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럽식 보편주의라는 낡은 배 by 철학본색

<유럽식 보편주의라는 낡은 배>

테세우스는 하반신은 소이며 상반신은 인간의 몸을 한 괴물, 미노타우로스를 물리치기 위해 크레타섬으로 모험을 떠났다. 미노타우로스를 제압한 후 그는 이제 고향으로 귀환해야 한다. 편의상 테세우스가 탄 배는 부품(P) 10개로만 만들어진 것이라 하자. 배가 부서지면 파손된 부품을 미리 준비해 둔 새 것으로 교체한다. 테세우스는 T0 시점에 출발했고, T1 시점에서 파손된 P1 부품을 새로운 부품으로 교체했다. T2, T3를 지나 T10 시점에 이르면서 P10 부품까지 완전히 교체했다. 그렇다면, T0에 테세우스가 탄 배와 T10에 테세우스가 탄 배는 같은 배라고 해야 할까, 다른 배라고 해야 할까? 이것이 ‘테세우스의 배’라는 이름으로 알려진 패러독스다.

먼저 T0의 배와 T10의 배는 ‘다른 배’라고 대답하는 경우를 생각해보자. 두 시점의 배를 다르다고 생각하는 이들은 배의 부품이 교체되는 T1부터 이미 다른 배가 되었다고 주장한다. 이들에게 “지금도 나는 머리카락이 빠지고, 피가 새로 만들어지는 등 구성요소가 계속 바뀌고 있으니 나 역시 계속 다른 존재가 되고 있는 것인가?”하고 반박하면 이들은 놀랍게도 “같은 사람이 아니다”라고 답한다. 사실 이 문제에서 두 시점의 배가 ‘다른 배’라고 주장하는 것이 ‘같은 배’라고 주장하는 것보다 훨씬 쉽다. 같은 부품을 사용한 것이 아니라면 같은 배라고 말할 수 없다고 끝까지 우기면 되기 때문이다. 하지만 부품 하나가 달라진다고 해서 그 배가 전적으로 새로운 존재가 되었다고 생각하지 않는 것이 일반적이다. 그렇다면, T0와 T10의 배를 같다고 말할 수 있는 근거는 무엇일까?

여기에는 몇 가지 견해가 있다. 우선 어떤 이들은 이 배의 부품이 달라지긴 했지만 두 시점에서 테세우스의 귀환이라는 ‘동일한 목표’가 있었다는 것을 같은 배로 볼 수 있는 근거로 든다. 하지만 만약 돌아오는 길에 테세우스가 죽거나 테세우스가 만약 귀환하지 않고 다시 크레타섬으로 갔다면? 이들은 목표가 달라지는 경우를 설명하지 못한다는 한계가 있다. 또 어떤 이는 테세우스의 배를 구성하는 부품은 매 시점마다 바뀌고 있지만 ‘테세우스가 탄 배의 이데아’가 모든 시점의 배가 같은 배라는 것을 보증해준다고 한다. 하지만 만약 선원 중 한 사람이 아테네로 도착 후 자기 집 앞마당에서 교체된 낡은 부품을 조립해 배를 건조했다고 생각해보자. 이런 경우 테세우스가 타고 온 배와 선원이 만든 배 중 어느 것이 ‘테세우스가 탄 배의 이데아’에 더 가까운 배인지 이들은 설명하지 못한다.



‘T0와 T10 시점의 테세우스의 배는 같은 배다’라는 생각이 우리의 직관에 부합하지만 그 근거를 제시하기란 쉽지 않다. 왜일까? 현대철학자들은 우리가 이 문제에서 ‘운동’을 무시했기 때문에 패러독스에 빠지고 말았다고 한다. 이들에 따르면 테세우스의 배는 T1, T2 각각에서 정지된 채로 존재한 것이 아니라 T1에서 T2로 이동하는 과정 혹은 T1에서부터 T10으로 운동하는 과정에 존재한다. 즉, 배는 운동하고 변화하는 방식으로 존재하는 것이다. 따라서 배가 운동하지 않는다면, 그러니까 T1에서 T2로 이동하지 않는다면 그 배는 존재하지 않는다고 말할 수 있다.

