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30221 서경식, 증언의 가능 조건.(부산대 강연 후) by 철학본색


 다른 말로 표현한다면, '타자에 대한 상상력이라는 것을 가질 수 있는가'라는 문제라고 생각합니다. 만일, 우리가 살고 있는 이 공간 밖에 세계가 없다고 한다면, 예를 들면 아우슈비츠에 수용된 사람에게 '아우슈비츠 밖은 없다'는 식으로 상정하면, 그곳에서 살아남는다, 증언을 한다는 발상은 할 수 없지요. 거기에는 밖이 없기 때문에. 그러나 '밖이 있다'고 생각하니까 살아남자, 증언하자고(하는 것입니다). '밖에 있는 누군가가 이 증언을 틀림 없이 들어 줄 것이고, 이런 일이 다시 오는 것을 막을 수 있을 것이다'라는 발상이 가능해지는 것이지요. 즉, '밖'이라는 것은 역사적으로는 예를 들면 '백성', '민초'에게 그 현세가 너무나도 괴로울 때, '이 현세 밖에 내세가 있다'는 것이 현세에서 살아남기 위해 필요했던 것입니다. 그러나 그것은 하나의 공상 속의 밖입니다. 그래서 그 '밖'이 없다, 현세 밖에 없고 그것이 구제할 수 없는 괴로운 것이라고 한다면, 살아갈 수 없는 것이지요. 혹은 죽을 수도 없다고 해도 될까요? 그것은 아우슈비츠도 똑같다라고 한다면 신앙이라는 형태가 아니고, 자기 자신들을 한정하고 있는 이 공간의 '밖'이라는 것을 생각하기 위해서는, 눈 앞에 있는 인간들이 아닌 인간, 말하자면, '본래의 인간성을 몸에 익히고 있는, 띠고 있는 인간들은 어딘가에 틀림 없이 있다' 고 상정하지 않으면 '외부'는 있을 수 없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지금, 우리가 살고 있는 현실에 "외부"가 있는가, 그 "외부"를 상상할 수 있나 하는 점이 매우 중요하고 또 프리모 레비가 우리에게 남긴 중대한 물음이라고 생각합니다.(서경식, 인터뷰 중 일부, 강조는 필자임)

1. 유비

초기 그리스도교에서 예수의 죽음과 부활은 증언의 대상이자 증언의 핵, 사태 그 자체였다. 사도들은 이 사태를 증언하도록 하기 위해 부름 받았으며 이들은 모진 고난과 핍박, 멸시 속에서도 자신을 사도로 부른 그 부름에 응답하는데 있어서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았다. 예수의 죽음이라는 사태는 정치적 지도자로 예수를 오해하던 제자들에게 있어서만큼은 매우 끔찍한 일이었으며, 또한 예수의 죽음의 이미지 역시 끔찍한 것이었다. 이것은 인간성을 근본적으로 회의하게금 하는 사태이다. 제자들은 인간성에 대한 근본적인 도전을 경험했고, 예수의 죽음과 부활을 증언하는 가운데서도 인간성에 기반한 대우를 거의 받지 못했다. 사도가 된 제자들은 거꾸로 십자가에 못박히거나 돌팔매질을 당하는 등 예수 보다도 더 끔찍하게 죽임을 당하는 경우가 많았고, 우리는 이를 '순교'라 부르고 있다.

아우슈비츠의 생환자인 프리모 레비에게 증언의 대상은 아우슈비츠에서의 생활, 삶, 경험이었으며 이것은 마찬가지로 인간성에 대한 근원적인 절멸과 절망과 관련된 것이다. 그러나 <이것이 인간인가>에서는 예수의 죽음이 부활의 경로를 따르듯 절망적인 상황에서 아래의 구절은 신의 음성이 현현되기도 한다.(이것은 판타지가 아니다) 프리모 레비는 단테의 <신곡>의 일부를 동료들에게 들려준다. "그대들이 타고난 본성을 가늠하시오. 짐승으로 살고자 태어나지 않았고, 오히려 덕과 지를 따르기 위함이라오". 프리모 레비는 수용소에서 생환 후 수용소 밖의 사람들에게 인간성이 절멸 당하던 때를 전달해야 했다. 하지만 사도들이 증언하기에 상황이 불리했던 것처럼, 프리모 레비가 증언하기에도 상황은 늘 불안했다. 수용소에서 인간성의 위기를 경험하고 이를 증언하려 했던 프리모 레비는 80년대의 복합적인 상황과 그 외의 단언하기 어려운 많은 이유들로 인해 인간성에 대한 도전을 받았고 결국 죽음을 선택했다. 우리는 이를 '자살'이라 부른다.

