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화의 글쓰기 by 철학본색

평화의 글쓰기 - 강정에 다녀온 날

한 때 프랑스에서 철학은 ‘실존주의’였다. ‘실존주의는 휴머니즘이다’라 외치는 철학자 사르트르를 보기 위해 수십만의 사람들이 콩코드 광장에 모일 정도였다다. 그러던 사람들이 어느 순간부터 더 이상 사르트르도, 실존주의도 읽지 않게 되었다. 바로 ‘구조주의’의 등장 때문이었다.


실존주의가 인간을 유일무이한 개성을 가진 존재임을 주장했다면, 구조주의는 인간을 어떤 구조적인 틀 내에 있는 존재로 설명하려고 했다. 언어학의 소쉬르, 인류학의 레비-스트로스, 정신분석학의 라캉과 같은 구조주의자들은 마침내 프랑스의 철학 영웅 사르트르를 쓰러뜨렸다. 구조주의의 부상과 함께 떠오른 개념이 바로 ‘차이’였다. 소쉬르는 어떤 단어의 의미는 그것이 지시하는 대상에서 비롯하는 것이 아니라 다른 단어와의 차이에서 비롯하는 것이라고 한다. 예컨대 우리 말에서 ‘맵다’와 ‘뜨겁다’는 서로 다른 말이지만, 영어에서는 모두 ‘hot’으로 쓴다. 따라서 영어에서 ‘hot’은 우리 말 ‘맵다’와는 전혀 다른 의미를 지니는 것이다. 즉 어떤 단어의 의미는 그 단어가 놓여 있는 구조에 의해 결정되는 것이다. 

구조주의에서 말하는 ‘차이’는 이분법적인 차이를 말한다. 이때의 차이는 ‘남자-여자’, ‘음-양’, ‘있다-없다’가 반대되는 말인 것처럼 ‘동일함’에 대한 반대말로서의 ‘차이’와는 전혀 다르다. 이런 차이는 이미 구성된 구조 안에서 성립하는 것에 불과하지만 구조주의적 차이는 ‘남자-여자’, ‘음-양’, ‘있다-없다’, ‘동일성-차이’ 등 모든 종류의 이분법에 존재하는 차이를 의미한다. 따라서 구조주의자들이 말하는 구조는 단순하다. 이분법적 구조이기 때문이다.

문제는 구조주의가 구조의 변화에 대해서는 설명하지 못한다는 것이다. 이분법적 구조는 어떤 과정을 통해 바뀌는 것일까? 구조주의 이후 프랑스 철학자들은 구조주의가 세상이 이분법적 차이로 가득차 있다는 것은 포착했지만, 그런 차이가 어떻게 달라질 수 있는지에 대해서는 침묵하고 있다는 점을 문제 삼았다. 특히 데리다의 철학은 구조의 변화를 설명하고자 한 사유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구조주의자들은 구조가 한번 정해지면 변하지 않는다고 생각했던 것과는 달리 데리다는 변하지 않는 것은 없다고 생각했다. 그렇다면 구조의 변화를 가져오는 것은 무엇일까? 데리다는 <글쓰기와 차이>에서 구조의 변화를 가져오는 에너지는 구조 안과 밖의 경계에서 온다고 한다. 어떤 구조라도 자신을 유지, 확대하기 위해서는 구조 밖의 카오스적인 힘을 끊임없이 ‘구조 안으로’ 끌어와야만 한다. 즉 구조를 이루는 이분법적 차이가 구조주의적 차이라면, 데리다는 구조의 안과 밖의 차이라는 전혀 다른 ‘차이(Differance)’를 다루고자 했던 것이다. 

그러면 구조의 변화를 가져오는 에너지를 어떻게 하면 구조 안으로 끌어올 수 있을까? 데리다는 바로 ‘글쓰기’를 통해서 가능하다고 한다. 글쓰기를 영어로 하면 ‘in-scription’인데 여기에는 ‘안으로 끌어온다’는 의미가 있다. 이 때 데리다가 말하는 글쓰기는 단지 글을 쓰는 행위만이 아닌 하나의 비유라고 할 수 있다. 요컨대 기존의 예술계가 공유하는 문법과 구조를 송두리째 흔들기 위해서 기존 예술계의 문법이 다루지 않던 바깥의 것을 예술계 안으로 가져와야 한다. 그래서 위대한 작품, 창조적 작품은 구조 내에만 머물러 있지 않는다. 마찬가지로 구조 밖에 있는 카오스적인 힘을 창조적인 이들의 창조적인 노력으로 구조 안으로 끌어 올 때, 기존의 구조 전체가 상대화되고 변하게 되는 것이다. 즉 ‘글쓰기’란 그동안 구조 내에서 다뤄지지 않던 새로운 요소를 구조 속으로 가지고 들어오는 모든 행위를 의미하는 것이다. 


...강정마을에서 미사를 드리며 데리다의 ‘글쓰기’를 생각했다. 지금 강정은 전쟁터다. 곳곳에 드리워진 노란 깃발과 벽마다 쓰여진 평화를 염원하는 기도문. 천막으로 만들어진 마을 회관과 그 앞을 지나는 덤프트럭. 강정마을 사람들은 매일 아침 11시면 평화를 기원하는 미사를 드리고, 마을을 돌며 삼보일배를 한다. 좁은 도로를 따라 지나는 사람들 중 누군가는 손가락질을 하고, 언론에서도 더 이상 관심을 갖지 않는다. 누군가는 이미 끝나버린 싸움이라고도 한다. 하지만, 이들의 싸움은 해군기지를 찬성할 것이냐 반대할 것이냐 하는 이분법적인 싸움, 구조 안에서의 싸움이 아니다. 이제 싸움은 이 모든 차이를 넘어서는 데리다적 차이의 싸움, 구조 안을 변화시키려는 싸움으로까지 발전했다. 이제 싸움은 강정마을 하나를 두고 벌어지지 않는다. 대신 우리 삶, 세계관 전체를 대상으로 강정 사람들은 전쟁을 벌이고 있다. 안보와 경제와 자연과 생명에 대해 우리가 가진 기존의 사고방식 자체가 얼마나 문제가 많은지, 무의미한지, 무력한지 깨닫게 하기 위한 싸움이 한반도 최남단 서귀포 강정마을에서 벌어지고 있는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강정의 미사는 ‘구조 밖의 평화’를 구조 안으로 끌어오는 ‘글쓰기’이며, 그들의 삼보일배는 ‘구조 안의 정의’에 ‘구조 밖의 사랑’을 끌어오는 ‘글쓰기’다. 미사를 마치자 사람들은 자신들을 감시하던 경찰과 용역인부들을 향해 “평화를 빕니다”며 손을 내밀었고, 군사요충지가 될 강정 해군기지 앞에서 “구럼비야 사랑해. 강정의 평화”를 노래했다. 우리가 강정을 밖으로 몰아내는 한 강정에서의 ‘글쓰기’는 끝나지 않는다. 
평화는 아직 다 쓰여지지 않았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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