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10505 엉터리 논문. 하이데거가 포드주의자라고? 웃기고 자빠졌네. by 철학본색

엉터리 논문. 하이데거가 포드주의자라고? 웃기고 자빠졌네.


<존재와 시간> 에 대한 정치철학적 해석의 가능성

-하이데거는 포드주의 철학자인가?

 

이재성이라는 사람이 쓴 논문이다. 흥미로운 내용이지만 하이데거 이해에 적지 않은, 아니 많은 문제가 있다. 이 사람은 하이데거가 포드주의 철학자라고 결론내고 있는데 그 근거라는 것이 하이데거가 나치였기 때문에 그가 포드주의자라는 것이다. 왜냐하면 나치가 포드주의 생산양식을 민족주의적 색채를 덧씌워 가져오려고 했으니깐. 그 밖에 <존재와 시간>(이하 sz)에서 하이데거의 반시민주의적 면모를 보여준다고 생각되는 구절을 일일이 가져와 상세히 설명하는데 많은 분량을 할애한다.

 

이 논문이 가진 첫번째 문제는, 하이데거와 나치즘 사이의 관계를 지나치게 소박하게 판단하고 있다는 것이다. 논문의 구도는 하이데거=나치라는 등식을 전제로 이뤄지는데 하이데거가 어떤 의미에서 나치였는지는 그렇게 자명한 것이 아니다. 하이데거는 1936년 이래로 나치와 결별했고, 푸라이부르크대학 총장 시절에도 당국으로부터 나치사상과 거리 때문에 많은 고초를 당해야했다. <총장 취임 연설문>과 같은 글과 여러 행적에서 나치로서의 면모도 찾아볼 수 있지만 그의 나치 행적이 있었다해서 전편의 글을 모두 나치와 연결시키는 건 학문적 태도가 아니다.

 

두번째 문제는 sz에 대한 엉터리 이해이다. 사실 sz에 대한 잘못된 설명은 한두가지가 아니라 정리하기도 힘든데, sz의 근본의도를 파악하지 않은채 이 책을 정치철학서로 읽으려는 것이 가장 이상한 점이다. 도대체 sz를 정치철학으로 읽어야 할 이유가 뭐가 있는가?


1) 이 사람이 주장하는 sz의 비본래성-본래성 구분은 잘못된 것이다. 하이데거는 비본래성을 부정적으로 평가한 적이 단 한번도 없다. 심지어 그렇게 봐서는 안된다고 텍스트가 여러부분에서 말하고 있다. 따라서 현존재의 비본래적 존재방식에 대한 하이데거의 분석을 하이데거의 포드주의 비판으로 읽는 것은 소가 웃을 비판이다. 비본래성은 초월론적 현상학적 환원 전의 자연적 태도의 일반정립 상태의 모습을 현상학적으로 서술한 것이다.


2) 지배, 소외에 대한 분석도 잘못된 것이다. '그들의 지배'는 자연적 일반정립 상황에 대한 무비판적 태도가 만연한 것을 의미하는 것으로 이는 경우에 따라 혁명적 테제가 된다. 따라서 그들의 지배를 아래로부터의 지배니 뭐니 하면서 지배체제에 대한 언급이 없다고 비판하는 것은 이번엔 돼지가 웃을 일이다. 소외 역시 마찬가지이다. 소외는 하이데거에게서 하나의 독자성을 뜻하며 소외가 소외 자체로 긍정되는 것이 아니다. 선구적 결의라는 말을 모르는가? 하이데거가 소외를 긍정한다는 점에 맑스주의의 소외와는 거리가 있다고 하는 주장은 참으로 실소하게 하는 주장이다.


3) 잡담, 공동존재에 대한 언급은 웃기다 못해 황당한 설명이다. 하이데거가 일상적 현존재가 잡담하는 것을 실존범주의 하나로 본 것을 가지고 대중들의 의사소통을 잡담으로 표현하고 있다고 말하는 것이나, 하이데거가 침묵의 가치를 평가하는 것을 시민사회의 의사소통이 언어적으로 이뤄질 수밖에 없다고 말하는 주장은 sz를 읽은 것이 아니라 sz의 글자만 읽은 것이다. 하이데거의 배면을 보지말고, 문맥의 배면을 읽으시면 좋겠다. 하이데거에게 침묵은 존재의 소리에 귀기울이기 위함이며, 자연적 태도의 일반정립의 영향력을 중지시키기 위함이다. 이것이 반동적인가?

공동존재는 논증하는 공동체로서의 시민사회를 규명하지 못한다는 주장 역시 잘못이해한 것이다. 논증이 없는 공동체는 필연적으로 감성에 기초한 공동체이기에 반시민주의적이라는게 이 논자의 주장인데, 하이데거의 공동존재는 생활세게적 기초로서의 공동체를 의미하는 것일뿐 그것을 갖고 감성적이니 반시민사회적이니 하는 말은 맞지 않다.


4) 더 중요한 결함은 이 논자가 존재적-존재론적 차이를 구분하지 못하고 있다는 것이다. sz의 저작의도는 존재론적 차이에 대한 현상학적 기술에 있다. 하지만 논자는 철저히 sz를 존재적 관점에서 읽고 있다. 그러니 글의 근본구도가 눈에 들어올리 없다.


5) 마지막으로 하이데거의 '전회'가 나치와의 일관성을 위한 필연적 귀결이었다는 주장이다. 그럴리 없다. 전회의 목표는 '존재의 진리', '존재의 역사' 탐구에 잇으며 전기의 정적 분석으로부터 발생적분석으로 이행하는 것이었다. 그것이 나치와 관련된 것이었는지는 더 논구가 필요하지만 현상학적 탐구를 해온 철학적 귀결이었다는 것이 더 맞는 설명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하이데거는 나치를 추종한게 아니라 아리스토텔레스가 그랬던 것처럼, 철학자로서 총통을 지도하고 싶어했다.


이 논문을 읽고 답답하게 여긴 세번째 이유는 문장이다. 교수까지 되어서 글을 이렇게 밖에 못쓰나. 비문에, 번역투 문장에, 전체적으로 사유가 간명하지 못해 논증의 논리가 어지럽다.


"지금까지 좌파의 전유물로 여겨졌던 영역에 하이데거가 개입하면서 시작된 지배와 소외에 대한 비판의 공격 방향은 무엇보다도 '일상성'과 '비본래성'에 대한 하이데거의 긍정적인 대립모델인 '본래성', 즉 삶을 본래적인 것으로 간주한다면 보다 분명해질 것이다"


도대체 이게 무슨 말인가? 이런 글은 첨삭도 어려운 수준이다. 대체로 이 글의 많은 문장이 이런 비극적인 수준이다.

철학하는 이들은 정말 분명한 이야기, 꼭 해야 하는 이야기를 하지 않는 한 금치산자라는 사회적 선고에서 벗어날 수 없게 된다. 논문을 쓰기 위한 논문, 거의 학부 2학년생들이 격의한 리포트 수준의 논문을 번역투 문장으로 써내면 논문이 되는 학계 현실이 개탄스럽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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