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00623 내가 다시는 비유로 말하지 않고. (설교의 정치성을 묻는다) by 철학본색

'직접적인 것'에 대해 직접적으로 말을 하는 것은, 싸구려 장식과 같은 거짓 정열로써 자신의 꼭두각시들을 치장하고, 기계 부속품에 지나지 않는 등장인물들을 무엇인가 실제로 바꿀 수 있는 주체들인 양 행동하게 하는 소설가와 같다. '삶'을 향한 시선은 '삶이 더 이상 존재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기만하는 이데올로기로 넘어갔다. -아도르노 '미니마모랄리아'의 서문

 

이주노동자와 비정규직 노동자들의 투쟁을 지지하며 성명성에 이름을 올리거나 지지방문을 하고 정치적 이슈를 다루는 논문을 쓸 수 있지만, 이상하게도 그것을 시로 표현하는 것은 쉽지가 않다. 사회참여와 참여시 사이에서의 분열, 이것은 창작과정에서 늘 나를 괴롭히는 문제이다.(진은영, 감각적인 것의 분배, 창작과 비평 2008년 겨울호) 

시인 자신의 정치적 참여는 물론 가능하다. 그리고 시의 경우에도 그것이 불가능하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그 사이에는 어떤 분열과 거리가 있으며 그 둘 사이를 좁히는 것은 쉽지 않다. 둘 사이의 연결통로를 만드는 것은 어떻게 가능한가? 시는 어떻게 정치적일 수 있는가? 이러한 판단과 질문들이 '문학과 정치' 논의의 핵심이었다.(권희철, 당신의 얼굴이 되어라, 창작과 비평 2010년 여름호)


1.1 아도르노가 말하는 최소한의 도덕은 '직접적인 것'에 대해 직접적으로 말하지 않는 것이다. 나는 아도르노에 관해서 무언가 말할 형편에 있지 못하지만 위의 말이 드러내고자 하는 사태가 무엇인지에 대해서는 이해할 것 같기도 하다.


1.2 <창작과 비평>을 중심으로 '시와 정치의 관계'를 묻는 물음이 활발하다. 지난 겨울 진은영 시인의 랑시에르가 쓴 '감각적인 것의 분배'와 관련한 글이 이 문제에 대한 수많은 평자들의 다양한 성찰을 불러 일으켰다. 이 문제에 대해서도 나는 무언가를 말할만한 처지에 있지 못하다. 랑시에르에 대해서도 잘 모르겠고, 혼자 힘으로 진은영 시인의 시들을 이해할 능력도 부족하다. 근래 <창작과 비평>에서 선정한 어느 신인비평가의 평문으로부터 그녀의 시를 따라가는데 필요한 이정표를 소개받았다.

1.3 이번 <창작과 비평> 여름호에서도 또 다시 '시와 정치', '문학과 정치성'의 관계를 묻고 있다. 이름하여 '문학의 정치성을 다시 묻는다'. 어떻게 정치를 정치적으로 말하지 않을 수 있을까, 어떻게 시를 시로써만 쓰지 않을 수 있을까, 시도 삶이고 소설도 삶이라면 삶/정치를 어떻게 말할 수 있을까? 이는 이 문제에 대한 거친 정식화인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이러한 문제의식은 가라타니 고진의 문맥에서 '근대문학은 끝났다'고 하는 사망선고에 대해서 다시 문학의 새로운 시작을 이야기하는 부활의 전조를 담고 있는 것처럼 보이지 않는가? 삶과 정치에 대해서 더이상 소설이, 문학이 예전에 했던 역할을 더 이상 해내갈 수 없다는 것에서 근대 문학의 종언이 있다면, 우리네 논자들은 문학의 가능성을 다시 물어 그 부활을 예비하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2.1 문학계의 이런 논의에 대해서 나는 별로 할말이 없다. 예전의 노동시가 직접적인 것을 직접적으로 말하고 있는만큼 시적 요구와 정치적 요구의 이중구속을 손쉽게 해소해버리고 있다는 것에 공감한다. 소위 뉴웨이브라는 경향의 시들 역시 그러한 이중구속에 대한 근본적 반성에 이르지는 못한다. 내 식으로 말하면 그들은 모두 사이비 해결사들이다.

