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병소, 사라진 신문, 지워진 신문, 잘려진 신문.
1. 최병소의 작품들
작가 자신의 고백대로 그는 몸으로 작업하는 자이다. 신문지나 박스에 볼펜과 연필로 줄을 긋고 또 그어 그것이 애초에 신문이었는지, 아니었는지 변별하기 어려울 정도로 만든다. 결국 그렇게 줄을 긋고 또 긋다 보면 신문은 얇아질 대로 얇아지고 너덜너덜 해지며 마치 애시당초 신문이 아니었던 것처럼 보인다. 검은 펜으로 한 없이 그어진 작품 위에 비친 빛은 기묘하다고 해야할 은근한 광채가 있다.
혹은 수천부의 신문을 날짜별로 모아 절단기로 썰어 그것을 꽤 넓은 공간에 흩어 뿌린다. 일정한 크기로 분절된 채 뿌려진 신문은 신문이면서도 신문이 아니다. 펜으로 이어지던 줄 긋기는 절단기가 대신하게 되었다.
최근 선보인 런던 올림픽 관련 보도를 담고 있는 타임즈지를 벽에 붙여 넓게 줄을 그은 것은 최병소에 줄긋기가 특별한 의미가 있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의미한다. 다른 작품과 달리 신문 기사를 거의 그대로 확인할 수 있는데 넓은 간격으로 방사형태로 그어진 사선은 그것이 단지 최병소의 작품이고 하나의 작품이라는 사실만을 의미하는 것처럼 보인다. 그런데 이 작품 역시 다른 작품과 마찬가지로 시의성이 사라진 외국 신문일 뿐이다. 이것은 신문(新-聞)인가 아닌가.


2. 최병소 읽기
최병소 작품을 미니멀리즘으로 이해하는 방법이 있다. 줄긋기라는 단순한 작업으로 나타나는 결과의 그 단순성 때문이다. 혹은 정치적으로 읽는 방식도 있다. 70년대를 뚫고 살아온 작가에게 신문에 줄긋기는 진실이 아닌 사실, 거짓보다 더 거짓 같은 사실과의 투쟁이었을테다. 최병소의 작업 방식이 갖는 고유성을 중심으로 그를 이해하는 방식도 있다. 신문지를 신문지 같아 보이지 않도록 하는 과정, 레디메이드를 작가의 창작물로 코딩하는 과정은 부단한 노동에 바탕을 두고 있으며 그로 부터 최병소의 작가적 진정성을 보게 되기도 한다. 한편 최병소의 작품을 개념 미술로 읽을 수도 있다. 그의 아이디어는 예술, 의미와 무의미이다.

3. 예술의 의미를 묻기
메를로-퐁티의 <의미와 무의미> 라는 책 자체를 작품에 활용한 예는 최병소가 의미 문제에 천착하고 있음을 보여준다. 뒤샹의 말처처럼 미술가의 역할이 '물질을 교묘하게 치장하는 데 있지 않고 미의 고찰을 위한 선택'에 있는 것이라면 최병소는 텍스트의 형식이나 구성원리를 묻기 보다 텍스트의 의미, 예술의 목적을 문제 삼는다.
의미는 무엇이며, 의미의 기원은 어디인가. 이것은 가장 철학적이며 모든 철학이 묻고 있는 질문이다. 근본적으로 철학은 의미론이다.
들뢰즈는 <의미의 논리>에서 의미와 관련한 전통적인 세 부류의 이론을 거부한다. 들뢰즈의 의미론은 의미는 명제에 내속한다(insist)라는 말로 요약된다. 들뢰즈에게서 의미는 유물론적 의미의 지시적이고 진리대응론적인 것도 아니며, 데카르트적 의미에서 주체에 의존하고 있는 것도 아니며, 참인 논증들로 이뤄져서 함의하는 것도 아니라는 점에서 의미는 명제 외적인 것에 있는 것이 아닌 명제 내부에 내속한다. 여기에서 들뢰즈 의미론을 해명할 이유는 없다. 다만 최병소의 작업 역시 전통적인 의미 이론에 대한 비틀기와 성찰에 그 목표가 있음을 주지하는 것이 필요하다.
- 의미를 담고 있는 신문은 무수한 줄 긋기 작업으로 신문인지 아닌지 조차 분간하기 어려울 정도가 되었다. 신문을 '의미'를 상징하는 작가의 도구로 읽게 될 때 그의 줄 긋기 작업은 의미를 지우는 작업이다. 그럼 의미가 지워진-사라진 신문은 의미 있는 것인가 하는 물음에 최병소 작품의 모티프가 있다.
- 절단된 채 무수히 나 뒹구는 신문은 부분적으로나마 신문의 내용을 해독할 수 있기에 앞서의 작품보다 사정이 나은 것인가? 3500부의 신문이 12m X 19m의 크기의 방에 절단된 채 나 뒹굴고 있을 때 신문은 의미를 지닐 수 있는지 분명하지 않다. 잘라진 신문은 지워진 신문이며 사라진 신문이기에 이 역시 의미 있는 것인가 하는 물음이 제기된다.
- 런던 올림픽 기사를 거의 또렷이 확인할 수 있는 신문들이 벽에 수십장이 붙어 있되 질서 잡혀 있지는 않다. 이 작품을 마주하는 자 중에 올림픽 기사가 이 작품에 의미를 부여한다고 생각하는 자는 몇이나 있을까? 그런 의미에서 이 역시 읽히지 않는 신문이며 잘라진 신문, 지워진 신문이자 사라진 신문이다. 이 신문은 의미 있는 것인가?
