학문의 위기라는 것은 다름아니라 바로 진정한 학문적 성격(echte Wissenschaftlichkeit) 즉 학문이 자신의 과제를 세우고 이 과제를 완수하기 위한 학문의 방법론을 형성하는 방식 전체가 문제시되었다는 것을 뜻한다. (유럽학문의 위기와 선험적 현상학, 이종훈 역, 61쪽)
이러한 사실학은 우리 삶의 급박함(Lebensnot)에 있어 우리에게 아무것도 말해주지 않는다. 그 사실학은 불행한 우리 시대의 지극히 운명저긴 대격변에 떠맡겨진 인간에게는 화급한 문제를 원리상 곧바로 배제하고 있다. 즉 그 문제는 이러한 인간의 현존 전체가 의미가 있는가 혹은 의미없는가 하는 점이다. 이 문제야말로 모든 인간에 대해 지니는 보편성과 필연성에서 이성적 통찰에 기초한 보편적 성찰과 그에 대한 답변을 요구하는 것은 아닌가? 결국 그 문제는 인간의 환경세계(Umwelt)나 인간 이외의 환경세계에 대해 자유로이 태도를 취하는 자로서의 인간, 즉 자기자신과 자신의 환경세계를 이성적으로 형성하는 가능성을 지닌 자유로운 인간에 관계한다. 이성이나 비이성에 대해 그리고 자유의 주체인 우리 인간에 대해 학문은 도대체 무엇을 말해야 하는가? 단순한 물질과학은 이 점에 대해 아무것도 말하지 않는다는 점은 분명하며, 더구나 주관적인 것(Subjektives) 모두를 제거한다.(위의 책, 65쪽)
나비 부인을 어제 공연했을 때 1300여명이 왔는데, 그 때 단 한순간도 떨지 않고 무사히 연주를 마쳤습니다. 그런데 오늘 여기 한 50여명이 계신 것 같은데 이렇게 떨리는 것은 왠일일까요? 그것은 아마 모든 것이 그러하듯이 새로운 출발이기 때문이고, 또 이 새로운 출발이 어떠한 인간 사회에 영향을 끼칠까 하는 조바심과 일종의 '위기감' 마저도 이 자리에 존재하고 있기 때문이지 않은가 짐작해봅니다. 이탈리아가곡 흔히 부르고 있습니다. 특히 음악대학을 가면요, 1,2 학년 때 이탈리아가곡 참 많이 부릅니다. 그리고 그러다가 오페라 아리아를 부르지요. 지금 대구오페라축제기간을 지나고 있는데 거기서 많은 오페라를 접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왠지 저도 음악을 하는 사람이지만 이탈리아 노래라고 하는 것이 우리와는 굉장히 괴리가 있고 정말 지구를 반바퀴나 돌아서야 갈 수 있다는 거리감, 또 사백년 이상이나 거슬러가야 한다는 시간의 거리마저도 느껴집니다. 그래서 여기 7분의 가수님들, 2분의 반주자분, 또 저를 포함해 열명의 사람들이 모여서 어떻게 하면 이러한 거리감을 줄여볼까 하는 마음에 이탈리아 가곡을 공부하는 모임을 결성하게 되었습니다. (2009년 10월 27일 이탈리아성악연구회, 이하 이성연, 대구중앙교회 중앙아트홀 연주에서 지휘자 박지운의 멘트)
<유럽학문의 위기와 선험적 현상학>(이하 위기)은 후설이 생전 마지막으로 출판한 주저 중 한권이다. <위기>에는 <순수현상학과 현상학적 철학의 이념들>(이하 이념들)로 대표되는 전기 사유를 넘어서는 중요한 사유, 개념들이 등장하는데, 대표적인 것들이 바로 발생적 현상학, 생활세계와 같은 것들이라 할 수 있다. 후설의 수미일관한 문제의식은 후설 당대의 인간성의 위기, 예를 들면 나치의 등장과 두차례의 대전과 같은 것들의 원인이 다름 아닌 학문의 '위기'에 있다는 것이었다. 즉, 이와 같은 위기를 초래한 바로 그 학문이란 '실증주의'에 토대를 둔 심리학주의와 역사주의였다. 실증주의가 문제가 되는 것은 다름 아니라 그것이 위의 인용에서 말하고 있듯이 실증주의 자신이 가진 '토대', '방법론상의 기초', 즉 '주관적인 것'(혹은 상대적인 것)을 망각하고 있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따라서 후설은 <위기>에서 전통 형이상학에 대한 하나의 의미있는 전복을 시도하는데 곧 에피스테메(episteme)에 대한 독사(doxa)의 전도이다. 