이제 ‘테세우스의 배’의 자리에 ‘인권’, ‘자유’를 넣어보자. 18세기 말 프랑스 혁명 시기의 인권과 지금 내가 알고 있는 인권이 같은 것이라고 말할 수 있는 근거는 무엇일까? ‘유럽인들이 생각하는 인권’과 ‘중동-아시아-아프리카 사람들이 생각하는 인권’은 정말 같은 인권일까? 지금 ‘영국의 기득권층이 지지하는 자유’와 ‘난민들이 찾아나선 자유’는 같은 것이라 할 수 있는 것일까? 만약 이 모든 질문에 대해 같은 것이라고 답할 수 있다면 그 근거는 무엇인가? 테세우스의 배 패러독스에서 봤듯이 인권과 민주주의의 이데아도, 동일한 목표도 근거가 될 수는 없다. 그동안 유럽 세계는 자신들을 인권, 자유라는 보편적 가치의 대변자로 내세워 왔다. 하지만 난민 문제에 대해 유럽 세계가 보여준 태도는 그들의 인권이 단지 자신들의 권력과 정책을 정당화하는 레토릭에 불과했었다는 것을 보여줬다. 또한 영국은 그동안 의회민주주의의 수호자를 자처해왔지만 이번 브렉시트 결정은 그들의 민주주의가 단지 자국의 이익을 위한 수단으로서 기능하고 있음을 드러냈다. 이처럼 유럽인들이 인권, 자유, 민주주의를 내세워 추구한 목표는 제3세계인들이 추구해온 목표와는 달랐던 것이다. 그렇다면 인권, 민주주의, 자유와 같은 보편적 가치는 낡아버린 부품이 되어 버린걸까?

테세우스의 배가 운동하는 방식으로 존재하는 것처럼, 인권, 민주주의 역시 정지해 있지 않고 지금 이 순간도 끊임 없이 운동하는 방식으로 존재한다. 따라서 낡아버린 부품은 ‘보편적 가치’가 아니라 이러한 가치들을 지배해온 ‘유럽 중심주의’라 할 수 있다. 이제 우리에게는 테세우스의 배의 낡은 부품을 교체하듯 낡아빠진 유럽식 보편주의를 변화시켜야 하는 역사적 책임이 주어져 있다. 즉 영국의 EU 탈퇴로 인해 흔들리고 있는 ‘유럽식 보편주의’를 중동-아시아-아프리카-난민을 모두 포함하는 ‘새로운 보편주의’로 대체해야 할 책임이 바로 그것이다. 지금 우리는 어느 시점에 와 있는 것인가? 브렉시트는 낡은 부품이 교체될 때가 왔다는 것을 알려주고 있다. ‘유럽식 보편주의’라는 낡은 부품을 ‘새로운 보편주의’로, 형식적 민주주의를 ‘새로운 민주주의’로 교체해야 할 때가 왔다는 것을, 세계화를 ‘새로운 국제주의’로, 이익 추구의 자유를 ‘새로운 자유’로, 난민까지 포함하는 ‘새로운 인권’으로 만들어 나가야 할 운동을 해야 할 때가 왔다는 것을 말이다.

대구신문에 쓴 글이다.(2016.6.30)
테세우스의 배 패러독스를 단서로 삼아 브렉시트 이후 인권, 민주주의, 자유와 같은 소위 '보편적 가치'의 존립에 대해서 써본 글이다. 정교한 글은 못되지만, 나는 이 글에서 브렉시트 이후 보편주의를 회의하는 움직임을 경계해야 할 필요성에 대해서, 무엇보다 유럽식 보편주의를 넘어서는 보편주의, 요컨대 월러스틴이 말한 바 보편적 보편주의의 가능성을 탐색하고 이를 이뤄가려는 '운동'이 필요하다는 것을 말하고 싶었다. 세상은 지금 사이비 보편주의로 가득하지 않은가!

