말하는 건축 시티:홀 (City: hall, 2013) by 철학본색

말하는 건축 시티:홀 (City: hall, 2013)
정재은 감독.

City: Hall과 City: Hole 사이


1) 서울 시청 신청사와 관련해 그간 많은 비판이 있었다. 이 영화는 신청사에 대한 뒷이야기들을 담고 있다. 애초 선정되었던 설계안이 문화재청의 반발로 무효화된 사정, 현재와 같은 모습의 청사를 설계한 유걸 건축가가 뒤늦게 합류할 수밖에 없었던 상황, 심사 과정에서 가장 중요하게 고려되었던 요소들, 시공사-설계사-서울시 간의 갈등 요소들 등등.



2) 신청사 컨셉 디자인 2등안을 제출했던 박승홍 건축가의 변이 인상적이었다. "서울시에서는 이 신청사가 대단한 아이콘과 상징이 되길 바라는데 그게 잘못이 아닌가". 그러니까 박승홍 선생은 시민들이 생각하는 서울시청 구청사 건물에 대한 이미지가 존재하는데 '상징성이 있는 아이콘'으로 신청사를 요구하면 이미지가 충돌할 수밖에 없음을 지적하는 것이다. 그에 따르면 시청 건물은 시청 직원들이 업무를 처리하는 오피스이고, 오피스라면 오피스답게 세워져야 한다. 그래서 그가 제안한 형태는 마치 서울역 앞 대우빌딩을 좀 더 친환경적으로 표현한 것 같아 보이는 디자인이었다.(위 사진) 박승홍 선생의 의견에 공감이 간다.


3) 유걸 건축가가 제안한 현 청사는 처마를 현대적으로 재해석한 것이었다고 한다. 사람들은 쓰나미 디자인, 외계 건물이라 혹평하고, 영화에서 연대 황상민 교수와 같은 사람들은 신청사가 일종에 '공공에 대한 테러'라고 평했다. 심지어 심사위원들 다수는 박승홍 선생의 2등안이 건축적으로 보다 더 뛰어난 것으로 평가했다고 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유걸 선생의 컨셉이 최종 선정된 이유는 서울시의 요구, 즉 하나의 아이콘으로 기능하려면 그의 컨셉이 보여주는 존재감 정도는 있어야 한다는 데 동의했기 때문이라고 한다. 그러니까 건축가 내지 건축학자들로만 구성된 심사 위원들의 기준이 '건축 자체'가 아니라 클라이언트의 요구였다고 할 수 있다. 클라이언트, 즉 서울시의 요구에는 이유가 없었지 않았을 것이다. 역사적 건축물로 길이 남을만큼 '상징성'을 갖지 못하면 그것 역시 악평을 받기는 맨 마찬가지였을테니까. 그래도 시공사나 건축가가 클라이언트의 요구를 무시할 수는 없을 수 있다 해도 심사위원들의 기준이 '건축 자체'에 있지 않았다는 점은 아쉬운 부분이다. 굳이 그럴 것이라면 심사위원들이 굳이 왜 필요했을까. 다시 말하건대, 이해는 간다. 그래도 아쉽긴 아쉽다.



4) 영화에서는 신청사 건축이라는 대역사에 첫단추가 잘못 끼워진 것이 큰 문제였다고 지적한다. 소위 일괄발주 방식인 '턴키'. 이로 인해 건축 과정에서 너무 많은 사공이 들어오게 되었고, 서로의 이해관계가 상충되면서, 예컨대 건축가의 요구, 서울시청의 요구, 준공 시한을 맞추려는 시공사의 요구 등등이 부딪히면서 시청사에 대해 건축 주체 어느 누구도 만족할 수 없는 상황이 되고 말았다고 한다. 신청사에 대한 시민들과 평자들이 갖는 부정적 견해도 어쩌면 이것이 최초의 원인이 된 것인지도 모른다. 그래서 감독은 신청사를 '사생아'와 같은 처지라고 이야기하는 것이다. 유걸 선생이 영화 말미에 관계자들을 하나 하나씩 찾아가 '미안하다'고 인사하는 데에는 그런 상황 탓이라 볼 수 있을 것이다.



