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월 14일 프로토콜 by 철학본색

20090214 프로토콜
<시공간의 문제/창조와 진화의 문제/자연에 관하여/서양의 선관념에 관하여>


*개요

이 날은 영민/은희/종렬/정슬/덕수/보미/종욱 이렇게 참석했습니다. 다른 분들께서는 각자의 사정으로 미리 연락을 주시고 불참하셨고, 종욱은 개인적인 사정으로 모임참석 후 조금 일찍 자리에서 떴습니다. 장소는 서현교회GNI 였는데 이번 주는 장소문제로 조금 마찰이 있었습니다. 저희가 쓰던 공간을 앞서 사용했던 어떤 모임에서 웃돈을 주고 대여하려고 한 탓인데요 그 때문에 관리하시는 분과 묘한 감정대립이 있었답니다. 일단 이번 주까지는 이 공간을 그냥 사용하게 되었고 그 이후에는 경북대학교 중앙도서관이나 혹은 다른 장소를 다시 물색해 보기로 결정했습니다.

2월 14일은 주로 아우구스티누스의 우주론과 도덕철학에 관한 논의를 했습니다. 이 주제와 관련해서
첫째, 시간과 공간의 문제
둘째, 창조-진화의 논쟁과 관련된 문제 (-이상 우주론과 관련하여)
셋째, '자연스럽다'라는 말과 관련된 삶의 문제
넷째, 사랑은 인간의 습관인가, 아니면 인간의 본질인가 하는 문제
기타 서양에서의 '선하다'라는 말의 의미에 관한 문제
등을(-이상 도덕철학과 관련하여) 집중적으로 토론했습니다.
(이상 아래글 참조)

스터디 후에 MT 및 몇가지 변동사항이 있었습니다.
첫째, MT에 관련하여서는 50%이상 참석이 가능하면 가자는 결정이 이뤄졌습니다.
둘째, 디렉터를 맡아준 덕수가 학업과 관련한 사정으로 새로운 디렉터를 모시고자 의견을 모았습니다.


*스터디의 핵심토론 주제


A. 시간은 무한하고 시간은 유한한가?

(교재 219페이지를 참고하세요) 아우구스티누스는 왜 신이 6일간 창조활동을 했는지에 대해서 의문을 가집니다. 만일 신이 전능하다면 세상을 단번에 창조할 수도 있었을텐데 어찌하여 단계를 거치며 6일동안 세상을 창조했는지 묻습니다. 이에 대한 아우구스티누스의 대답은 '배아의 원리'로 요약됩니다. 배아의 원리란 신이 '잠재성'(-곧 배아)을 가진 피조물들을 창조해냈지만 피조물들의 잠재성이 현실화되는(- 곧 싹이 틈) 시간이 필요했기에 6일이라는 시간이 절대절명 요구되었다는 것입니다.

아우구스티누스는 '존재의 지속'이 언제든지 시간에 종속되어 있음을 강조합니다. 어려운 말로 아이붐(aevum)의 시간이지요. 아우구스티누스의 우주론은 그런 의미에서 그의 '시간론'과 밀접한 관련이 있습니다. 아우구스티누스의 시간론은 시간은 영원하지 않으며, 공간 역시 영원하지 않다는 것입니다. 그에게 있어 시간이 궁극적인 어떤 의미를 가지는 것이라면 시간의 유한성이야말로 필연적인 전제가 됩니다. 왜냐하면 만일 시간이 무한하다면 시간 자체는 어떠한 끝, 혹은 목적도 갖지 않는 것이 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이같은 아우구스티누스의 시간론은 그리스인들의 시간론과 차이가 납니다. 그리스인들은 시간은 무한하고 공간은 유한한 것으로 보았기 떄문입니다. 그리스인들에게 시간은 소멸과 재생의 형식이었기에 자연이 지니는 시간은 어떤 의미도 없었습니다. 그러나 (chornos에 상응하는) kairos의 시간을 주장한 아우구스티누스에게 영원한 것은 오직 신밖에 없게 되지요.


