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00706 존재론적 영성과 기독교 신앙에 대한 짧은 단상 by 철학본색

                                                                                    

1.1 그리스도와 그리스도의 십자가가 의미하는 것은 무엇인가?  십자가 신앙과 존재 신학은 어떤 관계가 있는가? (존재신학을 존재론적 영성이라 할 때) 존재론적 영성은 기독교 신앙의 배타적 특이성을 허무는 것이 아닌가? 만일 그렇다면 타종교와 기독교의 경계를 허물게 되는 것이 아닌가? 예수 십자가의 본질 의미는 경계 허물기가 아닐까?

1.2 나는 이토록 중요하고 어려운 문제, 또 민감한 문제에 대해서 어떠한 할 말이 있겠는가? 그저 나의 어줍잖은 혼견을 나누는 것에 만족하고자 한다. 다소 난삽하더라도 용서하고 읽어주길 바란다.


2.1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그리스도가 '중요하다'라는 말을 그저 수사로 사용하는 것이 아닌 정말로 '의미있는 것'으로 받아들이려면 잠정적이지만 결정적인 그에 대한 해석이 동반될 수 밖에 없다. 기독교 교리에 대해서 맹목적인 이들과 기독교 영성에 들어가는 이들의 결정적인 차이는 거기에 있다. 대개 '십자가의 중요성'을 교조적으로 변증하려는 이들은 그것이 어떤 의미에서 중요한지를 말하기 보다는 그것이 기독교 신앙의 핵심임만을 기계적으로 강조하면서 많은 차이와 특이점들을 손쉽게 무화시켜버리는 것 같다. 물론 존스토트의 저술처럼 십자가와 그리스도의 중심성에 본질적으로 육박해 들어가는 이들을 모르는 것은 아니다. 따라서 기독교 신앙은 그리스도와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의미를 궁구하는 것에 본질이 놓여 있다. 강조하고 싶은 것은 기독교 신앙의 본질이 앞서 말한 것에 있다고 할 때, 존재 신학 자체가 기독교 신앙의 특이성을 구성하는 것은 아니라는 것이다. 존재, 즉 신은 기독교 영성에서도 물론 궁극적이지만 그것이 기독교 신앙에만 국한된 것은 아니라는 점을 말하고자 하는 것이다. 기독교 신앙은 그리스도와 그의 십자가를 통해서 존재의 빛으로 들어간다는 점에서 그 본질이 있는 것이지, 그리스도와 그의 십자가만을 강조한다거나 혹은 존재의 빛만을 강조하는 것만으로는 신앙의 본질적 구성 요소 중 하나를 결여할 수밖에 없는 것이다.

2.2 존재와 예수/십자가를 관계 맺는 문제는 더욱 어렵다. 이에 대해서는 현상학에서 한가지 단초를 얻어 예수와 십자가를 현상학에서 말하는 '판단중지', '초월론적 환원'으로 이해할수도 있지 않을까. 현상학에서 초월론적 판단중지는 '자연적 태도의 일반정립을 중지하는 것', 쉽게 말해 '세계가 존재자들의 총체라는 소박한 믿음을 중지시키는 것'을 의미한다. 이는 존재자들을 없애거나 존재자를 사소하게 여기는 것이 결코 아니다. 또한 초월론적이라는 말을 쓴다고 하여 신비적인 것이 아니다. 자연적태도의 일반정립을 중지시킨다는 것은 하나의 '태도변경'이다. 즉 존재자들의 존재정립을 '유보'하고 그것이 주관에 의해 의미로 구성된 것임을 드러내는 것이야말로 초월론적 판단중지가 의미하는 바이다. 후설에 따르면 초월론적 판단중지를 통해서야 비로소 세계가 그저 있는 것이 아니라 초월론적 주관의 작용에 의해 구성된 의미적인 대상임이 드러난다고 한다. 그때야 주관, 즉 자아는 초월론적인 세계 개방을 경험하여 세계와 적극적으로 관계맺고 있는 자신을 확인하게 되고 자신의 의미 구성 작용 자체를 검토하고 반성하며, 존재자의 총체로서의 세계가 아닌 세계의 존재 그 자체로 들어갈 수 있다는 것이다.. 그래서 예수의 죽음, 십자가가 이 같은 판단중지를 가능하게 하고, 초월론적 자아가 궁극적으로 도달해야 하는 하나의 이념으로 제시되고 있는 것이 아닌가 한다. 예수의 죽음이야말로 모든 육체적, 세속적 요구를 거부한 죽음이요, 세계를 부활로 몰고가는 계기의 새로운 단초로 작동하기 때문이다.