4. 두방향 : 의미에서 무의미로, 무의미에서 의미로
이제 최병소가 무엇을 개념화하고자 하는지 다소 분명해지지 않았는가? 기표와 대상을 상실한 신문. 이제 그의 작품을 마주하는 이들이 묻는 물음은 지워진 신문과 잘려진 신문이 의미 있는 것인가 하는 것이다.
역설적이게도 의미가 명제에 내속한다는 들뢰즈의 말처럼 그의 <무제>라는 이름들의 작품들에는 의미가 내속한다. 들뢰즈에 따르면 의미는 역설적이고 동일화되지 않는 심급에서 발생하는 것이며 그런 까닭에 의미의 기원은 의미화 되기 이전의 무의미이다.
최병소의 작품은 의미화가 소멸된 공간, 즉 무의미의 공간에서 의미가 어떻게 유래하는지를 시각적으로 형상화하고 있는 것으로 읽을 수 있다. 감상자는 신문의 세계와 작품의 세계, 의미의 세계와 무의미의 세계에서 의미의 본래적 기원이 무의미에서 유래함을, 무릇 이 작품의 무의미함을 견딜 수 없기에 무의미로부터 작품을 끝없이 건져내고자 하게 된다. 이 때 지워진 신문, 사라진 신문은 '작품'으로 탄생한다. 이것은 의미 혹은 개념의 탄생과 구조적으로 동일하다.
낭만적이고 장식적인 미술과 같이 단적으로 '작품'이 되는 것이 아니다. 이것은 들뢰즈 식으로 말해 표면에서 일어나는 일이다. 개념미술은 작품이 어떻게 탄생하는지를 묻는다. 작품이 작품이 되게 하는 조건을 묻는다. 즉 작품의 선험적 조건, 버츄얼한 장을 문제 삼는다. 그것이 뒤샹이 미술가의 역할이 미의 고찰을 위한 선택에 있다는 말의 의미이다.
더욱이 그는 의미를 지움으로 무의미를 만들고, 무의미로부터 의미를 탄생하는 과정을 시각화한다.
작품이 지니는 두방향, 즉 의미에서 무의미로의 과정이 표면에서 선험적 장으로 가는 것이라면, 무의미에서 의미로의 과정은 선험적 장에서 의미가 탄생하는, 즉 작품이 그 작품성을 획득하는 과정이다. 무의미에서 의미로의 과정은 작가와 감상자, 작품이 놓인 세계, 무의미하지만 무의미하지만은 않은, 명시화되지 않지만 암묵적이지만도 않은 생활세계, 신체 감각, 지각까지 포함한 버츄얼하고 초월론적이고 선험적인 장에 의존적이다.
최병소의 작품은 미술 작품이 갖는 작품성이, 하이데거식으로 예술의 예술성이 신문이 사태나 사건을 지시하는 방식처럼 부여될 수 없고, 주체의 일방적인 의미 부여에 있는 것이 아니며, 논리적인 정교함에 있는 것이 아님을 드러내고 있다. 그는 의미의 세계를 지우고, 자르고, 관심영역에서 벗어나게 함으로 의미는 무의미와 투쟁에서 비롯함을, 또한 미술가의 역할은 작품의 작품되게 하는 조건을 탐구하는 것에 있다는 것을 보여줬다.
4. 탈영토적인, 하지만 영토적인.
2012년 대구미술관의 마지막 전시로 기획된 최병소전에 다녀온 후 생각된 바가 있어 정리해 본 것이다. 미술관 1층에서 진행되고 있는 디스로케이션 전에는 말그대로 해체, 탈영토화라는 주제를 가지고 해외 거주 경험이 있는 작가들의 작품들이 전시되고 있다. 양혜규, 정연두 등의 작품들이다. 6, 70년대 생의 젊은 작가들이 유목적인 사유와 작업 방식이 하이데거에 대한 반대 작업이라 해야 할 듯, 탈고향적이고 해체적이고 유목적이라지만 이미 고희가 목전인 최병소의 사유는 어떤 의미에서 더욱 탈영토적이며 또한 영토적이다.
신문을 절단냄으로 사태와 매체를 단절시킨 것처럼, 미술 작품의 전통적인 주제, 의미, 작품의 의미를 부여 받은 방식, 작품의 물질성을 자신 작품으로부터 소거해 낸다는 점에서 그의 작품은 탈영토적이다. 그러나 그는 의미의 발생적 근거, 의미가 무의미로부터 나왔음을 깨닫게 한다는 점에서, 또한 작품이 작품과 작가와 감상자가 놓인 선험적인 장, 비인칭적이고, 명시적이지 않지만 일정하게 짜여 있는 구조인 선험적인 장으로부터 의미를 부여받게 된다는 사실을 밝힌다는 점에서 영토적이기도 하다.
정리하자면, 최병소의 작품은 개념 미술로서 작품의 작품성, 즉 의미의 기원에 대한 탐구이다. 신문을 지우고, 찢는 과정을 통해 그는 신문을 물질 영역(사태)으로부터 분리시키고 작품을 물질 영역이나 미적 장식의 차원이 아닌 곳에 정위시켜야 함을 보여준다. 따라서 그의 작품을 보는 자들은 찢어지고 검게 칠해진 신문이 지니는 의미를 물어야 하고, 의미를 묻는다는 점에서 작품이 지니는 무의미성과 투쟁하게 된다. 비로서 작품은 작가-작품-감상자 사이에 놓인 선험적 장에 의해 의미를 부여 받게 된다.
작품의 작품성, 무의미로부터 건져낸 의미는 작가의 전언대로, 신문이 볼펜과 연필을 만나 다른 물질로 성불하듯 새로운 물(질)성을 획득하는 것, 바로 그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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