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마트폰-내-존재
여기 망치가 있다. 망치는 못을 박기 위한 도구다. 망치는 벽에 못을 박기 위해 내 곁(bei)에 있다. 벽에 박힌 못은 그림을 걸기 위한 것이다. 나는 그림으로 집안의 분위기를 좀 더 아름답게 만들고 싶다. 아름다운 집안의 분위기는 나를 편안하게 쉬도록 도와줄 것이다. 그럼 나는 왜 편안하게 쉬기를 원하는가? 그것은 일터에서 더 열심히 일하기 위해서다. 나는 일을 통해 나의 이상을 실현하려고 한다. 나는 나의 이상을 실현함으로 나의 가능성을 실현하고자 한다.
하이데거(M.Heidegger)는 망치가 못을, 못이 그림을, 그림이 집안의 분위기를 지시하는 것(Verweisen)을 두고 도구지시연관이라고 부른다. 사람들은 대개 일상 속에서 망치를 ‘분석’의 방식이 아니라 손에 들고 ‘접촉’하면서 만난다. 세계는 이러한 도구 간 연관의 총체이며 우리는 도구와 접촉하며 살아가고 있다는 점 때문에 하이데거는 인간을 ‘세계-내-존재’ (In-der-Welt-sein)라고 한다. 인간은 세계-내-존재이기에 “망치로부터 나의 가능성 실현”으로까지 이어지는 이와 같은 도구들 간의 지시 연관, 또한 이러한 연관이 만들어 내는 의미 연관의 총체성을 일상 속에서는 거의 인식하지 못하고 살아간다.
현대인들의 손에는 망치 대신 ‘스마트폰’이 들려져 있다. 사람들은 하루에도 수십 번씩 스마트폰을 자신의 눈 앞으로 소환하며 이 기계가 만들어 내는 도구지시연관 ‘속에서’ 살아가고 있다. 스마트폰에서 페이스북에서 누군가와 관계를 맺고, 구글에서 정보를 취합하고, 유튜브로 여가를 즐기는 것이 가능해졌다는 것은 디지털이 우리의 관계와 관심, 여가의 형식을 규정하기 시작했다는 것을 의미한다. 망치, 책 심지어 교회나 학교조차도 스마트폰처럼 자아, 관계, 시장, 여가 등 인간 삶의 거의 전분야를 형식적으로 규정해 내지는 못했다. 그런 의미에서 이미 스마트폰은 도구들 간의 지시 연관 속에 있는 망치 같은 도구가 아니다. 스마트폰은 하나의 세계다. 따라서 현대인이 ‘세계-내-존재’라는 말은 곧 ‘스마트폰-내-존재’라는 말과 같다.
하이데거는 ‘세계-내-존재’라는 말로 인간이 세계 속에‘빠져 있음’을 말하고자 했다. 도구지시연관의 총체라 할 수 있는 세계 속에 빠져 사는 인간은 일상 속에서 세계가 이와 같은 도구 연관, 의미 연관을 가진다는 사실을, 또 거기서부터 자기 자신이 규정되고 있다는 사실을 거의 인식하지 못한다. 그러나 술에 빠져 지내는 사람이라도 술이 떨어지면 일시적으로 자신이 취했다는 사실을 인식하게 되듯이 망치 자루가 빠져 있을 때에야 비로소 우리는 망치가 지시하고 있는 다른 도구와의 지시 연관성을 파악할 수 있게 되는 것이다.
‘스마트폰-내-존재’ 역시 디지털 세계에 의해 자신이 규정되고 있음을 거의 깨닫지 못한다. 나의 관계, 관심, 여가 등이 디지털 기술이 제공하는 형식에 의해 형성되고 있다는 사실을 깨닫는 때는 스마트폰 배터리가 방전되거나, 스마트폰을 집에 두고 나왔을 때 정도이다. 예를 들면 나는 더 이상 아날로그적 도구들, 일기-파티-책이 아닌, 트위터-카카오톡-네이버와 같은 스마트폰 속에 존재하는 도구지시연관 속에 존재한다. (일기가 아닌) 몇 명의 팔로우가 있는지에 따라 내가 규정된다. (파티가 아닌) 카카오톡의 친구 추천으로 새로운 관계가 생겨난다. (책이 아닌) 포털 사이트가 노출시키는 뉴스에 따라 관심 방향이 달라진다. 스마트폰이 방전되고 더 이상 SNS와 포털에 접근할 수 없을 때에야 나 자신이 ‘스마트폰-내-존재’임을 발견하게 된다.
그래서 자발적 ‘고장내기’, 자발적 ‘방전하기’로서의 디지털 디톡스는 스마트폰-내-존재에서 벗어나 아날로그의 세계로 가는 여행이라고도 할 수 있다. 가끔 떠났던 외국 여행에서 나 자신을 만나고, 아내와 손을 잡고 많은 대화를 나눌 수 있었던 것은 그곳이 이국이었기 때문이 아니라 어쩌면 그 곳이 와이파이도 안 잡히고, 충전도 하기 어려웠던 곳이었기 때문이리라. 스마트폰이 방전되고 나면 아름다운 풍광을 만나도, 가장 소중한 사람의 모습도 카메라로 견딜 수 없다. 대신 온 몸으로, 기억을 더듬어 좋은 시 한편과 노래 한 곡으로 이 아름다움을 기억해야 한다. 다시 말하건대 그 곳에서 아이가 더 예쁘게 보였던 것은, 그 산과 바다가 아름답게 보였던 것은 그 곳이었기 때문이 아니라 어쩌면 스마트폰이 꺼져 있었기 때문이었는지도 모른다. 하이데거가 나의 가능성, 나의 이상을 실현하기 위해 일을 하고, 안식을 하고, 그림을 걸고, 벽에 망치로 못을 박는다고 했던가. 아니, 어쩌면 우리의 가능성의 실현은 어쩌면 도구를 사용하는 것에 있지 않고 도구를 사용하지 않는 것, 즉 디지털 디톡스에서 가능하게 되는 것이지 않을까.
The BC, 2014년 4월호에 쓴 칼럼, 권영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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