그리스인들의 시간이해와 관련해 거친 반론이 있었습니다. 예컨대 종렬군은 '도대체 어떻게 시간과 공간을 분리해서 생각할 수 있는가'하는 질문을 던지며 반론을 제기했습니다. 공간 지각에 앞서 시간 지각이 필연적으로 요청되는만큼 공간과 시간을 밀접한 연관이 있고 그렇기에 공간은 유한하고 시간은 무한하다는 생각은 논리적이지 못하다는 주장이었습니다. 이에 대해 보미양은 시간이 무한한 것 같다는 의견을 피력했는데, 시간은 마치 X축에 무한 수렴하는 곡선처럼 계속적인 순간의 흐름으로 이해되어야 하는 것이 아닌가 하는 주장을 펼치며 아우구스티누스와 그리스인들의 시간론 모두를 반박했습니다.

이에 영민햄은어째서 공간-시간이 반드시 연결되어 이해되어야 하는지에 대해서 논박했습니다. 후설의 경우는 종렬의 생각에서 더 나아가 내적 시간의식이 대상을 구성하는 근본형식임을 주장합니다. 공간도 대상이라고 한다면 내적 시간의식, 그러니까 기억과 연동하여 공간을 인식할 수밖에 없다는 것이지요. 그러나 이 같은 주장이 반드시 타당하지는 않다는 것이 영민햄의 의견이었습니다. 만일 내적시간의식의 일종인 '기억'하지 못하는 사람A가 존재한다면 과연 A는 공간을 전혀 지각하지 못한 채 모든 것을 2차원적으로 지각할 것인가 하는 인지심리학적인 사고실험을 통해 그 결과에 따라 얼마든지 시공간은 다른 차원에서 논의될 수 있음을 지적했습니다.

그러나 이 문제와 관련해서 더 나은 결론에 다다르지는 못했으며 다만 아우구스티누스의 시간론이 중세세계 전체의 시간인식을 반영하는 만큼 그들이 모든 일에 궁극적인 의미가 있다고 믿었다는 점이나, 시간과 세계와 관련해서 자신의 실존을 분명히 자각하고 있음은 놀라운 것임을 생각해보았습니다. 중세세계에서는 사람이라면 어느 누구도 자신이 영원할 수 없으며 절대적으로 유한하다고 믿었다는 것은 삶의 의미란 전혀 없다고 말하는 손쉬운 허무주의자들과 혹은 자신의 삶이 마치 영원할 것처럼 영생을 약속하고 구원을 말하는 철저한 신앙인들이 사실상 동전의 양면처럼 같은 문제를 안고 있음을 시사합니다. 우리는 어느 누구도 영원할 수 없으며 하이데거의 말처럼 모두가 '죽음을 향해' 있고 죽음이라는 모든 것이 불가능해지는 상황으로 나아갈 수밖에 없는 가능성을 지닌 '불가능성의 가능성'을 띈 존재임을 중세사람들은 이미 선취하고 있었습니다.


B. 창조-진화와 관련된 논쟁

아우구스티누스의 시간론은 자신의 의도와는 상관없이 '진화론'에 문을 열어주는 토대가 되었습니다. 앞선 철학본색의 논쟁에서도 소개했던 것처럼 만일 신이 배아로서의 세계, 잠재성의 세계를 창조해낸 것이라면 세계가 그같은 잠재성을 현실화 시키는 운동을 진화로 설명하는 것이 가능하게 됩니다. 예를 들면 단세포의 미트콘드리아는 결국 인간과 같은 높은 지적 생물체로 현실화되는 가능성의 배아로 이해될 수 있는 것처럼 말입니다. 영민햄은 이와 관련하여 바티칸에서 약한 진화론을 수용하고 있는 상황에 대해서 설명했습니다. 현재 바티칸의 입장은, 요한 바오로 2세의 권고에 따라 종간 진화는 인정하지 않으나 종내 진화는 인정하고 있습니다. 이는 아우구스티누스를 신이 세계를 단번에 각 피조물의 본질(형상,  eidos)을 창조한 후 각 종과 피조물이 그 본질에 더 가까이 가고자 한다는 것과 같은 논리입니다.


