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색: 레비나스 읽기] <시간과 타자> 네번째, 다섯번째 모임 후기 (김영선 정리) by 철학본색

- 에마뉘엘 레비나스 -

  인간은 육체를 가진 존재입니다. 인간이 주체로서 일어설 수 있으려면 육체가 보존되어야 합니다. 그 육체의 존재를 지탱하기 위해서는 물질적 기반이 필수적입니다. 그러한 물질적 기반을 갖추는 원동력은 노동입니다. 하지만 노동이라는 행위를 통해 육체와 주체의 유지만이 이뤄지지는 않습니다. 노동의 과정은 필연적으로 고통스러운 과정입니다. 그러한 고통은 정신적인 고통일수도 있고 육체적인 고통일 수도 있습니다. 레비나스는 육체적인 고통을 중심으로 이야기합니다. 인간이 경험하는 육체적인 고통은 그것을 전가할 수도 없고 회피할 수도 없습니다. 마치 아담과 하와가 에덴 동산에서 쫒겨난 후 척박한 땅을 일구어야 하였듯 인간이 일생을 통해 경험하는 고통은 숙명적인 것일지도 모릅니다. 이러한 고통의 속성은 죽음의 그것과도 연결됩니다. 레비나스는 인간과 주체가 존립하기 위한 물질적 기반을 만드는 과정인 노동에서 노동을, 노동에서 고통을, 고통에서 죽음이라는 주제를 이끌어 냅니다. 인간이 가진 이성으로는 죽음에 대해서 파악할 수 없습니다. 죽음이라는 것이 어떠한 사건인지, 과연 내가 언제 죽을 것인지, 그리고 죽음 이후는 어떠할지 인간은 전혀 알 수 없습니다. 결국 죽음이란 사건 앞에서 인간의 이성은 영향력을 상실하게 되고 인간은 수동적인 존재가 됩니다. 그리고 자신의 이성으로 파악할 수 없는 죽음 앞에서 절망하게 됩니다. 하지만 레비나스는 죽음이란 사건을 그저 부정적인 것으로만 묘사하지는 않습니다. 셰익스피어의 비극 <햄릿>에 등장하는 주인공 햄릿은 자신 앞에 놓인 비극적인 운명에 절망하지만 그 속에서도 자신을 세우고 무엇을 해야 할 지에 대하여 결연한 의지를 다집니다. 결국 죽음이란 사건 앞에서 인간은 절망할 수도 있지만 그것을 받아들이고 다른 가능성으로 나아갈 수도 있는 것입니다.

  유수의 철학자들이 생존에 대하여 논하였지만 죽음에 대하여 논한 경우는 그리 많지 않습니다. 레비나스는 죽음이라는 명제를 꺼낸 이유는 무엇이었을까요? 우리는 레비나스가 홀로코스트의 생존자였음을 상기할 필요가 있습니다. 1930년대부터 1945년까지 독일의 국가사회주의자들은 유태인을 비롯한 수많은 사람들을 비인간(Untermensch)으로 격하시키고 그들을 ‘체계적’으로 학살하였습니다. 그로 인한 결과는 궤멸적이었습니다. 한나 아렌트가 지적하였듯이 국가사회주의자들의 범죄 앞에서 피해자들조차 그 사이에서 윤리와 도덕을 배반하는 선택을 강요받았으며 그러한 과정 속에서 전세계의 윤리와 도덕이 붕괴되는 것을 목도하여야 했습니다. 그러한 역사의 수레바퀴 속에서 레비나스는 간신히 살아남았고 그가 보기에 국가사회주의자들에 의해 붕괴된 윤리와 도덕을 재건하는 것이 급선무였습니다. 이를 위해서 레비나스는 죽음이라는 명제를 통해 국가사회주의를 비판하고 윤리를 재건하려 한 것으로 보입니다.