3.1 만일 그렇다면 타종교와 기독교의 관계가 문제가 될텐데, 타종교 역시 존재에 대한 하나의 해석을 담고 있다고 할 때 기독교인들은 존재일반에 대한 탁월한 예시와 해석, 존재일반론적 영성으로 들어가는 빠른 길로 그리스도와 십자가를 믿는 이들이라고 생각할 수 있을 듯하다. 그렇게 되면 존재에 대한, 기독교 신앙에 대한 상대적 입장이 아닌가 하는 이들이 있을지도 모르지만, 인간이 두 시간과 두 공간을 동시에 살아갈 수 있는 존재일 수 없다는 점에서 기독교 신앙을 선택한 자들은 그들 입장에서 기독교를 절대적으로 여기는 것이 한편으로 당연하며, 절대적이고, 이에 대해 나의 시간 안에서의 '나의 신앙'으로, 또한 존재가 기독교를 통해서도 알려지고 드러나는 한, 타종교의 진리성을 인정한다고 하여 상대적 입장에 떨어지는 것은 결코 아니라는 것이 논리적으로도 자명하다.

3.2 정리하자면 내게 절대적인 것은 절대적이다. 내게 명증적인 것은 명증적이며 그것을 부정할 수는 없다. 그렇다고 할 때 타인에게 명증적인 것은 명증적이며 그것이 내용상 다르다고 하더라도 사태상 같은 것을 지시할 수 있는 가능성은 얼마든지 존재한다. 이것은 내포와 외연의 관계이다. 내포는 내포대로 절대적이지만 다른 내포적 의미를 지닌다고 해도 같은 외연적 의미를 지시할 수 있기 때문이다. 개밥바라기와 샛별은 각기 저녁 서쪽 하늘에 밝게 빛나는 별, 새벽 동쪽 하늘에 밝게 빛나는 별이라는 다른 내포적 의미를 지니지만 같은 외연적 의미인 금성을 지시체로 갖는다. 그 때 개밥바라기와 샛별은 금성을 지시하는 다른 길을 보여준다고 해서 그 의미가 상대적이거나 반감되는 것은 아니다. 그것은 구체적인 인간의 경험에서는 절대적으로 개밥바라기이며, 또 한편 샛별이다.


4.1 예수는 '경계'를 허물고, 또한편으로 그 자신 경계 그 자체이다. 예수가 경계를 허물었다함은 그 자신 어느 한 영토에 귀속되기를 거부했다는 것이며, 예수님께서 경계 그 자체라는 것은 그 경계 위에 서 있는 것, 경계 그 자체가 되는 것이야 말로 (예컨대 신과 인간, 유대인과 이방인, 삶과 죽음, 십자가) 영토에 귀속된 어떠한 존재론적 입장(앞서 말한 자연적 태도의 일반정립)에서 벗어나는 것으로 여겼기 때문이다. 이런 표현이 어떻게 들리지 모르지만 그런 의미에서 예수는 해체적이며 데리다식으로 말해서 '유령적'이다.

4.2 반성적이고 소박한 믿음의 영역을 벗어나게 새로운 태도와 의미 구성을 가능하게 한다는 점에서 현재적이고, 해석적이고, 그래서 미래적이다. 그래서 최소한 기독교 영역 내에서는 존재 없이 그리스도가 없고(그리스도는 존재 사건 자체이기에), 그리스도 없이 존재는 없는 것(존재는 그리스도와 그의 죽음, 부활을 통해서만 드러나고 드러나짐을 보증했기에)으로 말할 수 있는 것이라 생각할 수도 있다.