이 같은 주장과 관련하여 정슬님은 '본질은 같고 시간이 지나면서 발현된다는 것이라면 오스트랄로피테쿠스와 현인류가 본질상 같으며 신이 창조한 것은 그 같은 원시인류라고 보아야 하는가'하는 질문을 던지셨습니다. 이에 종렬군은 '시간의 흐름에 따라 미완성의 존재가 완성된 존재로 가는 것이라면 신은 단번에 완성된 피조물을 만들어내지 못한 만큼, 단번에 창조를 완성했다는 것은 논리상 말이 되지 않는다'고 주장했습니다. 이에 영민햄 역시 그런 문제가 있을 수 있지만 아우구스티누스의 창조론이 '무에서 유로' 라는 테제에 입각하는만큼 신이 불완전한 상태의 피조물을 창조해내었다고 하여 창조가 아닌 것은 아니지 않는가 반문했고, 그리고 그같은 종내 변화가 질적변화라 부를 수 있을만큼 말할 수 있는 것은 아니지 않냐고 물었습니다. 그리고 현생인류에 비해 오늘날의 우리 자신이 질적 차이가 있을만큼 뛰어나다고 말할 수 있는 충분한 근거는 없다는 주장을 아마도 아우구스티누스는 펼칠 것이라고 하기도 했습니다.

아우구스티누스의 우주론, 창조론과 관련된 이 같은 논쟁 역시 중세세계의 세계관을 여전히 보여줍니다. 앞서도 언급한바 있듯이 이들이 '의미의 세계'에 살고 있었던 것은 아닐까요? 오늘날 인간의 존재 뿐만 아니라 인격, 마음 조차도 쉽사리 과학적 태도로 환원되어 설명되고 있으며 이 같은 환원주의적 방식이 인간삶에 관해 의미를 더하기 보다 더 큰 무의미만을 주고 있다는 점에 비추어 볼때 말입니다. 물론 의미가 반드시 모든 의미에서 '무의미'보다 나은 것이라 할 수 없습니다. 사르트르의 말처럼 말이지요. 그러나 의미의 거부는 인격에 대한 거부, 결국은 인간과 생명에 대한 거부로 쉽사리 연결된다는 점에서 손쉬운 무의미로의 결단은 퇴행적 인간만을 탄생시키지 않는지 저는 묻고 싶습니다. 최근 분석철학계나 대륙철학계나 '무의미', '탈이성', '탈주체'라는 말이 유행처럼 번지고 이에 대한 극복의 노력도 상당합니다만, 의미에 대한 진지한 천착없이 밖으로부터 주어진 무의미를 무반성적으로 받아들이는 것은 옳지 않습니다. 그 반대로 무의미에 대한 진지한 천착없이 밖으로부터 주어진 일체의 의미를 무반성적으로, 있는 그대로 수용하는 것 역시 나쁘지만 말입니다.


C. '자연스럽다'라는 말과 관련된 삶의 문제

'자연스럽다'라는 말이 문제가 된 것은 아우구스티누스의 행복론이 "인간이 자연적인 조건을 넘어서서 초자연적인 것을 추구하는 것에 있다"라는 교재 220페이지의 문구와 관련해서입니다.종렬군은 '도대체 왜 자연스러운 삶을 넘어서야 행복하다고 말할 수 있는것인가? 자연스럽게 사는 것이야말로 행복한 삶이 아닌가?'라는 문제를 제기했습니다. 더 나아가'삶이 자연스럽다. 삶의 존재는 자연스럽다'라는 일반명제까지 정립하며 아우구스티누스의 행복론을 정면으로 반박했습니다.

여기서 일차적인 문제는 여기서 말하는 '자연스럽다'라는 말의 의미에 있습니다. 이 말은 '자연적이다' 혹은 '당연하다'와 같은 말로 번역될 수 있을 듯합니다. 전자의 경우는 과학적-자연주의적 태도를 말하는 것이라면 후자의 경우는 가치평가를 포함한 인격주의적 태도를 포함하고 있는 것처럼 여겨집니다. 아우구스티누스의 '자연 극복'은 이 두 사태 모두를 겨냥한 것으로 생각됩니다. 진정한 행복에 이르기 위해서는 구체적인 '자연'을 넘어서야 합니다. 구체적인 자연은 모두 본성상 선하지만 '타락'되어 있습니다. 우리는 구체적 자연에 현혹되지 말아야 하며 이 자연의 '배후'인 초자연적인 신을 향해야 합니다. 한편 진정한 행복에 이르기 위해서는 당연하다고 여겨지는 (후설말로 하자면) '자연적 태도의 일반정립'을 넘어서야 합니다. 모두가 당연하다고 말하는 것을 그대로 받아들여서는 곤란합니다. 신에게 다가가는 것이 행복이라면 신에게 상식이라 이름하는 집단적 편견과는 거리가 요구됩니다.

