씨가 설명해주었습니다.
(영민추가 : "알고 보면 모든 것이 정치이다")


3) 혼, 양의성, 모호성에 대한 이야기가 나왔습니다. 그리고 질송은 아우구스티누스에게 플로티누스가 전적으로 영향을 끼친 것은 아니라고 한 견해에 대해서 설명을 들었습니다.(사상사의 내용이 많아서 간단히 보고 넘어 갔습니다.)


***


§3. 책으로 돌아와서 계속 보기 시작했습니다.


3) 아우구스티누스는 철학과 신앙(신학)은 구별할 수 없다고 합니다. 또한 그는 자신의 의지를 바꾸어야만 신의 은총을 통해서만 명석한 사유작용이 가능하다는 것을 알 수 있다고 믿었다고 합니다.(p.207., para.2.)
(영민추가 : 엄밀히 말해서 철학과 신학 구분의 필요성을 못느꼈던 것 같습니다. 이성과 신앙의 관계는 또 다르지만요)


4) 원죄론과 아우구스티누스와 펠라기우스의 논쟁을 살펴보았습니다.(p.207., para.3-p.208. para.1.)

「보미」 원죄론과 성악설이 다른 것인가?

「영돈」 양 이론의 근거는 다르지만 결론적으로 같다.(인간은 결국 죄를 짓는 경향을 갖고 있다는 점에서)

「은희」 아담과 하와가 죄를 짓기 전에는 원죄론과 성악설에는 차이가 있다. 당시에 아담과 하와는 죄를 지을 수도, 짓지 않을 수도 있는 의지만 있다.

「종열」 그러면 성선설과 원죄론이 같은 것인가, 아니면 성무선악설에 가까운 것인가?

「영민」 원죄론과 성선설, 성악설, 성무선악설은 맥락상 다르다. 전자는 인간이 왜 죄를 짓게 되는가를 설명하는 것이고, 후자는 죄를 짓게 되는 인간의 문제에 대한 해결 방법을 설명하는 것이다. ; 원죄론은 기독교에서 매력적인 이론이다.(이유를 설명하셨는데, 이때 잠시 집중력이 흐려져서-_-....)

영민씨가 폴뤼케르(영민수정: 폴 리쾨르)는 원죄론을 ‘상징’으로 이해한다는 점을 설명해주었습니다.


인간의 지식


회의주의의 극복


1) 아우구스티누스가 모순율을 통해서 회의주의자들의 견해(인간에 의해서 이해될 수 있는 진리란 없다)를 반박하는 것을 살펴보았습니다. 아우구스티누스는 자신이 회의(懷疑)한다는 사실에서 오는 확실성(더불어 회의를 하는 ‘나’는 존재한다는 확실성)으로 제시하여 회의주의자들의 견해를 비판합니다. 이는 데카르트의 cogito ergo sum과 비슷합니다. 하지만 데카르트가 이를 공리(公理)로 삼아 이론체계의 근거를 마련했으나, 아우구스티누스는 단지 회의주의자를 반박하는 정도로만 이런 확실성을 이용했습니다.


모순율은 곧 동일률(이때는 ‘동일률’이 맞나요, ‘동일율’이 맞나요?;;)입니다. 존재하면서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모순)은 곧 존재하는 것은 동시에 존재하도록(동일) 요구합니다.(이렇게 설명하는 것이 맞는지 잘 모르겠네요 뒤늦게 후기를 쓰는 거라 햇갈립니다.) 이 경우, ‘동일률’을 보장하는 것이 필요합니다.(‘어떤 두 대상이 왜 같은가?’라는 질문에 대한 답이기도 합니다.) 이를 플라톤은 이데아로 설명합니다. 가령, 철수와 순희(매우 고전적인 예군요-ㅂ-;;)가 같다면 어떤 점에서 같은가? 인간이라는 ‘이데아’로서 같다.(이데아에 관한 설명은 철본1기 때, 충분히 되었으리라 생각합니다.)


영민씨가 데카르트의 cogito ergo sum에서 인식론적 확신(‘나는 생각한다.’)이 존재론적 확신(‘나는 존재한다.’)로 ‘비약’한다는 점을 지적하였습니다. 이는 데카르트가 존재를 ‘속성’으로 파악했기 때문에 그렇다고 합니다. 이에 대해 니체는 ‘나는 존재한다’라는 것은 문법적인 것이니 현실에서 꼭 그런 것은 아니라고 합니다.(‘속성’으로서의 존재를 비판하는 것 같은데, 처음 들을 때는 이해되는 듯하다가 필기 해놓은 것을 다시 보니 아리송합니다;..)