플라톤이 매긴 진리등급상 독사(doxa)는 하나의 의견에 지나지 않으며, 참된 인식으로부터 떨어져있는 것이다. 왜냐하면 그것은 주관적이며, 상대적이기 때문이다. 후설은 플라톤의 이같은 진리등급을 폐기하지 않고자 했음을 먼저 주지하는 것이 중요하다. 후설은 정적 현상학의 체계에서 타당성 정초관계를 규정하는 논리적 차원의 에피스테메를 독사에 우선시한다. 그러나 후설이 <위기>에서 보여주는 문제의식은 그러한 에피스테메의 근원이 철저히 독사에 근거하고 있다는 것을 해명할 수 있는가 하는 것이다. 후설에 따르면 기하학을 비롯한 여타의 객관학문은 철저히 주관-상대적인 것에 그 토대를 두고 있다. 그리고 이 주관-상대적인 것은 생활세계로 표현되며, 생활세계적 토대를 확인할 때야 비로소 유럽 세계가 가진 인간성을 말살시키는 정밀학의 토대로부터 '엄밀학'으로 나아갈 수 있다고 본 것이다. 말하자면 실증주의는 인간의 책임과 자유로운 결정을 객관적 법칙으로 환원한다는 점에서 자기 책임의 학문, 인간성에 토대를 두지 못하고 있다. 실증주의의 성과를 무시하자는 것이 아니라 실증주의는 치료가 필요하며 그 발생적 정초를 분명히 해야만 인간성의 위기를 극복할 수 있다는 것이다. 생활세계, 주관-상대적인 것으로 수학적 정밀함으로 삶과 인간을 도구화 시키는 실증주의의 횡포에 도전하기. 그것이 <위기>에서 후설이 보여준 문제의식이다.
‘학문의 위기’이다. 그건 ‘학문’의 위기인 동시에, ‘위기’의 학문이다. 그렇다면 이런 지젝-데리다식 농담은 어떤가? 학문은 ‘항상-이미’ 위기였고, 따라서 ‘위기’라는 학문의 ‘불가능성의 조건’은 역설적으로 ‘항상-이미’ 학문의 ‘가능성의 조건’이다. 그러나 이런 농담 속에 전도된 (혹은 도착적/왜상적) 진리가 있다면 어떻게 할 것인가? 학문의 ‘가능성의 조건’은 ‘항상-이미’ 학문의 ‘불가능성의 조건’이라는 것 말이다. 그러니까 학문은 ‘위기’라는 쓰레기 더미를 양분으로 해서만 피어나는 괴물 같은 꽃, 혹은 꽃 같은 괴물이다. 왜 그런가? 후설은 다음과 같이 말한다.
“학문의 위기라는 것은 다름 아니라 바로 진정한 학문적 성격echte Wissenschaftlichkeit, 즉 학문이 자신의 과제를 세우고 이 과제를 완수하기 위한 학문의 방법론을 형성하는 방식 전체가 문제시되었다는 것을 뜻한다.” 후설에 따르면, ‘학문의 위기’란 ‘학문의 방법론을 형성하는 방식 전체’를 ‘문제시’하는 것이다. 따라서 ‘학문의 위기’의 극복을 위해서는 우선 ‘학문의 방법론을 형성하는 방식 전체’를 살펴보아야 할 것이다. 그런 후에 우리가 그것을 ‘문제시’할 때에 ‘학문의 위기’는 더 이상 학문의 ‘불가능성의 조건’이 아닌 ‘가능성의 조건’이 될 것이다. (칼 슈미트의 법, 벤야민의 폭력 비판, 마르크스, 니체의 사유가 '위기'를 사유하고 있음을 잊지말자)
이것이 후설이 <위기>를 사유하도록 동기화시킨 것이라면, 오늘날 우리 '예술'이 처한 상황도 다르지 않다고 말할 수 있지 않을까? 학문의 위기는 학문의 방법론을 형성하는 방식전체가 문제시된 것이라면, 예술의 위기 역시 예술의 방법론을 형성하는 방식전체가 문제시되는 것이라고 할 수 있지 않을까? 또한 학문의 위기 극복이 학문의 방법론을 형성하는 방식 전체를 살펴보는 것, 즉 객관적 학문을 가능하게 하는 주관-상대적인 것을 탐사하는 것, 다른 말로 생활세계적 토대를 인지하는 것이라고 한다면 예술의 위기 극복 역시 예술 자신의 생활세계적 토대를 탐사하는 것이 되어야 하지 않을까? 학문이 그 정초토대를 잃어버린채 하이데거식으로 말해 기술 앞에서 닦달함을 당하고 있듯이 예술 역시 철저히 닦달함 속에서만 존재타당성을 획득하고 있는 것이 이 땅에서 벌어지는 예술판의 현실이라면 너무 지나친가? 말인즉슨 예술의 위기는 예술의 예술성을 망각한 채 예술의 기술성에 예술을 잠식시키고, 예술의 존재타당성을 경제적 가치로서만 판단하는 것에서 온 것에서 초래된 것이 아닌가.