2.2 지금부터 내가 하려는 이야기는 문학이 아니라 설교에 관한 것이다. 시인이 당면하고 있는 이러한 이중구속의 과제는 '설교가'에게도 똑같이 주어진다. 시와 정치 모두를 고려할 때 진정한 문학적 성취가 시적 요구 혹은 정치적 요구 어느 하나를 만족할 때만 완수될 수 있는 것이 아니라면, 문학의 문학성은 시와 정치 너머에 있고 동시에 시와 정치 모두를 포괄하는 것일테다. 마찬가지로 설교자가 말씀과 정치 모두를 고려할 때 진정한 영성은 신앙적 요구와 정치적 요구 모두를 넘어서고 동시에 포괄하는 자리에 놓여 있는 것일테다.

2.3 시인은 시의 정치성을 묻는데 설교가는 설교의 정치성을 어째서 묻지 않는가? 이 물음은 설교가 정치적이지 않아야 한다던가, 설교가 정치적이어야 한다던가 하는 것을 의미하지 않는다. 오히려 근대문학의 종언을 이야기할 수 있는 것처럼 '설교의 종언'을 이야기할 수 있다면 설교가 역사적으로 감당해온 역할을 어떻게 다시 복권시킬 수 있느냐 하는 데에 이 물음의 본질이 있다. 다시 말해 오늘날 -최소한 남한에서- 행해지는 설교는 대개 무의미해졌다. 고진의 언급처럼 김종철이 문학을 버리고 환경운동을 하듯이 오늘날의 설교가는 설교를 버리고 밥을 퍼고, 행사를 하고, 코미디를 한다. 그것이 아니라면 여전히 80년대에 사는 설교가들이 있을 뿐이다. 그들은 삶을 방기한 채 주석에 파묻혀지내던지 아니면 그와 정반대로 강단에서 반공 이데올로기만을 강연하던지 또 한편 신자유주의에 대한 정치적 투쟁만을 강조한다. 그래서 설교를 통해 진정한 영성으로 돌입할 길은 사라져버렸다.

2.4 리처드 로어의 말대로 영성은 '안으로 들어가는 길'과 '밖으로 나가는 길' 사이에서 끊임없이 오가는 것이다. 편의상 안으로 들어가는 길을 성서에 대한 언어적 이해, 밖으로 나가는 길을 정치적 행위로 생각하기로 하자. 성서에 대한 철두철미한 의미론적 이해, 주석적 이해, 신학적 이해는 항상 밖으로 나가는 길을 생각해야만 한다. 밖으로 나가는 길을 쉽게 '실천'이라 할 때 그것은 당연히 정치적 실천도 포함될 것이다. 하지만 진정한 어려움은 안으로 들어오고, 밖으로 나가는 길 사이를 오고감, 이러한 이중적인 요구에 설교가가 '지혜롭게' 응답할 수 있는가 하는 것이다.

2.5 민중신학 계열의 사람들 혹은 친미 신학을 하는 사람들은 밖으로 나가는 길만을 생각한다. 그들에게는 안으로 들어오는 길이 부재한다. 그래서 주석적으로, 역사적으로, 의미론적으로 맞지 않는 말을 떠벌리고 성서를 아전인수한다. 민중신학 계열의 많은 이들이 그렇고 친미 신학을 하는 사람들은 더하다. 이런 의미에서 그들은 상황-근본주의이며, 노동시를 써내려가던 시인들과 다르지 않다. 노동시를 쓰던 시인들도 역할이 있었다. 다만 대개 그들에게는 문학적 성취가 없다. 민중신학 노선의 목사도 역할은 있다. 다만 대개 그들에게는 진정한 영성가를 보기 드물다. 그들은 목사이기보다 정치가다.