「종열」 드라마-(죄송합니다. 제가 집에 TV가 없어서ㅠ;.. 내용의 갈피를 잡지 못했습니다.)(영민 추가 - '아내의 유혹')
「종열」 자신을 회의할 수 없다는 것은 무슨 의미인가?

「종열」 존재하는 것을 통해서 신을 발견하는 것인가? : 스피노자 철학과 같은 맥락

「동신」 ‘멍한 상태’ 자체가 생각하는 상태인가? : 근대적인 의미에서는 그렇지 않다. 근대에는 능동적인 주체를 설정하였고, 중세에는 수동적인 주체를 설정했다.


종열군의 질문에 대답을 하는 중에 선물에 관한 이야기가 나왔습니다. 일부 선물·증여에는 ‘은폐된’ 욕망이 내재되어 있는 경우가 있다고 합니다. 그러나 선물을 하지 말자는 것은 아니고, 교환적 기대가 섞인 선물만큼은 배제하고 선물로서의 선물을 하자는 것으로 이야기를 마쳤습니다.



 <영민-보론>
성실한 프로토콜에 감사드리며 몇가지 내용을 조금 덧붙입니다. 영돈씨에게 실례가 아니었으면 하네요.

a. 에드워드 기번의 <로마제국 쇠망사>는 지난해 연말인가요, 완역되었습니다. 한길사에서 나온 <로마인 이야기>보다는 민음사판의 <로마제국 쇠망사> 4권이 훨씬 더 영양가 있어 보이더군요. 로마에 대해서 늘 호기심은 있어도 제대로 이해할 길이 막연했는데 이 책을 쟁여 놓는 것도 좋을 듯 하네요.
http://www.aladdin.co.kr/shop/wproduct.aspx?isbn=8937426315


b. 배교자 율리아누스(Emperor Julian the Apostate 331-363)는 로마 제국의 국교를 기독교에서 다시 이방 종교로 바꾸려고 했기 때문에 배교자라는 별명을 얻게 되었답니다. 그의 삼촌은 유명한 콘스탄티누스로 로마의 첫 기독교인 황제였구요. 율리아누스는 기독교인을 갈릴리인들(Galileans)이라 부르며 격하시켰으며 나아가 그들의 영향력을 약화시켰습니다. 그는 적극적으로 박해하지는 않았지만 기독교인들이 학교에서 성경 가르치는 것을 금했다고도 합니다. 일부 기독교인 교사들은 율리아누스의 법을 피하는 방법을 찾기도 했는데 구약성경을 서사시 형태로 번역했으며 신약성경을 플라톤의 대화 형태로 번역했다지요.



c. 누스와 로고스에 대해서
틸리히 사상사에도 나오지만 누스와 로고스가 완전히 같은 것은 아닙니다. 플로티누스 체계 내에서 누스는 원리와 질서로, 로고스는 원리와 질서에 동적인 원리를 부여하는 것으로 나오지요. 세밀한 분석이지만 그리스도교 신학은 플로티누스의 누스-로고스 구분을 로고스로 넓게 이해한 것은 분명한 것 같습니다.

d. 존재론적 신증명
데카르트와 안셀무스의 신존재 증명을 존재론적 증명이라고 합니다. 칸트와 러셀에 의해서 체계적으로 논박되었고 그 같은 비판의 정당성이 인정되었지요. 존재론적 신증명은 다음과 같은 논리입니다. 첫째, 신은 완전하다. 둘째, 존재는 완전함의 한 속성이다. 셋째, 그러므로 신은 존재한다. 신이 완전하다는 규정에서 신이 존재한다는 결론이 도출되는 것인데요, 러셀에 따르면 존재는 '속성'이 될 수 없기 때문에 완전함의 속성도 될 수 없습니다. 존재는 존재양화사이므로 속성일 수 없다고 러셀은 비판하는 것이지요.

e. 선물에 관해서
영돈님의 정리에 약간 오해가 있을 듯 싶어서 덧붙입니다. '어떤' 선물에만 욕망이 은폐되어 들어 있는 것 뿐 아니라 '모든' 선물이 이미 '뇌물'입니다. 숨은 욕망이 있다는 것이지요. 인간에게 욕망이 존속하는 한 선물은 항상 필연적으로 '실패'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렇다고 선물하지말자는 것이 아니지요. 질서와 상호성의 원리에 토대한 교환으로서의 선물을 넘어 무질서와 일방성의 원리를 기초로하는 불가능한 선물 선사를 시도해보자는 것이지요. 어쩌면 그것이 우리의 구원일지도 모를 일이니까요.