이 같은 '자연을 넘어서는 초자연'과 관련해 영민햄은 종렬군의 의견을 논박했습니다. "만일 종렬군의 의견대로 삶이 자연스러운 것이라면 자연스럽다는 이름 하에 삶에 모든 것이 허용된다는 것인가, 심지어 고통까지?" . 이에 종렬군은 '고통도 자연스러운 것이다'라는 주장을 했습니다. 정슬씨는 "삶의 자연스러움이란 어디까지나 상대적인 것이며 Easy-going할 때와 그렇지 못할 때에 생기는 단순한 차이이다"고 하며 종렬군의 의견에 살짝 반대를 표명하셨습니다. 또한 보미양 역시 "TV를 볼때면 우리에게 자연스러운 것이 어려운 이들에게는 한없이 부자연스럽다"는 점을 강조하며 모든 것이 자연스럽다는 종렬군의 의견에 반대를 표명했습니다. 이에 영민햄은"종렬군의 자연관이 현대인의 자연관에 갇혀 있다. 현대인의 자연은 진정한 의미에서 자연이 아니다. 현대인에게 자연은 풍경으로만 발견된다. 멋진 자동차와 호텔에서 내다보이는 자연은 풍경일 뿐 자연은 아니다. 그런 의미에서 자연스럽다라는 말을 긍정적으로 여기는 종렬군의 입장은 고대인들이 바라본 거칠고 통제불가능했던 자연관과는 거리가 있다"고 주장하며 '난징대학살의 상황, 부도난 이들의 고통이 과연 자연스럽다고 할 수 있는가? 삶이 자연스럽지 않은 많은 사람들이 있다" 논박했습니다. 이에 종렬군은 다시 '고통도 자연스러움의 일부가 아닌가'하고 질문을 제기했습니다만 영민햄은 '삶의 자연스러움이 강조되면 자살이 문제가 된다고 하면서 자살은 삶이 자연스럽지 않은 사람들이 선택하는 죽음과의 좋은 관계일 수도 있음'을 주장했습니다.



영민햄이 주장한 광포한 자연, 무서운 자연이라는 내용에 대해 종렬군은 다시 동양의 자연관은 그와 다르지 않는가 하고 반문했습니다. 이에 영민햄은 장자와 노자는 당시 뿐 아니라 수천년간 동아시아 사상계의 변방에 머물러 있었으며 이들은 공자의 유학이 이후에 성리학과 같은 국가이데올로기로 자리잡은 것과 차이가 있다고 했습니다. 이 점이 중요한 것은 공자가 그린 이상세계라는 것이 그저 자연스러운 삶에 대한 추구라기 보다 문화와 도덕, 인간 사이에서의 예치를 중요시여긴 만큼 자연을 적극적으로 통제하는 것과 관련이 있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이는 고대의 국가가 치수나 관개사업에 집중하여 자연을 제대로 통제할 때 그 권위를 인정받았음을 생각하면 동아시아에서 서양과는 다른 자연에 대한 무한한 찬미가 있었다는 것은 옳지 않다는 것이지요.



이 문제와 관련해 '순수'에 대해 다시 생각하게 됩니다. 삶은 자연스러운 것도, 부자연스러운 것도 아니며 정슬님의 말처럼 상황적이며 사실상 설명불가능할 정도로 '혼재'되어 있기 마련입니다. 중세인들의 우주관이 무에서 유로의 창조라는 신앙에서 비롯된 것임을 이미 말씀드렸습니다만, 그것은 폴 틸리히의 말처럼 실존의 토대가 허무에 있다는 것을 밝히는 신앙이기도 합니다. 존재나 삶이 결코 영원하거나 그 자체로 '선하다'고는 할 수는 없는 것이며 우리 삶에 많은 허무가 깃들어 있다는 것이기도 하지요.

D. 사랑은 인간의 습관인가, 아니면 인간의 본질인가 하는 문제

아우구스티누스의 모든 사유는 최종적으로 그의 도덕철학과 관련합니다. 그의 도덕철학은 결국 신을 사랑하는데 있는 거지요. 이와 관련하여 사랑이 인간의 습관인가 아니면 인간의 본질에 속하는 것인가 하는 문제가 제기되었습니다. 만일 사랑이 습관에 속한 것이라면 사랑이라는 행위는 보편성을 잃게 됩니다. 결국 보편성을 잃은 사랑이라는 행위가 보편적인 신에게 가는 방법이라는 아우구스티누스의 주장은 잘못된 것이 되지요. 하지만 사랑이 만일 인간의 본질에 기입된 것이라면 최소한 인간이라는 규정 하에서 신을 사랑하는 것은 보편적이게 됩니다.