테세우스의 배 패러독스는 보통은 '자아의 아이덴티티' 문제와 관련해 자주 논의된다. 나는 이 문제의 해결책으로 베르그송의 관점, 즉 운동성 자체가 동일성을 가져오는 것이라는 생각을 지지한다. 운동 자체가 존재라면, 그 존재는 뭔가 '흐린 존재', 운동하지 않으면 가능하지 않은 존재가 된다. '자아'에 대해서도, '자유'나 '민주주의'에 대해서도 그건 마찬가지다. 자유, 민주주의, 인권 모두 '투명한 개념'이 아니라 '흐린 개념'일 수밖에 없다. 오직 흐린 개념을 불투명하게나마 유지시키려는 운동이 중요한 것이 아닐까 그런 생각을 쓰고 싶었다. 새로운 보편주의라는 흐린 개념을 쓴 것도 그런 이유다. 문제는 그런 생각을 글로 옮겨 쓰는 것에는 성공한 것 같지가 않다. 성긴 생각을 거친 글로 표현했지만 섬세하고 눈 밝은 독자들에게는 작은 의미라도 있는 글이라면 더 바랄 것이 없겠다.

오늘자, 한겨레 정의길 기자가 쓴 <브렉시트 긍정적으로 보기>는 내 논지와 연결된다. 물론 훨씬 더 실증적이라 참고할 점이 많다. 일독을 권하며 링크한다.
http://www.hani.co.kr/arti/opinion/column/750304.html

2016.7.1 추가
정의길 기자의 글을 추천한다고 쓰자, 한 선생님께서 이런 글을 남겨주셨다. 이 기사를 읽으실 분을 위해 옮겨 놓는다.
"정의길씨의 글은 미국 프레임을 강조하다보니 오류(영국에 중동난민이 적다니요. 지금 영국으로 건너가기 위해 프랑스 칼레로 모여드는 난민들, 도버해협을 건너는 이들의 에피소드가 영국노동자 심정적 공포의 워천인데)가 있어 아쉽습니다.
러시아와의 관계개선을 주문하며 왜 시라아 내전의 수백만 자국민 학살의 책임을 뭍는 일은 거론하지않는지. 진정 제삼세계인의 인권이나 난민을 고려하는 제안이라면 이 어려운 문제를 먼저 직시하는 것이 옳다고봅니다. 미국과 미국의 하수 영국, 서유럽의 제국주의자 독일이라는 프레임을 관철시키는 것이 무슨 의미가 있는지 전 잘 모르겠어요. 이 기자분 유럽 관련 글 읽을 때 자주 드는 생각."

대구신문 링크
http://www.idaegu.co.kr/news.php?code=op03&mode=view&num=201397



덧글

  • shaind 2016/06/30 21:03 # 답글

    "따라서 배가 운동하지 않는다면, 그러니까 T1에서 T2로 이동하지 않는다면 그 배는 존재하지 않는다고 말할 수 있다."

    T1에서 T2까지의 시간이 T1과 T2사이의 시점들의 합이고, 이동하지 않는 각각의 시점 위에서는 배가 존재하지 않는다고 말할 수 있다면, '존재하지 않음'의 합이 '존재함'이라는 역설이 되겠군요.
  • 철학본색 2016/07/01 00:30 #

    네 말씀하신 것도 역설일 수 있겠습니다. 존재하지 않음의 합이 존재라는 점에서 데리다의 경우는 존재론을 유령론으로 바꿔 놓기도 했지요, 다른 한편 운동의 철학자들에게는 각각의 시점이라는 분할 자체가 잘못된 전제라 여기기에 이들이라면 역설이라고 생각하지 않을 것 같기도 합니다~
  • YUMYUM 2016/07/01 01:22 # 답글

    제가 이 문제를 접햇을때는, 법적으로 명시된 배의 소유자가 여전히 테세우스이고 그 법적 소유물의 대상이 수리된(개조된) 배를 여전히 지칭할 경우, 혹은 개조하기 전의 선박 등록 번호가 고유하가 남아 개조된 배에 여전히 쓰이고 잇을 경우, 개조된 배는 개조되기 전의 배와 동등한 사물이라 할 수 있다고 대답했던 기억이 납니다.
  • 철학본색 2016/07/01 14:54 #

    의견주셔서 감사합니다. 그러면 어떤 법, 내지 관계가 배의 동일성을 보장해준다는 의견이시네요. 재밌는 의견 감사합니다^^
  • 유빛 2016/07/01 10:34 # 삭제 답글