1. 나름대로 정리한다고 했지만, 역시나 부족하군요. 집중력이 그다지 좋지 못해서 대화를 듣는 도중에 멍때리는 경우가 종종 있었습니다...; 사과드리고요 (_ _);...

2. 플로티누스의 유출설에 대해서 한번 생각해보았으면 좋겠습니다. 플로티누스에 따르면 惡은 소극적인 것입니다. 유출의 최하 단계에 있어서 단지 일자의 성질이 ‘희박한’ 상태가 惡이 되는 것이니까요. 그러나 성경을 살펴보면 악은 적극적인 실체로서 인간을 ‘죄’에 빠트립니다. 일반적인 사람의 종교관념으로도 악은 일정한 실체를 가진 善에 대항하는 존재로 이해됩니다. 그렇다면 플로티누스의 유출설을 기독교에 접목시키는 것은 한편으로는 타당할 수 있지만, 이 이론이 설명하는 가장 중요한 ‘선과 악’의 문제를 그렇게 명쾌하게 해결해주지 못하는 것 같습니다.(앞에서 이야기하였듯, 기독교의 기본적인 텍스트인 성경에서 선과 악을 대립적으로 이해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바울이 특히 이에 고민했던 것 같습니다..)


덧글

  • 정지윤 2009/01/28 04:34 # 삭제 답글

    수고많으셨어요~^^
    프로토콜 덕분에 정리가 한결 쉬워진듯해요~땡큐베리베리감솨~*^^*
  • 악성얄리 2009/01/28 08:51 # 삭제 답글

    깔끔한 정리.. 오~~~감탄입니다^^ㅋ 새해 복 많이 받고 오셨나요?ㅋㅋ
  • 스프링보미 2009/01/28 23:19 # 삭제 답글

    잘 봤습니다~! 진짜 한 눈에 확 들어오네요~! 그때 옆에서 열심히 적으시던데~ 이름이 왠지 kbs 이영돈 PD를 연상시키네용! 아, 그리구 회의주의의 극복에서 보민이라는 사람이 혹시 저 인가요?? 그럼 보민이가 아니구 보미가 맞는 것 같은데요? ㅎㅎ
  • 이영돈 2009/01/29 12:54 # 삭제 답글

    정지윤 // 감사합니다~ 영민씨가 보충해주어서 내용이 이해되기 쉽게 된 것 같습니다 ㅋㅋ

    악성얄리 // 새해 복 많이 받았습니다 ㅋㅋ.. 올핸 친척들이 많이 오시진 않았지만 이래저래 이야기도 많이 나누고 해서 좋았습니다.

    스프링보미 // 제가 잘못 적었었나요 -ㅂ-);;;...; ㅋㅋ 밤 늦게 적은거라 암튼 이해를;

    영민 // 보론 감사합니다. 글을 다 쓰고도 허전하고 마음이 불편해서.. 누군가 보충해주었으면 했는데, 감사합니다. 로마제국 쇠망사는 저도 모임 당일 찾아보았는데, 예전에 번역되어 나오던 것에 비하면 디자인도 훨씬 보기 좋고, 번역도 괜찮다는 평이 있더군요..(다만 번역가들이 역사를 전공한 분들이 아니라서 개인적으로 의심이 가긴 하지만;;..)
  • 지성의 전당 2019/02/11 22:14 # 답글

    안녕하세요.
    저는 지성의 전당 블로그와 카페를 운영하고 있는데,
    데카르트 글이 있어서 댓글을 남겨 보았습니다.
    제가 또 댓글을 달았다면 죄송합니다.
    인문학 도서인데,
    저자 진경님의 '불멸의 자각' 책을 추천해드리려고 합니다.
    '나는 누구인가?'와 죽음에 대한 책 중에서 가장 잘 나와 있습니다.
    책 내용 중 일부를 아래 글로 소개해드리겠습니다.
    제 블로그에 더 많은 내용이 있으니 참고 부탁드립니다.

