몰락하기 쉬움(영민햄) by 철학본색

몰락하기 쉬움

상처 받기 쉬움(la 
 vulnérabilité)

, 프랑스의 현상학자 레비나스에 따르면  이것은 인간성의 본질에 해당하는 것이다. 



레비나스는 인간 신체의 다른 부분과 달리 살갗이 그대로 노출되고 폭로되어 있어 상처나 상해에 대해서 아무런 방비 없는 상태의 ‘얼굴’을 인간 주체의 ‘개방성’을 가리키는 것으로 이해했다. 그에 따르면 인간의 개방성은 노출된 살갗이 상처받을 수 있음을 의미하며, 이는 아무런 방비 없이 적의 위협에 노출된 상태와 유사하다. 레비나스에 따르면 주체는 상처 받을 수 있기 때문에 타인을 위해 고통 받을 수도 있고, 타인의 짐을 대신 질 수도 있다. ‘상처 받을 수 있음’은 그런 의미에서 단지 수동적이기만 한 것이 아니다. 오히려 우리는 ‘적극적으로’ 상처 받을 능력이 있는 존재이다. 이것이 타인의 짐을 대신 질 수도 있는 책임 있는 주체, 소통하는 주체의 자리에 설 수 있게 하는 것이다.

그런데 우리 문화는 상처 받기에 적극적이기는 고사하고 일체의 모든 상처를 회피하려는 강박관념에 지배받고 있다. 상처 받을 수 있는 능력은 강조되지 않는다. 오로지 상처를 받지 않을 수 있는 능력이 우리 시대가 요구하는 강인한 인간상의 덕목이다. ‘상처 받지 않을 능력’은 상처를 상처가 아닌 ‘흠집’으로 대하는 태도에서 기인한 것이다. 

이 때 ‘흠집’은 자본이나 노동력의 투입 없이는 결코 스스로 회복될 수 없는 손상을 의미한다. 우리 주변의 환경 세계는 결코 스스로 회복될 수 없는, 즉 자연 재생력이 없는 흠집 나는 물건들로 가득 차 있다. 이것은 대부분의 상처가 자연의 거대한 순환에 의해 회복된다는 사실과 대조적이다. 바람이 불면 꽃은 떨어지고, 나뭇가지가 부러지기도 하지만 자연은 그 모든 것을 회복시킨다. 레비나스가 책임으로서의 ‘상처 받을 수 있는 능력’을 강조한 것은 만물을 회복시키는 자연의 힘에 대한 믿음을 전제로 한 것인지도 모르겠다. 인간은 상처를 받기도 쉽고, 상처를 적극적으로 받기도 하지만 결국 자연은 우리를 치유하고 원 상태로 되돌려 놓을 것이다. 

그러나 생태하천, 생태공원조차 인공적으로 만들어지고 유지되는 현실에서 자연의 거대한 회복력을 경험할 기회는 많지 않다. 그 때문에 사람들은 흠집이 아닌 상처조차도 회복될 것으로 믿지 못하고, 상처와 흠집의 차이도 제대로 보지 못한 채 흠집에 대한 강박관념에 시달리게 된다. 이것은 변화에 대해 거부하며 현실에 안주하려는 정적 관념만을 갖게 한다. 좋은 디자인의 손전화기를 골라 놓고서도 그 디자인보다 못한 케이스를 씌워 놓고선 한 번도 벗기지 못한다. 손전화기에 흠집이 나면 마음에 흠집이라도 난 것 같다. 이런 강박관념 속에서라면 인간은 자연의 순환이 가져오는 어마어마한 치유력은 잊은 채 살아갈 수밖에 없다. 

그렇기에 비슷한 심적, 신체적 고통을 가져오는 사건이라도 상처에 해당하는 것과 흠집에 해당하는 것은 구분된다. 2011년 3월 11일 오후 2시 46분, 후쿠시마 제1원자력발전소에 중대사고(severe accident)가 일어났다. 후쿠시마에서 일어난 원전 사고로 인한 피해는 상처에 해당하는 것인가, 흠집에 해당하는 것인가? 후쿠시마에서 일어난 중대사고는 원전 앞에서는 상처이니 흠집이니 하는 구분 자체가 무의미하다는 것을, 즉 원전이 자연에 행사한 폭력의 결과는 흠집이나 상처로 말할 수 없는 ‘부조리’ 그 자체임을 확인시켜 준 것이 아닌가. 후쿠시마 원전 사고로 아무 방비 없이 그 살갗이 방사능에 노출된 후쿠시마 인근 지역 주민과 생태계는 상처를 입은 것인가, 그들에게 흠집이 생긴 것인가. 이 중대사고는 자연의 거대한 순환에 돌이킬 수 없는 파괴를 가져왔다는 점에서 상처의 범위를 초과하는 것이다. 

또한 그 어떤 자본도, 노동력과 기술도 중대사고가 가져온 이 ‘절대적 파괴’를 돌이킬 수 없다는 점에서 흠집의 범위도 초과한다. 후쿠시마 이후 원전 앞에서는 상처도, 흠집도 모두 무의미하다. 발전도, 성장도, 변화도 무의미하다. 이것이 원전에 대한 근본적인 재고찰이 필요한 이유이다.

일본의 정치사상가 후지타 쇼조(
藤田 省三)의 말을 빌어 원전이 존재할 수 있는 전제 조건을 말하자면, 우리 모두가 공모하고 있는 ‘안락을 위한 전체주의’라 할 수 있을 것이다. 우리는 ‘안락함’, 곧 더운 날의 쾌적함, 추운 날의 안온함을 절대화 시킨 채 불편함을 일소하는 것만을 맹목적으로 추구하는 파시즘에 빠져 있는 것인지도 모른다. 원전이 지역경제의 활성화를 가져왔다는 것은 사고 시 그 지역이 가장 큰 희생자가 될 수 있다는 사실을 은폐시키는 교묘한 선전이 아닌가. 중년의 나이에 비관론자가 된 후지타 쇼조는 한 사회를 새롭게 재생하기 위해서는 ‘몰락의 경험’이 필요하다고 했다. 그에게 몰락이란 ‘사물의 기초에 도달하는 것’이다. 몰락은 그런 의미에서 ‘고통스러운 기회’라고도 할 수 있다. 일자리, 전력 수급을 위해 원전이 필요하다는 논리는 상처를 피하기 위해 ‘흠집의 가능성’만을, 흠집을 피하기 위해 ‘몰락의 가능성’만을 받아들이는 것과 마찬가지다. 원전 시스템 하에서 인간인 우리는 ‘상처 받기 쉬운 존재’라는 본질적 가능성조차 위협받고 있다. 대신에 방사능 시대에 새로운 인간성의 본질이 자리 잡았다. ‘몰락하기 쉬움’, 바로 그것이다.

 "대구에 가서"

 긴 겨울 벌판에 눈이 내리고 
 기우는 집들의 바람벽 봉창마다
 불빛이 졸고 있을 때
 너는 그것이 따뜻함이라고 말했다.
 나는 말없이 
 너와 나의 어깨 사이로 내리는 눈을 보았고
 마음 깊이 
 아니, 그것은 고통이라고 거부했다 (김진경의 시)


더운 날의 쾌적함, 추운 날의 안온함, 불편함의 해소에 대해..
"아니, 그것은 고통이야"라고 말할 수 있는가. 그것이 신앙이고, 래디칼이라는 것을 이 시는 가르쳐 주고 있다.
따뜻함, 그것은 고통이다. 몰락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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