4.3 따라서 누군가의 말처럼 존재일반과 그리스도의 십자가는 긴장관계를 유지해야 한다고 하는 것은 전혀 사태에 부합하지 않는 언설이다. 오히려 양자는 상호공속적이고, 한편으로는 필연적인 관계이다. 문제는 양자 사이를 필연적이라고 한다면 타종교의 진리와 존재 사이의 관계는 우연적이 된다는 것인데, 나는 그에 대해서 다음과 같이 말할 수 있다. 필연성은 단지 고백의 차원일뿐 우리는 존재라는 단적인 사태 앞에 얼마든지 타종교와 대화하는 것이 가능하며 이러한 입장(타종교와 대하할수 있으면서도 기독교 진리는 필연적이다라는 입장)에는 어떠한 역설도 존재하지 않는다. 왜 그런지에 대해서는 이미 3.2에서 밝혔다. 어느 누구도 샛별과 금성의 관계를 개밥바라기와 금성의 관계보다 존재론적으로 탁월한 필연적 관계성을 지니고 있다고 말할 수 없다.


5.1 지금 나는 예전처럼 이와 같은 대단한 어려운 문제에 대해서 문체적 악습과 혼견으로 더욱 이해되기 어려운 것으로 만들고 있는지도 모른다. 더욱이 철학도 답지 않게 제기된 어려운 딜레마를 사태 자체에 즉해서 보기 보다 현상학적 교리에 따라 편의대로 설명하고 이해하려는 경향이 있을지도 모른다. 만일 그랬다고 한다면 용서를 구한다.

5.2 이 글은 내가 아는 한 선생님께 보낸 글에다가 어투를 고치고 내용을 조금 더 보완하여 수정한 것임을 밝혀둔다. 따라서 맥락이 닿지 않는 부분이 있으리라. 만일 그랬다고 한다면 부디 다시한번 더 용서를 구한다.            

덧글

  • 이영돈 2010/07/10 14:29 # 삭제 답글

    전반적으로 제게는 어려운 글이었지만, '경계 허물기'라는 말은 깊은 공감을 불러일으킵니다.

    다소 자유로운 예수 읽기에 기대어 예수를 생각해보면 경계를 허무는 예수가 또 달리 느껴집니다.


    마리아와 요셉이 결혼하기 전 예수가 회임되었다는 것은 미묘합니다. '조용히 관계를 끊으려는' 요셉이 의로운 사람으로 그려지듯, 결혼전 회임은 예나 지금이나 도덕적으로 옳은 일은 아니겠지요. 달리 말하자면 예수는 '죄'에서 태어난 것이지요. 어느 병자를 두고 제자들은 묻습니다. '저자의 병은 자신의 죄 때문입니까? 부모의 죄 때문입니까?'

    그러나 예수는 제자들과 당시 회중들에게 '하나님의 아들'로 인정 받습니다. (지금의 수많은 '입으로만 주여, 주여'하는 자들에게도 하나님의 아들로 이해되고 있습니다만.) 여기서 성(聖)과 속(俗), 깨끗함과 더러움의 혼동이 일어납니다. 제자들의 물음은 '죄에서는 죄가 나온다'는 당시의 평균적인 통념에서 나온 것이 아닌지요. 그러나 예수는 자신의 삶과, 또한 수많은 '사회속의 타자'들을 구원하며 이런 통념을 녹여버립니다.

    병자와 건강한 자, 유대인과 이방인을 나누는 경계를 허물었던 예수의 사상은 자신의 삶에서 나온 것인지도 모르겠습니다.
  • 철학본색 2010/07/12 21:58 #

    영돈씨가 어려우셨다니 제가 글을 잘못 쓴 거로군요.

    하신 말씀은 재미있는 해석 같습니다. 그렇지요. 예수의 입장은 예수의 존재로부터 나온 것이리라 봅니다.
    예수의 삶은 이원론적 존재론도, 독선적인 일원론도 아니었지요. 그래서 저는 데리다의 '유령'과 예수를 자꾸만 유비하게 되나 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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