5) 감독은 신청사가 '사생아'이기 때문에, 그 사실을 알면 우리가 연민의 눈으로 이 건축물을 바라볼 수 있게 될 것이라고 한다. 그렇게라도 바라봐야 하는 이유는 그것이 공공건축에 대한 이해와 관심을 보다 고조시킬 것이기 때문이다. 신청사를 멜랑콜리(연민)의 시선으로 바라보면 앞서에서 이야기했듯이, 이 건물은 우리의 욕망이 뒤얽혀진 집합체, 부조화된 우리의 실존으로 나타난다. 그러니까 박승홍 건축가나 조민석 건축가의 컨셉처럼 주변과의 조화나 묻어가기(위 사진), 류춘수처럼 오래된 것을 지키려는 태도(아래 사진)는 우리 실존의 로직이 아니다. 서울시는 그런 우리의 실존의 요구에 따라 압도하고, 튀고, 새로워 보이는 건축물을 우리 앞에 선보였다. 

공공건축은 그런 의미에서 우리의 실존을 반영하고 있는 살아있는 은유이다. 그러나 건축이 우리의 삶의 은유 혹은 알레고리라면, 좋은 은유는 나의 삶과 서정을 다른 방향으로도 이끌어갈 수 있어야 한다. 그렇기 때문에 은유적인 글이든 은유로서의 건축물이든 공공건축에 대해 더 많은 관심과 이야기를 해야 할 필요가 있다. 공공건축이 시민들의 공적 삶의 반영이자 동시에 재조직화하는 창출의 공간으로도 기능해야 하기 때문이다. 서울시청 신청사가 단지 '반영'일지 보다 '좋은 은유'로 더 나은 역할을 수행할지는 이제 지켜 봐야할 일이다. 가혹한 비난을 퍼 붓기 전에 '연민'의 시선이 필요하고, 그것이 공공건축에 대한 관심을 촉발시킬 것이라는 감독의 변이 와닿는다. 영화 제목이 "말하는 건축 시티:홀"도 신청사가 담고 있는 이중적 가능성을 담고 있는 것으로 이해해볼 수 있다. 시티홀은 시민들의 광장(city-hall)이 될 것인가, 위화감만 조성하는 괴이한 공간(city-hole)이 될 것인가. 그렇기에 영화는 공공건축을 둘러싼 다양한 이슈들만큼은 입체적으로 잘 보여준 듯하다.



6) 나는 서울시청 신청사에 대해 어색하다고 여겨왔다. 그건 그냥 내 느낌이다. 그래도 우리 집 옆에 선 아무 이슈도 되지 못하는 공공도서관이나 폭력적으로 사람들의 경관을 압도하며 마음껏 드나들 수도 없는 내가 사는 집에 비하면야, 아니 솔직히 말해 대부분의 시청사 건물에 비해 가치 있어 보인다. 요즘은 어딜가나 시가 운영하는 문화예술회관의 모습이 비슷하다. 오히려 존재 자체가 문제가 되고, 질문이 되는 건물은 흔하지 않다. 그렇기 때문에 이 건물에 대해서 성공하지 못했다거나 실패했다고만 말할 수는 없을 것 같다. 글서 시청사는 나쁜 건축물이나 못난 건축물이라기 보다 불쌍한 건축물, 미안한 건축물이라고 해야 한다.


7) 마지막으로 영화 자체에 대한 것인데, 영화를 한번만 봐서는 놓쳐 버릴 수 있는 관계자들의 말이나 장면들이 너무 많다. 그러니까 여러 사람들의 말이 관객들에게 제대로 전달이 되지 않는다. 자막에 익숙해져버린 내 탓인지, 녹음의 문제인지 잘 모르겠다. 그리고 이 영화가 하나의 다큐이고자 했다면 단순한 시간적 서사보다 서사의 재배치가 필요할 때도 있었음을 생각했어야 하지 않을까 싶다.


영화 말미 개청식에 유걸 선생을 포함한 시공, 감리, 설계 등 실무를 담당했던 이들은 내빈석에 앉지 못하고 한쪽의 멍석에 가 앉아 있어야 했다. 신발을 벗고 앉아야 할지, 신고 앉아야 할지.. 그런 고민이 될만큼 실무자들에게도 개청식은 어색한 공간이었다. 유걸 선생이 나는 이 건물의 설계자라고 해도 안내원은 멍석에 가 앉으라고 한다. 대신 내빈석에는 외국 손님들로 가득찼다. 어쩌면 그것이 물건을 만들어 파는 자에 대한, 아니 공공 건축에 대한, 아니 건축에 대한, 아니 공공에 대한 우리의 태도를 보여주는 장면은 아닌지 모르겠다.(이 일과 관련된 중앙일보 기사. 

(http://article.joins.com/news/article/article.asp?Total_ID=4675067)


오마이뉴스 관련 기사 링크.

http://www.ohmynews.com/NWS_Web/View/at_pg.aspx?CNTN_CD=A00019333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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