종렬군은 사랑이 결코 인간의 본질에 속한 것은 아니라고 강하게 주장했습니다. 그의 논거는 사랑을 전혀 받지 못한 사람이 있다면 그는 결코 사랑할 수 없을 것이라는 것에 있습니다. 한번도 사랑을 받지 못한 자가 사랑을 알리가 없기에 사랑을 하지 못하는 것은 당연하다는 것이지요. 이에 덕수군은 '무인도에 떨어진 사랑이 전혀 없는 사람이 있다고 치자. 그런데 이 사람이 임신을 하여 자식을 출산했다고 한다면 그 자식을 사랑할 수 없다는 말인가? 종렬군의 주장은 옳지 않다'는 놀라운 반박을 했습니다.
이에 종렬군은 그같은 것은 사랑이 아니라 '본능'에 해당되며, 자식은 어머니의 본능적 행동을 '사랑'으로 수용할 뿐이라고 했습니다. 그러나 영민햄은 부모의 사랑을 '본능'으로 환원할 수 있는 증거가 있는지, 행여나 그렇다고 하더라도 인간에게 최소한의 자기애는 있는 것은 아니냐고 되물었고, 덕수군은 '도대체 어떤 의미에서 동물적 본능과 사랑이라는 행위 자체가 차이가 있는지'에 대해서 물었습니다. 이에 종렬군은 낳은 자식을 돌보는 것은 뜨거운 물건을 잡았을 때 놓치는 것 같은 무조건 반사와 같다고 하며 사랑은 자연스러운 것이라기 보다 관계적 맥락 속에서 노력을 통해서만 가능하게 되는 것이라고 주장했습니다. 이에 영민햄은 '사랑은 인간의 본질에 기입된 것이라고 생각한다'며, '무조건적 본능이라도 자기애이자 사랑일 수 있으며 전혀 사랑받지 않았다 하더라도 사랑의 가능성이 논리적 필연성을 가지고 사라지지는 않는다'고 주장했습니다. 그러고나서 "사랑 받지 않은 자는 사랑할 수 없다는 주장은 사랑받지 않은 자는 사랑할 자격도 없다, 혹은 사랑을 적게 받은 자는 사랑을 적게 할 수밖에 없다와 같은 주장으로 연결되어 사랑받지 못한 어떤 수동적 상황이 사랑하고자 하는 적극적 의도조차도 무자격하고 불가능하게 만드는 무서운 함축이 있다"라고 지적했습니다. 만일 종렬군의 주장이 옳다면 어린 시절 부모의 사랑을 받지 못한 채 자라난 이들과의 결혼을 반대하는 상대측 입장의 논리가 정당화되는 윤리적 문제가 발생한다는 것이지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종렬군의 논의는 의미가 있었습니다. 인간이 언제든지 관계 위에 놓여있다는 것이지요. 그리고 '사랑받지 못한 사람은 사랑할 수 없다'라는 주장은 영민햄의 주장과는 반대로 더욱 적극적으로 서로를 사랑하게금 하기도 하고 말이지요. 종렬군의 주장이 타당성은 성서도 뒷받침합니다. 성서에서 '사랑에 관한 책'으로 알려진 요한일서에서는 하나님의 사랑을 알지 못하는 자는 결코 그 누구도 사랑할 수 없다'고 하지요. 그런 면에서 인간은 철저히 수동적인 존재입니다. 인간의 본질에 사랑이 있는지, 사랑은 배움에 의해서 가능하게 되는 것인지는 분명하게 말할 수 없지만 '인간이 사랑해야 한다'는 말은 참된 것 같습니다.