순교이기 때문에 용인될 수 있고, 자살이기 때문에 그럴 수 없음을 말하려는 것이 아니다. 우리는 순교이든 자살이든 죽은 자로부터 일정한 유산을 상속받게 된다. 예수의 죽음이 이스라엘이라는 단일한 민족 집단을 넘어서는 하나님 나라의 보편성을, 사도들의 죽음이 유대인의 메시아를 유대인과 이방인 즉 온 인류의 메시아라는 보편성을 확증한 것이라면, 프리모 레비의 죽음도 마찬가지로 인간 존재에 대한 근본적인 질문을 보편화 시킨다.
 
두 증언에 구조가 본질상 다르지 않다는 것이 얼마나 드러나도록 설명했는지 자신은 없지만, 굳이 차이를 해명해 나가자면 '증언의 가능 조건'에 있다 하겠다. 위의 인용한 부분에서 서경식은 증언의 가능 조건이 '외부'에 있다고 한다. 만일 '외부'가 없다면 도대체 누구에게 어떻게 왜 증언을 해야 한다는 말인가. 증언의 가능 조건이 외부에 있다는 말은 사도들의 증언 행위에서도 마찬가지로 적용된다. 만일 증언할 대상이 없다면 증언을 해야 할 까닭이 어디에 있단 말인가. 프리모 레비가 <신곡>의 일부를 암송하는 부분이 중요한 이유는, 증언의 가능 조건으로 '외부'가 있다면, 이 외부의 조건이 무엇인지를 알려주고 있다는 점이다. 그가 생환 후 증언을 활발히 이어나갈 수 있었던 가장 중요한 까닭은 인간 존재가 그럼에도 불구하고 '덕과 지'를 지닌 존재라는 믿음 때문이다.

'덕과 지'. 이것은 바른 의지와 지성인바 그리스도교에서 증언의 조건으로서의 사도들에게 외부는 신이 예비해두고 준비하고 있는 것이며, 이것은 성령이 확증한다. 성령은 증언을 듣는 자와 말하는 자 모두의 합치를 이루도록 한다. 사도들에게 증언은 불가능성의 가능성이다. 첫째, 어떻게 나의 말이 저에게 이해될 수 있다는 말인가. 둘째, 어떻게 이토록 부정적인 환경 속에서도 증언을 들을 자들이 존재할 수 있단 말인가. 셋째, 어떻게 영장류인 인간이 덕과 지를 지닐 수 있다는 말인가. 어느 것에도 긍정적일 수 없는, 아니 회의적일 수 밖에 없는 상황에서 증언을 가능하게 하는 충분 조건은 무엇인가. 그것은 외부를 마련하고 있는 성령, 신의 보증이다. 따라서 순교할지언정 자살하지 않는다.

그러나 프리모 레비의 경우는 외부, 즉 덕과 지가 지닌 외부의 존재를 어떻게 전제할 수 있는가? 아니 무엇이 전제해 줄 수 있는가? 증언하는 자-증언을 듣는 자 여기에 어떤 보증을 해줄 수 있는가? 나는 프리모 레비의 자살은 인간성에 대한 근본적인 회의, 불신에서 기인한 것이며 두 존재 사이에 근본적인 합치의 어려움을 몸으로 보여준 경우라 생각한다. 전자가 종교적 해결이라면, 이것은 실존적 해결, 아니 이런 말도 가능하다면 세속적 해결이다.