어제, 어느 교회 지하에서 열린 작은 음악회는 이러한 '위기'에서 피어난 괴물꽃에 다름아니다. 박지운이 말하고 있는 것처럼 '가곡'이 인간 사회에 의미있는 영향력을 줄 수 있으려면, 후설의 도움을 받아 성악을 하나의 '기술'로서 환원하지 않고, 의미/생명을 창조하는 생생한 초월론적 주관의 '목소리'와 '환경세계'의 역동성을 그대로 드러내보일 때 가능하다. 박지운이 느끼는 위기는 짐작하건대 오늘 날 예술계가, 특히 대구 지역의 예술계가, 특별히 음악계, 성악 분야가 자신의 예술성을 지나칠 정도로 기술적 차원, 예컨대 발성적 측면과 테크닉에 집중하여 음악의 발생적 토대라고 할 수 있는 '향유'를 사장시키고, '표현력'을 고사시켰다는 것에서 감지한 '위기'일 것이다. 르네 뒤샤블이 마르타 아르헤리치를 기술자라고 표현하는 것은 의미심장하다. 뒤샤블에 따르면 피아니즘Pianism은 기술이 될 수 없다. 마찬가지로 진정한 보컬리즘Vocalism은 발성으로 환원될 수 없다. 보칼리즘은 성공의 척도로서는 하나의 필요조건일지 모르지만 성악의 성악성을 위해서는 충분조건임을 이탈리아성악연구회의 첫 연주는 제대로 보여줬다. 사실 기술적 아쉬움이 표현력을, 서사를 방해하는 몇몇 지점이 아쉬운 대목도 없지 않았지만 성악, 가곡의 발생적 차원, 예를 들면 이탈리아의 17세기 사회상에 대한 박지운의 묘사와 철저히 '가사 전달적'이고자 했던 나레이션의 설치, 보컬리즘의 이념에 근접하고자 한 가수들의 노력은 아쉬움을 상쇄하고도 남는다. 기악이든 성악이든 무대에서 서커스를 하지 않는 것, 학문의 무대에서 논리적 정밀함만을 구축하지 않는 것, 그것이 예술의 예술성, 학문의 학문성을 위한 하나의 판단중지라고 할 때, 무대에서 다시 '위기', 특별히 인간의 인간성Menschenheit을 노래하고 사유하는 것이 오늘날 문예일반이 감당해야 할 과제가 아니겠는가.
덧붙이고 싶은 것은 대구시의 '대구국제오페라축제'에 대한 한심한 행보이다. 대구시가 이 축제를 경제적 차원으로 생각해야겠으나 그것으로만 생각해서는 곤란하다. 이 축제가 경제적 이득을 가져다주고, 다른 지방의 이들을 초대하기까지 되기 위해서는 이 축제가 생활세계적 토대 위에서 기획되어야 한다. 즉, 대규모 그랜드 오페라가 어느 정도는 필요하겠지만 소규모 연주에 대한 지원을 아끼지 말아야 하며 '저변'의 확대에 골몰해야 한다. 부산이 이미 저변화된 '영화'로 말그대로 프리미어 프리미엄을 누리고 있다면, 대구는 아직 저변화되지 않고 있는 '오페라'를 일단 저변화, 생활세계적 토대와 관계맺음을 이루도록 해야만 아직은 이뤄지지 않은 것으로 보이는 대구국제오페라의 프리미어가 가능하다는 더 큰 어려움에 놓여있음을 주지해야 한다. 예술가는 자신의 예술을 하나의 '기술'로 환원하지 말 것. 행정가는 예술가의 예술을 하나의 금전적 가치로만 환원하지 말 것. 예술은 기술이지만, 사람이 동물이지만 동물이 사람이 아니기에. 예술은 돈이 되지만, 돈이 되는 모든 것이 예술이 아니기에.
박지운과 이탈리아 성악 연구회의 '위기'에 대한 감각, 그들의 보컬리즘을 지지한다.


덧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