    흥미로운 문제인데, 스스로 과학적 회의주의자라고 생각하는 제 관점에서는 이렇게 해석이 되는군요. 어떤 질문이든 그 질문에 대한 답을 하기 위해서는 가정이나 전제가 필요합니다. 그게 연역적인 답이든, 귀납적인 답이든, 그것도 아니면 직관에 기반한 답이든 말이죠. 그렇다면 '테세우스의 배'는 어떤 가정이나 전제를 가지고 있는가? 라고 물어볼 필요가 있는데, 질문에서만 봤을 때 그런 것을 찾아볼 수가 없습니다. '테세우스의 배'가 테세우스가 탄 배인지, 테세우스가 좋아하는 배인지, 테세우스에게 맞는 배인지 자체가 불명확하죠. 그러므로 이 '빈 공간'은 '해석하기 나름'이고 '문제가 잘못되었으므로 정답은 본래부터 없다'가 제 답이 되겠습니다. 그렇다면 '테세우스의 배'란 없는 것인가? 라고 묻는다면, 질문 자체의 답은 순수하게 해석의 영역이지만 그것은 순전히 '테세우스의'라는 것에 한정된 것이고 '배'는 물리적 실체이므로 '존재한다'라고 해야겠죠. 즉, '존재하나 엄밀하지 않아 해석이 다를 뿐'-이라는 너무 뻔한 결론... -_-;;; 그런데, 유럽식 보편주의도 마찬가지 입니다. 유럽식이라는 것은 유럽인들에 의한, 을 의미하는가 아니면 유럽인과 관계없는 어떤 이론 혹은 정서를 의미하는가? 그리고 보편성 역시 100%의 범위를 갖는 사실만이 보편성으로 인정 받아야하는가 아니면 예외를 갖더라도 보편성으로 인정해야하는가?... 이런 문제들이 있죠. 여기서 만약 유럽식 보편주의를 도덕적 가치에 한정한다고 하면, 저는 유럽식 보편주의의 문제도 아니거니와 위기도 아니라고 하겠습니다. 도덕은 선택이 가능한, 자유로운 존재에나 가지는 것이지 생존의 위기나 궁지에 몰린 존재에게 따져볼 것이 아니죠. 영국민들이 이기적이라고 보는 사람들이 많은데, 그들이 실제적인 삶의 위협을 느꼈고 그래서 생존을 택했다-라고 한다면 그건 비도덕적인 선택이라고 볼 수 없다고 판단합니다. 그걸 이기적이라고 보거나 인류의 보편적 도덕성을 어겼다고 보는 건 너무 엄숙한 율법주의적인 시각입니다. 영국인들을 비난하기네 앞서 따져볼 것이 많다는 겁니다.
  • 철학본색 2016/07/01 14:53 #

    감사합니다. 사실 저도 브렉시트를 비도덕적 선택이라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저는 유럽의 보편주의라는 것이야 말로 도덕을 명분으로 내세운 이데올로그라고 생각하고 브렉시트는 그것이 가시화된 것에 불과하다고 지금은 생각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보편주의라는 것은 보편성에 대한 단지 소유 유무에서만 말해지는 것은 아니고, 보편성을 획득하려는 과정, 보편성이 어딘가에 있다는 믿음에 기반한 것입니다. 그러니 모든 보편주의는 잠정적 보편주의고, 유럽식 보편주의도 잠정적일 뿐이라는 것을 브렉시트가 보여준다고 저는 생각했던 것입니다. 그러면 새로운 보편주의는 새로운 잠정적 보편주의겠지만 거기에는 비유럽을 포함한 더 넓은 차원의 보편성을 획득하려는 노력이 중요하다고 저는 생각해 보고 있습니다.

    테세우스의 배 패러독스의 경우는 말씀하신대로 해석의 여지가 많습니다만, 사실 이 배가 테세우스가 탄 배인가, 소유의 배인가 는 이 문제를 다루는 분석철학자들은 거의 고려하지 않습니다. 테세우스에 의해서 배의 동일성 자체를 말할 수 있지 않기 때문입니다. 테세우스의 소유였던 배였지만 테세우스가 타고 오다가 죽어 소유권 내지 테세우스와 관계된 모든 것이 달라졌다 해도 다른 배가 되었다고 말하기에는 직관에 부합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사실 말씀하신대로 모든 패러독스는 그런 빈 공간과 무 전제로 인해 생기는 것이 분명합니다. 현실은 전제가 없을 수 없으니까요^^
  • 유빛 2016/07/02 17:58 # 삭제