2. 보증

나는 어떤 해결이 낫다는 것을 말하려는 것이 아니라 두 해결 방식이 다르다는 점을 지적하는 것이다. 순교는 타살의 형식을 빌린 자살이기도 하고 자살은 자살의 형식을 빌린 타살이기도 하다. 여기에 근본적 차이가 있다고 말하기는 어렵지만 사도들의 보증이 초월성에 기댄 것이라면, 프리모 레비의 보증은 그렇게 분명하지 않다. 나는 이 지점에서 서경식이 매우 중요하고 어려운 실존적 해결, 혹은 세속적 해결에 대한 보충을 제안하고 있다고 생각한다. 

서경식은 단순하게 말하지 않는다. 요컨대 서경식의 증언은 마찬가지로 외부에 대한 감각, 인간성에 대한 근원적 신뢰가 존재하기 때문에 가능한 것이다. 그러나 그는 '민중들을 믿는다'라던가, '인간은 근본적으로 선한 존재이다'라는 식의 믿음이 아니며, 이것은 프리모 레비나 사도들에게서나 모두 마찬가지이다. 사도들은 인간을 죄인으로 인식했고, 프리모 레비는 인간을 인간을 절멸하기도 하는 자로 인식한다. 그 점이 서경식에게서도 달라지는 것은 아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때 서경식이 인간성에 대한 근원적 신뢰가 있다함은 인간이 자신의 존재를 상대화 시킬 수 있는 존재라는 점, 이것이 지와 덕의 내용을 본질적으로 구성하는 내용으로 이해하고 있다는 점에서 기인한 것일 테다. 

'우리 자신을 상대화 시킨다'. 이것은 자신이 태어난 고향을 의심하는 것과 자신의 국가를 의심해 보는 것, 자신이 머물고 있는 장소와 시간을 의심하는 것과 다르지 않고이것이 '디아스포라'의 삶의 양식이기도 하다. 서경식의 말을 빌어, 국민국가에서 규범은 우리 자신의 생활 세계의 규범과 일치하지 않으며 이 양자 사이의 틈새가 있다. 이 틈새는 상대화가 만들어낸 공간이다. 사도들의 증언은 민족, 국가를 민족도 없고 국가도 없는 하나님 나라로 상대화하는 것이다. 사도들이 증언할 수 있었던 가능 조건이 '외부'였으며 이 외부에 대한 보증이 초월적 신에 대한 '믿음'에 있었다면, 서경식이 증언할 수 있는 가능 조건은 '외부/타자'에 있으며, 이 외부가 스스로를 상대화 시킬 수 있는 존재라는 '믿음' 에 있다. 어떤 의미에서 후자의 믿음은 전자의 믿음을 포함하기도 하는 것인데 왜냐하면 신에 대한 믿음은 우리 인간 존재 자체를 상대화 하기 때문이다. 

서경식은 자신이 민중을 믿지 않지만, 민중을 믿는다고 한다. 요컨대 민중에 희망이 있다고 믿지 않지만, 장우산대를 들고 진압대를 꾸짖는 할머니(민중)는 믿는다고 한다. 신이 인간 존재를 선하다고 보증하지 않아도 된다. 신이 인간 존재 자체를 상대화해주는 것만으로 충분하다. 우리가 인간성 자체가 선한 것이라고 믿지 않아도 된다. 인간은 본래 스스로를 상대화하는 존재라는 믿음만으로 충분하다. 스스로를 상대화 시키고, 고향을 의심하고, 자신이 정주하는 곳을 떠날 수 있다는 것. 장우산대를 든 할머니가 희망이 된다. 신성로마제국 시민이 하나님 나라 시민으로 자신을 바라보게 되는 것이 새로운 희망을 낳는다. 이러한 인간성에 대한 믿음이 증언을 가능하게 한다.

3. 외부

서경식은 인용한 부분에서 '외부', '바깥'을 애매하게 사용한다.

그의 외부는 증언의 가능 조건이라는 면에서는 '타자'이며 공간의 밖, 시간의 밖을 의미하기도 한다. 시간의 외부는 신학적 의미에서 '종말론적 대망'을 의미할 것이며 공간의 외부는 '하나님 나라'일 것이고 나의 외부는 '타자'일 것이다. 인용부의 밑줄 친 부분에서 '본래의 인간성을 몸에 익히고 있는 인간들은 어딘가에 틀림 없이 있다'의 의미하는 바이다. 서경식은 이러한 가정을 해야만, 내 식으로 표현하자면 이 가정을 믿어야만 '외부'가 있게 되는 것이라고 한다.