E. 기타 행복론과 관련해.

아우구스티누스의 도덕철학과 관련해 서구의 '선'이라는 것이 영어로 Good으로 번역된다는 것이 지적되었습니다. 좋다는 것이면서도 선하다는 것이지요. 심지어 상품이기도 하구요. 서양 윤리학은 늘 '좋은 삶'이 무엇인지에 대해 천착합니다. 논리상 결국 '좋은 것이 선한 것이다' 혹은 '선한 것이 좋은 것이다'라는 결론에 이르게 되지요. 아마 아우구스티누스는 신에게 다가서는 것이 좋은 삶, Well being임과 동시에 선함 그 자체라고 여겼을 것입니다. 이는 아리스토텔레스가 좋은 삶이야말로 선한 것이다라는 주장과 거리가 있지요. 아리스토텔레스가 아름다운 여자, 중산층 계급이 그 자체로 선하고 중용의 덕을 지니고 있다는 말에서 차이가 드러납니다. 기타 교재와 관련해 몇몇 주제들이 더 토론되었고 다음 시간을 기약하며 마쳤습니다.


*마지막 한마디

프로토콜을 읽지 않고 시작하여 더 많은 논의를 할 수 있었기에 그에 대해서 한마디씩 했습니다. 대부분 프로토콜에 읽기에 너무 많은 시간을 할애하지는 말자는 의견이었습니다. 결론은 프로토콜을 좀 더 완결한 형태의 글로 작성해 설명 부연 없이 읽어나가는 방식을 취하되 질문을 잘 정리하도록 하자는 것이었습니다. 그리고 중세철학 후 시즌 3는 어떻게 되냐는 질문이 있었는데 근대철학을 할 예정이라고 말씀드렸습니다.


*변경사항

그동안 많은 수고를 아끼지 않고 디렉터를 맡아준 황덕수 군이 학업 사정으로 부득이하게 디렉터 자리를 내려 놓게 되었습니다. 다들 감사의 문자라도 드리면 좋겠습니다. 새로운 디렉터에 대해서는 고민 중에 있습니다만 이번 주 토요일 모임에서 결정될 수 있을 듯 합니다. 다시한번 덕수군에게 감사한 마음을 표합니다.

MT와 관련해서는, 이번 주에 예약문제와 참여률저조로 인해 미루게 되었고 오늘 저녁모임을 갖게 되었습니다. 오늘 저녁에 몇 분이 MT에 관한 기획을 발표할 예정이며 엄정한 공청회를 통해 입찰(?)을 결정하게 되겠습니다. 식사는 간단하게 준비할 예정입니다. 저희 집에서 하는 만큼 집을 찾기가 어려우신 분은 미리 전화를 주시고, 많이 늦지 않도록 해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프로토콜 끝!

질문은 댓글로~ㅋ

덧글

  • 이영돈 2009/02/27 23:58 # 삭제 답글

    참석하지는 않았지만, 간단한 생각을 남겨봅니다.

    아우구스티누스의 행복론이 "인간이 자연적인 조건을 넘어서서 초자연적인 것을 추구하는 것에 있다"
    -> 자연적인 조건과 초자연적인 것의 대비는 세속세계와 신의 세계의 차이로 볼 수 있지 않을까요.(더불어, 자연과 초자연의 관계가 지상세계와 이데아의 세계의 관계와 유사하다는 생각이 듭니다.)
  • 정지윤 2009/02/28 01:40 # 삭제 답글


    아하~쌤도 내가 올리고 있을당시 같은 작업을 하고있었군요^^
    쌤~넘 고마워용^^ 저는 참석을 안해서 다시 읽어보고 자습해야겠어요~ㅋㅋ
    이히히힛~쌤 수고 덕분에 저 이것보고 공부할께요!!
  • 철학본색 2009/03/01 00:11 # 답글

    <영민햄>
    영돈님: 말씀하신대로지요. 아우구스티누스에게 자연의 세계라는 세속도시가 아니었겠습니까? 우리 논쟁은 그와 조금 상관 없는 방향으로 가긴했지만요.
    지윤누나: 누나 올린 것을 보고 저도 급히 올렸어요. 저도 누나 프로토콜보고 잘 공부했습니다.
  • 스프링보미 2009/03/07 23:37 # 삭제 답글

    이 날 시공간에 관한 토론이 가장 기억에 남네요~ 다른 이야기들도 무척 흥미로웠구요!
  • 이동신 2009/03/08 00:02 # 삭제 답글

    생뚱 질문 하나 !
    프로토콜이란게 정확히 무슨 뜻이어요??
  • 철학본색 2009/03/12 16:05 # 답글

    종열 )) 밑에 저 배너는 뭐에여 ? ㅋ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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