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물의 예술, 예술의 선물 - 리크리트 티라바니자 by 철학본색

선물의 예술, 예술의 선물
리크리트 티라바니자가 미술관에서 음식을 만드는 이유




1. 친구인 K는 제법 잘 나가는 작가다. 졸업 후 이미 수차례나 유명 갤러리에서 초대전을 열었고 미술 시장에서도 제법 인지도가 있어 작품 가격도 상당하다. 대학 시절 K는 매우 전위적인 작품 창작에 몰두했지만 더 이상 그런 류의 작품은 만들지 않는다. 지금도 K의 작품은 어떤 제약에도 구애받지 않고 있는 듯 보이지만 사실 그에게도 몇 가지의 창작 원칙이 있다. 작품 사이즈가 엘리베이터에 실릴 수 있을 정도의 크기일 것, 상당한 내구성을 갖추고 있을 것, 전시 종료 후에도 작품의 형태가 그대로 보존될 수 있을 것 등등. 그러니까 K의 자유로운 상상력과 미학적 혁신성은 어디까지나 미술 시장이 요구하는 “제품 규격” 하에서만 발휘된다. ‘예술’의 요구가 아니라 미술 시장의 요구에 따라서 작품을 창작하는 것이 예술이 될 수 있느냐는 거친 질문에 K는 스타니스제프스키의 책 <이것은 미술이 아니다>를 읽어봤냐고 되묻는다. 거기 적힌대로 “우리가 아는 미술은 상대적으로 최근에 나타난 현상이다. 미술은 미술관에 전시되고, 박물관에 보존되며, 수집가들이 구매하고, 대중매체 내에서 복제되는 그 무엇”이라면, 미술시장의 요구에 따라서 창작할 때만 오히려 미술이 될 수 있다는 것이다. 아무리 전위적인 작품을 만들어 낸다고 하더라도 화랑이나 미술사, 미술관과 같은 여러 제도들에 기입되지 않는 한, 즉 제도들에 의해 규정되고 정의되지 않는 한 그것은 미술이 아니다. 그리고는 뒤샹의 변기가 ‘샘’이라는 미술로 바뀌는 것에 제도가 있다면, 자신의 작품이 예술이 되는 것에는 시장이 있다는 말도 빠트리지 않는다.



2. 변기가 샘이 될 수 있다면, 요리나 음식도 미술이 될 수 있을까? 리크리트 티라바니자(Rikrit Tiravanija)는 1990년 뉴욕의 폴라 알렌(Paula Allen) 화랑에서 열린 첫 개인전에서 태국 요리를 만들어 전시 기간 내내 관람객 모두에게 “무료로” 접대했다. 작가는 개막일에는 손수 요리했고, 다른 날들은 태국 출신의 동료 미술가가 보수를 받고 대신 요리를 했다고 한다. 전시장에는 가스통, 요리기구, 갖가지 식재료와 소수, 탄산음료 박스와 와인병, 테이블과 의자가 어지럽게 널렸고, 먹다 흘린 음식물과 설거지가 안된 그릇들, 요리하다 튄 기름 냄새와 얼룩이 여기저기 보일 정도였다.

티라바니자가 갤러리에 전시하려 했던 것은 무엇일까? 전문 요리사가 아니라 미술가들이 만든 태국 요리는 어떤지 보여주려고 했던 것일까? 아니면 미술관에 널려진 요리기구와 가스통, 기름 냄새와 흰 벽면에 튄 얼룩들을 전시하려고 했던 것일까? 만약 그것도 아니라면 캐롤 루피(Carol Lutfy)의 분석대로 뉴욕 한 복판에서 전통 태국 요리를 제공해서 소위 “아시아적인 것”이 무엇인지, 불교적 자애가 어떤 것인지를 보여주고자 했던 것은 아닐까? 그러니까, 갤러리에 전시된 것은 좌대에 올려진 조각도, 벽에 걸린 그림도 아니다. 여기에는 적정 수준의 작품 사이즈나 작품의 형태가 전시 이후에도 보존되어야 한다는 “제품 규격”에 맞춰진 작품은 그 어디에도 없다. 음식은 공짜로 제공된다. 캔버스는 어디에도 없다. 밥과 커리를 담은 일회용기는 오래 보존할 수가 없다. “팔 수 있는 것은 아무 것도 없다”!