동시에 서경식의 '외부'는 그 내용상 '틈새'를 의미하기도 하는 것으로 읽힌다. 나는 나의 평안이 나의 고향에 있다고 생각하지 않는다는 말을, 고향 밖에 나의 고향이 있다고 말하는 것으로 이해하는 자가 있다면 그는 데리다적 의미에서 존재론적 틀 속에 갇혀 있는 것이다. 고향을 의심하는 자라면, 고향 밖도 의심하기 마련이다. 고향과 고향 밖의 외부는 그런 의미에서 고향도 고향이 아닌 곳도 아닌 '어떤 곳'이다. 바로 이 곳이 외부이자 경계이며 유령적인 것이며 이 곳에 있는 사람을 두고 우리는 '디아스포라'라고 부른다. 생각해보라. 실향 유대인들의 고향은 더 이상 이스라엘이 아니며, 태어난 곳도 아니고, 마찬가지 서경식의 언어적 기원은 조선어도 아니고, 조선어가 아니기에 일본어가 되는 것도 아니다. "진실은 언덕 너머에 있다". 그런 까닭에 인용부의 밑줄 친 부분에서 '본래의 인간성을 몸에 익히고 있는 인간들(외부)이 있다고 상정하지 않으면 '외부'는 있을 수 없는 것입니다. 외부를 가정해야만 외부가 있을 수 있기에 증언이 가능해지고, 그 때 우리는 이 외부가 열어주는 진정한 외부, 열림으로 들어가게 된다. 신성로마제국은 세속국가의 외부이지만 진정한 하나님 나라는 그 어디에도 속하지 않는 것이며 동시에 그 어디에도 있는 것처럼 말이다.

지금 바로 쓴 문장의 두 외부가 다른 의미의 '외부'임을 인식한다면 서경식의 '외부', '바깥'은 시간, 공간을 것이 아니라는 점에서 초월적이며, 이 때의 초월성이 신학적인 의미의 신이 아니라는 점에서 동시에 내재적이다. 즉 초월적 내재, 혹은 내재적 초월이다.

인간성의 근거를 어디에서 찾아야 하나? 다아스포라는 디아스포라가 아닌 나 자신과 무슨 연관이 있나?

국민의 외부는 논한 바 외국인이 아니며 디아스포라라는 점에서 디아스포라는 나 자신과 무관하지 않고,
우리 자신을 상대화한다는 점에서 인간성의 근거라 해야 할 것이다.




  • 부산대 인문학연구소 주최, <세계시민주의-디아스포라>라는 주제로 서경식 선생(이하 서경식)의 강연이 있었다.  서경식은 다른 발표자와는 달리 그 자신 디아스포라로서 초대받았고, "디아스포라로서 산다-어느 재일조선인의 경험으로부터"라는 제목으로 발표했다.
    강연의 전반부는 NHK 교육방송에서 지난 2007년에 방영된 프로그램을 감상하는 것으로, 후반부는 질의응답으로 이뤄졌다.


덧글

  • 零丁洋 2013/02/22 09:56 # 답글

    너무 진지하면서도 너무 격렬하군요.

    '바위섬'이라는 가요가 떠오릅니다. 그냥 그런 노래라 생각했는데 5.18을 격은 광주의 노래라고하더군요. 바위섬은 끊임없이 타자를 희구하는 것 같습니다. 5.18은 지났지만 아우슈비츠에서 해방된 유태인처럼 절망에서 타자를 찾는 모습입니다. 하지만 우리의 인간성은 그들의 타자로 응답하지 못하고 그런 우리의 잃어버린 인간성이 다시 그들을 절망하게 하는 것 같습니다.

    프리모레비는 아우슈비츠 보다 해방된 후 더 절망한 것 같습니다. 덕과 지! 우리의 허위와 무심을 찌르는 비수같군요.
  • 철학본색 2013/02/22 12:43 #

    진지한 댓글에 감사합니다. 바위섬이 그런 의미가 있는 노래였군요.허위와 무심.. 저는 허위보다도 위악적이며 무심하기 보다 냉소적인 것은 아닌가 모르겠습니다. 고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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