2.6 말씀, 말씀 하는 자들은 대개 안으로 들어오는 길만 생각한다. 그들은 밖으로 나가는 길이 부재한다. 그래서 대개 자폐증 환자처럼, 아니 강박증 환자처럼 성서를 되뇌이고 목이 쉬도록 기도한다. 그들은 삶과 아무런 상관 없는 말들을 한다. 밖으로 나가는 길만을 절대시하던 자들이 정치가라면 이 사람들은 -세계를 망각한- 정신병환자들이다. 이들도 역할은 있다. 대개 이들은 문자주의적 근본주의자로서 철저한 성서 주석을 만들어나간다. 그러나 이들도 '위대한 진리'가 우리 너머에 있다는 사실을 깨닫지 못한 채 자신의 성서 이해만을 절대시하는 인식론적 오류에 흔히 빠져 버린다.


3.1 설교에서 '남북통일'을 말하고, '4대강'을 말하고, '노무현'을 말하는 것은 '북침전쟁의 필요성'을 말하고, '천안함'을 말하고, '이명박'을 말하는 것과 조금도 다르지 않다. 그래서 설교에서 '정치'를 말한다고 해서 그 설교가 '정치성'을 갖게 되는 것이 아니다. 나이브한 방식으로 정치적 현안, 정치적 감정을 설교에서 언급하는 것은 싸구려 장식처럼 보일 때가 많다.
아도르노의 말처럼 설교자는 그렇게 정치에 대해서 말하는 것만으로 세상이 바뀔 것인양 믿는다. 우리가 정말 도달해야 할 곳은 '위대한 진리'의 새로운 영토인 '영성' 그 자체이다. 그것은 정치적 유토피아와는 다르지만 가장 급진적인 정치성이다. 따라서 정치에 대해 바둑판 훈수두듯 강단에서 이따금씩 설교하는 설교가들은 시인들이 그러하듯이 설교와 정치성을 물어가는 성찰이라고는 찾아볼 수 없는 자들이다.

3.2 예수, 바울이 직접적인 것에 직접적으로 말하지 않았다는 것을 기억하자. 특히 예수의 비유를 상기해보자.
예수는 늘 눈 앞에 있는 것들 너머에 있는 진실을 추구하라고 우리에게 요구했다는 것을 생각해보자. 어느 한 길만을 따라가는 자는 예수의 멍에와는 무관한 채 눈 앞에 있는 것만을 좇는 자이다. 그런 자들은 할 수 없다. '죽은 자는 죽은 자로 하여금 장사지내게 할 수밖에 없다'. 
예수는 늘 우리에게 다른 사람의 말을 잘 들을 것을 요구했다는 것도 생각해보자. 귀가 았는 자들이 들어야 할 것은 비유 그 자체가 아니라 비유의 속사정이며, 육체의 누룩이 아니라 영적인 누룩이었다.

3.3 안으로 들어오는 길-밖으로 나가는 길. 삶을 향한 시선-삶이 더 이상 존재하는 않는다는 사실. 문학-정치성. 설교-정치성. 명상-실천.
이러한 양자 사이가 변증법적인 길항 관계정도로는 설명될 수 없는 복잡한 연관이 있음은 말할 것도 없을 것이다. 언제고 기회가 된다면 진은영의 뛰어난 시처럼, 설교에서 설교의 정치성을 소화한 설교를 읽고 소개할 수 있었으면 한다. 시와 정치가 그러하듯이 설교와 정치의 이중구속에도 쉬운 화해는 없을 것이다.

3.4 하지만 우리에게는 약속이 있어 반갑다.

"지금까지는 이런 것들을 내가 너희에게 비유로 말하였으나, 다시는 내가 비유로 말하지 않고 드러내서 아버지를 일러줄 때가 올 것이다." (-요한복음 16장 25절)


<그림>
맨 위 : 르네 마그리트의 그림. "이것은 파이프가 아니다"
중 간 : 다이안 아버스의 사진. "뉴욕 센트럴 파크에서 손에 수류탄을 든 아이"(1962)]
아 래 : 다니엘리베스킨트의 건축물. "펠릭스누스바움 하우스"


덧글

  • 이은희 2010/06/24 18:49 # 삭제 답글

    너무 많은 말로 설명하려 하다보니 늘 말만 남아 허전하네요..

    본질에 다가가지 못하고 힘만 뺸다는 느낌이 드는 건 모두의 과제가 아닌런지..

    너무 공감가는 글이라 오랜만에 빼꼼인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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