    철학본색님 /

    실례가 될지 모르지만 흥미로워서 다시 댓글을 달게 되었습니다. 그럼 분석철학자들에게는 '테세우스의 배' 패러독스에서 무엇이 중요한 것인가요? 제 관점에서는 '테세우스의'라는 단어의 '의미'가 대상을 '구체적으로 지정하는 역할'을 하고 있기 때문에, 이것이 해결되지 않으면 대상은 당연히 여러개가 된다. 하지만, 배라는 물건은 (상식적인 수준에서는) 어느 정도의 양식을 가지고 있는 '물리적 실체'이므로 논란의 여지가 없다-라고 보여지는군요.

    물론 배 자체에 대해서의 의문을 제기할 수 있습니다. 배를 순수하게 물리적 실체로 바라보더라도, 모든 시간에 대해서 완벽하게 같을 수는 없기 때문입니다 (적어도 엔트로피의 법칙의 전제한다면 말입니다. 모든 물체는 시시각각 붕괴하고, 분해되어, 평형 상태로 나아가니까요). 문제는 이런 식으로 바라본다면, 결국 아무것도 남지 않는다는 겁니다. 제가 보는 글는 어제의 그 글이 아닐 것이고, 이 글을 쓰는 저와 답을 보는 저는 다른 대상일 겁니다. 흥미로운 생각이지만 아무것도 해결할 수 없는 생각이기도 합니다.

    사족을 달자면 그래서 프로그램에서는 '같으냐(identity)'와 '같으냐(equality)'를 구분합니다. identity가 문자 그대로의 완벽한 동일성을 전제한다면 (프로그램에서의) equality는 그 내용의 동질성을 비교합니다. 즉, '본질이 같으냐'가 기준이 되는 것이죠. (그 본질을 무엇으로 정의할지는 프로그래머에게 달린 것이겠습니다만...)

    분석 철학자들은 어떻습니까? 괜찮다면 견해를 듣고 싶습니다.
  • 철학본색 2016/07/02 22:47 #

    유빛님, 실례라니 천만에 말씀입니다. 의견을 주셔서 감사하고 저는 이번에 적어주신 글에서 프로그래밍에서는 동일성과 동질성을 구분한다는 내용을 배울 수 있었습니다. 저는 분석철학 전공이 아니라 코스하며 배운 내용 정도만 말씀을 드릴 수 있을 것 같은데요, 철학적 패러독스로서의 '테세우스의 배'에서 무엇이 중요하냐는 질문을 주셨는데, 먼저 말씀드리고 싶은 것은 배의 Identity의 문제는 T0와 T10 두 시점의 배를 같은 배라고 말할 수 있는 근거가 무엇인가를 찾는 것입니다. 물론 테세우스의 배라는 것은 하나의 비유에 불과합니다. 인격의 동일성 문제를 다루기 위해 가져오는 사고실험인 것이지요. (프로그래밍 같은 경우에는 복제를 통한 '완벽히 같음'이 말해질 수 있고, 같지는 않더라도 본질적으로는 같음이 구분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하지만 인격과 프로그램이 정확히 유비되지 않을 것이라는 점은 이미 파악하고 계시리라 생각합니다 )

    그러면 이 문제에서 무엇이 중요한지는 이렇게 말씀드릴 수 있는데요,
    먼저 유빛님이 말씀하신 '테세우스의' 라는 것이 문제가 되고 '물리적 실체'에 대해서는 논란의 여지가 없다고 보여진다라는 의견에 대해서 말씀드리겠습니다. 놀랍게도 분석철학자들은 논란의 여지가 없어 보이는 바로 그 '배 자체'를 다룹니다. 흥미로운 생각이지만 아무 것도 해결될 수 없다고 하신 생각, 즉 모든 시간에 대해서 완벽하게 같을 수는 없다, 는 결론을 지지하는 학자도 적은 수지만 존재합니다. 환원론자들의 생각이자 형식논리학의 동일율을 부정하는 견해이기도 하죠. 하지만 대부분의 경우는 '아무 것도 해결할 수 없다'고 말씀하신대로 이런 생각은 우리 직관에 부합하지 않기 때문에 제가 위에서 쓴 대로 동일성을 설명하려고 노력하는 거죠..