  레비나스는 죽음에서 다시 한번 다른 명제를 도출합니다. 바로 타자입니다. 상술하였듯이 죽음이라는 사건은 인간의 이성으로는 설명할 수 없는 무언가입니다. 인간의 이성으로 설명할 수 없음이라는 속성은 타자성이라는 단어로 설명됩니다. 여기서 다시 죽음이라는 사건을 꺼내 봅시다. 죽음이라는 사건은 왜 타자성을 가질까요? 죽음이라는 사건은 죽음 그 자체를 파악할 수 없기 때문이기도 합니다. 하지만 죽음이 가지는 또 다른 속성을 아직 우리가 파악하지 못하였습니다. 우리에게 죽음이란 사건은 미래에 올 일입니다. 하지만 그 미래가 언제 올지 우리는 알지 못합니다. 죽음이 타자성을 가지는 것은 죽음 그 자체를 우리가 모를 뿐만 아니라 시공간적으로 유리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죽음에서 도출된 타자성은 인간 대 인간의 관계로 이어집니다. 주체의 반대편에 서 있는 타자는 우리가 알 수 없는 존재입니다. 주체는 이성으로 타자를 파악하려 하지만 이성이 가지는 물질성으로 인하여 타자의 표상만을 바라볼 수 있을 뿐입니다. 하지만 이성만이 존재한다면 주체와 타자는 관계를 가질 수 없습니다. 주체와 타자는 이성과는 다른 방법으로 관계를 맺고 타인의 관계로서 마주할 수 있습니다. 그러한 방법의 대표적인 것이 에로스적 방법이입니다. 이에 대해서는 아래에 서술하겠습니다.
주체는 타자가 가지는 타자성 앞에서 수동적인 관계를 맺게 되는 상황에 맞이할 수 있습니다. 그러한 상황 속에서 주체는 타자의 타자성에 굴복하지 않고 인격적 과제를 유지하려 하게 됩니다. 이를 위해서는 이성과는 다른 방법을 사용할 수밖에 없습니다. 우리가 타자성을 가진 존재 앞에서 이성 이외의 방법으로 관계를 맺어야 한다는 것은 새로운 것이 아니라 역사 및 사회적 맥락 속에서 변증법적인 사고를 통해 드러난 것임을 감안하여야 합니다.

  레비나스는 이성을 통한 관계 맺기를 남성적인 관계로 규정하고 그 반대에서 타자성을 전제로 규정되는 관계 맺기를 여성적인 관계로 규정하였습니다. 남성 대 여성으로 대극 관계를 규정한 것은 반여성적인 입장에서 이를 규정한 것이 아닙니다. 남성 대 여성 구조는 서로 상이한 방법론을 비교한 것이기도 하며 관계의 다양성을 설명하는 것이기도 합니다. 여성적인 관계의 방법으로 제시된 것이 에로스적 관계입니다. 에로스적 관계는 이성이 아닌 다른 방법으로 타인과 마주하는 방법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에로스적 관계 속에서 자유 대 비자유의 구도는 존재할 수 없으며 그렇다고 해서 에로스적 관계 속에서 인간의 이성이 완전히 사라지는 것은 아니지만 그렇다고 해서 그것으로 인하여 타인을 종속시킬 수 있는 것도 아닙니다. 이러한 관계는 이성으로 설명할 수 없는 것이지만 이성으로 설명할 수 없다고 해서 존재하지 않는 것이 아니며 신비의 영역 한 쪽에 존재하고 있음을 인정해야 합니다. 에로스적 관계를 통해 나와 타인은 서로 섞이지 않으며 오히려 양자의 존립이 더욱 강화되게 됩니다.

  에로스적 관계를 통해서 성립되는 나와 타인의 관계 속에서 생산되는 결과물이 있습니다. 바로 자식입니다. 자아는 자기 자신을 바라볼 수 없습니다. 자아가 가진 이성은 자아에게로 환원하는 특성이 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자아는 자기의 자식을 통해 자아를 바라볼 수 있습니다. 자식은 타인이자 자아이기 때문입니다. 자식이 타인이면서 자아일 수 있는 것은 존재가 가지는 다원성과 추월성에 기인합니다. 결국 자아는 에로스적 관계를 통해 자식을 낳음으로써 물질성에 묶인 자아의 관계로부터 초월할 수 있습니다.

  지금까지 두 달 여에 걸쳐 레비나스의 저서 <시간과 타자>를 읽어 보았습니다. 여러 시행착오가 있었지만 레비나스가 자신의 텍스트를 통해 무엇을 말하고 싶어하였는지 그리고 그것이 우리에게 주는 의미가 무엇인지 생각해 볼 수 있는 기회가 되었습니다. 앞으로도 여러 책들을 통해 우리의 삶과 세계가 가지는 의미와 구조에 대해서 더욱 깊이 탐구할 수 있도록 하겠습니다.

덧글

  • 포도젤리 2014/12/03 09:47 # 답글

    몇번이고 읽어보았지만 어렴풋한 의미의 실루엣 밖에는 보이지 않았는데 이런 의미로 읽을 수 도 있다는걸 보고 기뻐하며 갑니다. 좋은 글 감사해요.
  • 지나가다가... 2015/06/17 15:46 # 삭제 답글

    시간과타자라는 책을 읽고있는데 생각보다 쉽지않네요... 그러던 중에 이 게시글들을 보게되었는데 책을 이해하는데 많은 도움이 되었습니다.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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