3. 니콜라 부리오(Nicolas Bourriaud)는 <관계의 미학>에서, “예술적인 활동은 시대와 사회적 맥락에 따라 형태와 양상, 그리고 기능이 변화하는 게임이지 불변하는 하나의 본질이 아니다”고 쓴다. 과거에 ‘음식’이 예술이 되는 방법은 17세기의 바니타스 정물화에서처럼 삶의 덧없음을 보여주는 하나의 알레고리로, 세잔이 대상을 보는 방법을 연구하려 그리고 또 그렸던 사과처럼 하나의 탐구물로, 혹은 앤디 워홀이 캠밸 수프를 쌓아 올려두고 자본주의적 대량 생산 양식을 표현하는 상징물로 등장할 때였다. 그런데 이제 게임의 방식이 달라졌다. 현대 예술은 더 이상 음식이 변하지 않는 불변의 것으로 남도록 만들지 않는다. 그런 의미에서 티라바니자의 음식 접대는 예술이 그동안 음식을 다루던 게임의 규칙에 따라 말하자면 예술이 아니다. 그러나 부리오의 말처럼 예술이 ‘변화하는 게임 그 자체’라고 한다면 티라바니자의 음식 접대는 규칙을 바꾸고 있다는 점에서 예술이다. 냄새나고 형태가 달라지고 먹으면 사라지고 끊임 없이 변하는 ‘음식 자체’가 예술이 된 것이니까.



4. 티라바니자가 미술관에서 ‘음식’을 만든 이유는 무엇일까? 인스턴트 라면을 관객과 끓여 먹거나 태국 음식 외에도 이탈리안 음식이나 펌킨 수프도 제공했던 전력으로 보아 아시아 미술가로서의 정체성이나 문화적 차이를 ‘음식’으로 드러내려는 것이 의도가 아닌 것은 분명하다. 또 무료로 제공한다는 점에서 불교적 박애주의 요소가 없는 것은 아니지만 티라바니자는 자신이 ‘주는 것’보다는 서로가 서로에게 ‘주는 것’에 더 관심이 많다는 점에서 훨씬 더 큰 기획을 가지고 있다. 티라바니자가 만들어 내고 싶었던 것은 단지 음식이나 요리 퍼포먼스가 아니라 하나의 ‘틀’(frame)이다.

“음식은 일종의 틀입니다. 그 틀 안에서 어떤 일이 일어나느냐는 다른 문제지요”

음식이 틀이라는 말은 티라바니자가 음식이 ‘관계의 틀’로 작동할 가능성, 바로 그 가능성을 미술관 안으로 들어오려 했다는 것을 의미한다. 조용하고 엄숙한 미술관에서 음식을 만들어 먹고, 함부로 더럽히고, 마시고 떠드는 일탈 속에서 관람객들은 어떤 해방감을 공유했을 것이다. ‘음식의 틀’ 안에 들어온 사람들이 경험하는 ‘일탈’이 만들어내는 동지의식을 바탕으로 사람들 간에는 새로운 ‘관계의 틀’이 형성된다. 티라바니자의 갖가진 일탈, 요컨대 전시장에 휴게실을 만들어 마실 것을 제공하는 것, 전시장 내에 지역의 밴드를 불러 콘서트를 여는 것은 모두 그가 미술관을 작가와 관객이 적극적으로 만나 서로 연결되고, 관람객 서로 서로가 만나는 ‘관계의 틀’로 변모시키려는 전략적 기획이라 수 있다. 이것은 부리오가 미술 전시에서 작품은 직접적이고 즉각적인 대화의 가능성을 펼쳐 놓는다는 점에서 단지 사적인 소비매체인 텔레비전 혹은 일방적인 이미지 앞에서 작은 공동체를 형성하는 연극 공연장, 영화관과는 다른 특수한 사회성을 생산하는 장소가 된다고 한 것과도 연결된다.

티라바니자는 전시장 내에 한번 설치되면 고정된 채로, 누구도 만져서도 안되고, 변형-파손해서도 안되는 사실상의 ‘죽어 있는 것’이 아니라 음식을 매개로 전시 기간 내내 스스로 움직이고, 변형되고, 새롭게 생성되는 살아 있는 것을 가져오고 싶었다. 그렇기에 무엇을 먹었는지는 그렇게 중요하지 않다. ‘살아있는 것’을 어떻게 살 수 있는지 묻는 것 또한 무례한 질문이다. 티라비나자의 음식에는 작품과 관객의 경계가 모호해진다. 작가가 만드는 음식이라는 틀에 내가 들어갈 때만 가능한 것이기에 작품은 음식을 먹으며 각자가 만들어 내는 ‘만남’이며, 감상은 바로 이 음식 먹기에 지금 당장 ‘참여’하는 것이다.