    그러면 이 배의 동일성을 지지한다고 할 때, 논란의 여지가 없어 보이는 '동일성' 에 대해 동일하다고 말할 수 있는 근거가 중요해집니다. 완벽히 같은 것은 아니지만 우리는 두 대상을 하나의 동일한 대상으로 인식하는데 그렇게 생각하는 근거가 무엇인가? 그래서 테세우스의 배 패러독스는 두 배를 같은 배라고 말할 수 있는 여러 종류의 근거를 찾는데, 그 어떤 종류의 근거도 만족스럽지 못하다는 것을 보여주는 논의라 할 수 있습니다. 어떤 사람은 두 시점의 배를 동일한 배로 말할 수 있는 이유를 '본질'이라고 하지만, 어떤 사람은 '소유 관계'라고 하고, 또 어떤 사람은 '운동'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물론 그 외의 다른 논증도 많이 있습니다만 분석철학자들은 지금까지도 보편타당한 근거는 못찾았다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여전히 패러독스인거죠.

    유빛님께서는 물리적 실체이기에 논란의 여지가 없다고 하셨습니다. 분석철학자들은 이런 견해를 물리주의적 입장이라고 하는데, 물리주의자들에 대한 여러 논박 중 하나가 제가 원글에서 언급한 이전에 배를 구성하던 부품 'P'로만 이뤄진 배와 새 부품 P'로만 구성된 두 배가 존재하는 경우 어떤 배를 이 배의 실체의 연속체로 볼 것인가 하는 문제가 생깁니다. 사실 두 배 모두 테세우스의 배라고 해도 직관적으로 모두 받아들일 수 있는 주장이긴 한데, 두 배 모두가 테세우스의 배라고 말할 수는 없습니다. 하나를 선택해야 하지요. 왜냐하면 A=A, 즉 형식논리학의 동일율에 위배가 되게 되니까요. 그래서 참 어려운 문제입니다.
  • 유빛 2016/07/03 04:28 # 삭제

    철학본색님 /

    우선, 시간을 내어 답해주신 것에 대해 진심으로 감사드립니다. 다른 사람에게 시간을 쓴다는 건 결코 공짜가 아닐뿐더러 꽤나 귀찮고 힘든일이기도 하지요.

    제가 철학본색님의 답에서 한가지 찾은 게 있다면 '~ 인식하는데 그렇게 생각하는 근거가 무엇인가?'부분에서 '분석철학자들이 중요시하는 건 결국 다름 아닌 인간의 인식 그 자체구나'라는 겁니다. 저는 일전에 이 부분에 대해서 '해석하기 나름'이라며 매우 느슨하게 그냥 넘어갔었지요. 또, 동일성의 설명에 대한 근거에서 '소유 관계', 운동'이 언급되는 것을 보고, (동의하지 않으실지도 모르겠습니다만) 분석철학은 대상의 '본질'보다는 '해석' 자체에 대한 학문인가?라는 의문을 품게 되었습니다. 원래 제가 아는 분석 철학이란 분과는 이런 애매모호한 사변적 해석은 배제하고 논리와 언어를 중시한다고 알고 있었는데 말입니다.

    괜찮으시다면 논의를 이어가도 되겠습니까? 왜냐하면 제게 이 문제는 '이렇게 단순하고 명료한데 뭐가 문제지?'라는 의문이 들기 때문입니다. 저는 이것이 제가 단순히 한가지 관점을 채택하고 있기 때문인지, 만약 그렇다면 수많은 천재들과 선현들은 어떻게 다르게 생각했는지 알고 싶습니다. 또, 그저 찾아보면서 얻는 것이 아닌, 철학본색님 개인의 견해를 통해서 살아있는 관점을 얻고 싶기도 합니다. 아무래도 책이나 돌아가신 분들은 제 의문에 답해주지를 않으니까요.

    제가 이 '테세우스의 배'의 패러독스를 해결하는 방법은 (당연하겠지만) 전제를 깔고 있습니다.