    정보를 드리는 것뿐이니
    이 글이 불편하시다면 지우거나 무시하셔도 됩니다.
    ---

    인식할 수가 있는 ‘태어난 존재’에 대한 구성요소에는, 물질 육체와 그 육체를 생동감 있게 유지시키는 생명력과 이를 도구화해서 감각하고 지각하는, 의식과 정신으로 나눠 볼 수가 있을 겁니다.

    ‘태어난 존재’ 즉 물질 육체는 어느 시점에 이르러 역할을 다한 도구처럼 분해되고 소멸되어 사라지게 됩니다. 그리고 그 육체를 유지시키던 생명력은 마치 외부 대기에 섞이듯이 근본 생명에 합일 과정으로 돌아가게 됩니다. 그리고 육체와의 동일시와 비동일시 사이의 연결고리인 ‘의식’ 또한 소멸되어 버리는 것입니다. 이 부분에 대해서는 추후에 보충설명을 드리겠습니다.

    이러한 총체적 단절작용을 ‘죽음’으로 정의를 내리고 있는 것입니다.

    따라서 감각하고 지각하는 존재의 일부로서, 물질적인 부분은 결단코 동일한 육체로 환생할 수가 없으며, 논란의 여지가 있지만 ‘의식’ 또한 동일한 의식으로 환생할 수가 없습니다. 그러나 정신은 모든 물질을 이루는 근간이자 전제조건으로서, 물질로서의 근본적 정체성, 즉 나타나고 사라짐의 작용에 의한 영향을 받을 수가 없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나타날 수도 없고, 사라질 수도 없으며, 태어날 수도 없고, 죽을 수도 없는 불멸성으로서, 모든 환생의 영역 너머에 있으므로 어떠한 환생의 영향도 받을 수가 없는 것입니다. 이것은 정신에 대한 부정할 수가 없는 사실이자 실체로서, ‘있는 그대로’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본체에 의한 작용과정으로써 모든 창조와 소멸이 일어나는데, 누가 태어나고 누가 죽는다는 것입니까? 누가 동일한 의식으로 환생을 하고 누가 동일한 의식으로 윤회를 합니까?

    정신은 물질을 이루는 근간으로서의 의식조차 너머의 ‘본체’라 말할 수가 있습니다.
    그러나 윤회의 영역 내에 있는 원인과 결과, 카르마, 운명이라는 개념 즉 모든 작용을 ‘본체’로부터 발현되고 비추어진 것으로 받아들이지 않고, 자기 자신을 태어난 ‘한 사람’, 즉 육신과의 동일성으로 비추어진 ‘지금의 나’로 여기며 ‘자유의지’를 가진 존재로 착각을 한다는 것입니다. 이에 따라 ‘한 사람’은 스스로 자율의지를 갖고서, 스스로 결정하고 스스로 행동한다고 믿고 있지만 태어나고 늙어지고 병들어지고 고통 받고 죽어지는, 모든 일련의 과정을 들여다보면 어느 것 하나 스스로 ‘책임’을 다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따라서 책임을 외면하기 위해 카르마라는 거짓된 원인과 결과를 받아들이며, 더 나아가 거짓된 환생을 받아들이며, 이 과정에서 도출되는 거짓된 속박, 즉 번뇌와 구속으로부터 벗어나고자 환영 속의 해탈을 꿈꾸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니 저는 ‘나는 누구이며 무엇이다’라는 거짓된 자기견해 속의 환생과 윤회는, 꿈일 수밖에 없다는 것을 자각하고 있습니다. 더불어서 ‘누구이며 무엇이다’라는 정의를 내리려면 반드시 비교 대상이 남아 있어야 하며, 대상이 남아 있는 상태에서는 그 어떠한 자율성을 가졌다 할지라도, ‘그’는 꿈속의 꿈일 뿐이라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아무리 뚜렷하고 명백하다 할지라도 ‘나뉨과 분리’는 실체가 아니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저는 ‘나’에 대한 그릇되고 거짓된 견해만을 바로잡았을 뿐입니다.

    https://blog.naver.com/ecenter20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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