5. 데리다(Jacques Derrida)에 따르면 ‘선물’은 불가능하다. 왜냐하면 선물은 무의미할 수 없기 때문이다. 선물이 선물로 주어지려면 어떤 상호적 관계나 교환, 부채 의식 등이 존재하면 안되는데 선물은 항상 어떤 ‘의미’와 거래되고 있다. 내가 받은 선물에 대해 반드시 보답해야 한다거나 선물을 준 상대에게 고마움을 느끼면 그것은 선물이 아닌 ‘선물로 포장된 거래’나 ‘뇌물’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런 이유로 진정한 ‘선물’은 결코 상호적이지 않다. 선물은 오로지 일방적일 때만 ‘선물’일 수 있다. 선물을 받는 쪽에서뿐만 아니라 선물을 주는 쪽에서 선물을 주었다는 사실까지도 망각해야 한다.

티라바니자가 만들어 내는 ‘관계의 틀’은 교환에 기반한 관계가 아니라 바로 이 ‘선물’에 기반한 관계다. 클레어 비숍은 미술관에서 잠시 만나 밥을 먹고 헤어진 후 다시는 연락하지 않는 관계를 만들어 내고 있다면 음식으로 만들어 내는 관계 예술은 얼마나 가치 있는 것인지, 사회를 변화시킬 가능성이 있는 관계라고 할 수 있을지 회의적으로 묻는다. 티라바니자의 ‘틀’은 “끊임없이 지속되는 사회적 관계”를 만들어 내지 않는다. 그 대신 “새로운 형식의 사회적 관계”, 즉 “선물에 기반한 관계”에 대한 상상력을 불러일으킨다.

사실 끊임 없이 지속되는 관계란 교환에 기반하고 있다. 내가 주고 다시 돌려 받기 위해서는 관계가 지속될 수 있어야 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티라바니자가 만드는 ‘틀’에는 어떠한 교환 관계도 존재하지 않는다. 우리는 제공받은 음식에 값을 지불할 필요가 없다. 또 이 전시가 만들어 내는 작품, 즉 관계의 틀은 물론 판매가능한 형태가 아니다. 작가와 관람객 사이의 관계에서 뿐만 아니라 전시장에서 함께 밥을 먹고 술을 마신 사람들 사이에도 교환에 기반한 관계는 존재하지 않는다. 다시 만날 기약이 없기에 상대가 내게 호의를 베풀어 주었다고 해도 갚을 방법이 없고, 그 반대의 경우도 마찬가지다.

누군가가 다른 누군가에게 선물로 존재하는 관계, 나와 함께 있어준 누군가에게 반드시 되갚지 않아도 되는 관계, 우연히, 특별한 목적도 없이 함께 있어준 것이 그저 전부이기 때문에 교환이 불가능한 관계, 그래서 데리다의 말대로 현실적으로는 실현 불가능한 관계. 그런 의미에서 티라바니자의 음식의 틀은 ‘선물의 예술’이며, ‘선물의 예술’이 만들어 내는 선물의 공동체는 ‘예술의 선물’이 된다.


6. 독일어 ‘Es gibt~’는 ‘무엇이 있다’(There is~)는 말이다. gibt라는 동사는 ‘주다’는 뜻의 ‘geben’에서 변형된 것이다. 그러니까 ‘Es gibt’는 ‘있음’이 ‘주는 것’, 곧 존재가 선물이 된다는 것을 내포한다. 티라바니자가 미술관에서 음식을 만들어 나눠 줄 때, 우리가 받은 것은 단지 한 끼 식사만이 아니다. 아무 것도 팔지 않고, 교환하지도 않는 세계, 서로의 존재를 선물로 선사하는 살아있는 세계를 상상하는 것, 그것이 티라바니자가 미술관에서 음식을 만드는 이유다.

친구 K의 되물음에 대해 답한다. “자네 작품이 미술이 되는 것은 제도나 시장에 달린 것인지도 모른다. 하지만 자네 작품이 미술이 되는 것을 포기할 때, 그 교환을 중지할 때 어쩌면 비로소 더 큰 의미의 ‘미술’, ‘예술의 선물’이 된다는 사실을 기억해주길 부탁한다”.

- 이 글의 티라바니자의 전시 정보와 인터뷰 내용은 이지은의 2011년 논문인 “먹는 미술-현대미술에 나타난 음식의 사회적 역할과 양상들”에서 상당 부분을 참고하였습니다.
- 대구미술관 소식지 2호에 특집으로 실린 기사입니다.

    덧글

    댓글 입력 영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