    우선, 하나는 고전적인 '이데아'와 '그림자'의 관계. 즉, 본질적인 대상은 따로 있고 우리는 결코 본질에 자체에는 다다를 수 없으며 오직 관찰을 통해 그것을 유추할 뿐이다 (그러므로 중요한 것은 본질에 도달하는 것 혹은 그러한 노력 자체다) - 라는 가정입니다. 이 가정에 따르면 '태세우스의'와 '배'는 분리되어야 합니다. '테세우스의'라는 단어의 뜻이 법적이든 사회적이든, 본질적인 의미에서 태세우스와 배는 독립적인 개체이기 때문입니다 (또는 불가의 연기론처럼 어떤 관계로 이어져있다고 한다면 그 배는 테세우스만의 것만이 아니므로 아무런 의미가 없습니다).

    이렇게 테세우스와 배를 분리하는 것으로 '테세우스의'라는 단어에 대해서 지역이나 문화, 개인에 의존하는 해석(문맥)을 제거하고 문제를 단순화하면, 그 다음 문제는 과연 '테세우스' / '배'라는 독립적인 실체는 무엇이냐-가 되겠습니다.

    우선, '배'를 짚고 넘어가면, '배'라는 건 특정한 형태를 가지는 것으로 기능을 하는 도구임에 틀림없습니다. 그런데 모든 배는 또 유일(unique)합니다. 왜냐하면 그 대상을 이루는 물질 자체가, 모든 시점에 대해서 우리가 인식하는 공간에서 유일한 좌표(혹은 영역)를 차지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럼 어떤 물체가 특정한 형태를 가지고 특정한 좌표계를 점유한다면 그것을 유일하다고 하는 것이냐? 라고 물을 수 있겠습니다만, 좌표계의 변동(즉, 물체의 운동) 자체만으로 물체의 유일성을 부정하는 것은 직관에 부합하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최종적으로는 '배'를 구성하는 것은 그 '모든 요소의 동일성의 총합'으로서, '구조'를 포함하는 것이며 '운동'은 '상태'에 불과하다. 어떤 상태가 되더라도 그 요소와 구조가 바뀌지 않는 이상 이 배는 이 배다-라고 말할 수 있겠습니다. 휴우, 이제야 '만약 그 요소의 극히 일부 - 가령 원자 하나 - 가 변한다면 그것은 원래의 배인가'라는 질문에 도달했군요.

    여기서 사고실험을 하나 해보죠. 이 배를 구성하는 원소가 매우 특수해서, 눈에 보일 정도로 크며 각 원소가 고유의 색깔을 가지고 있다고 해보겠습니다. 이 배의 일부 원소가 (에너지 보존의 법칙에 의해서 사라지지도 생성되지도 않으므로) 새로운 것으로 교체 되었습니다. 질문을 '이 배는 이전 것과 같은 것으로 인식되는가?'로 한다면 답은 '그럴 수도 있고. 그렇지 않을 수도 있고' 입니다. 사람들마다 대답이 달라질테니까요. 하지만 질문을 '이 배는 이전 것과 같은 것인가?'라고 한다면 답은 당연하게도 '아니다'입니다. 형태는 유지되었지만 원소의 독자적인 동일성의 총합은 변했으니 말입니다. 이 결론이 맞다면, 이제 원소를 눈에 보이지 않는 보통 크기로 줄여도 이 사실은 변하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극히 일부, 단 하나의 요소만 바뀌더라도 어떤 물체는 이전과 동일하지 않다'라고 답할 수 있겠습니다. 여기에서 철학자들이 '왜 해석을 무시하냐! 사람들이 맞다고도 하고 틀리다고도 하는데!'라고 한다면 (1) 현실적으로 인간의 인지 능력을 벗어나기 때문에 (원자 하나의 교체를 어찌 알겠습니까) 그리고 (2) 대답이 문맥에 따라 걷잡을 수 없이 바뀌는데 이러한 가변성은 절대적 진리의 속성이 아니며, 인정해도 아무런 실익이 없기 때문에-라고 대답하겠습니다.

    그럼 이제 '배'가 그렇다면, '테세우스'는 어떻냐? 라고 물으실 수 있겠습니다. 매일 순간 세포 레벨에서 바뀌는 테세우스는 매순간마다 동일하지 않으므로, 매순간마다 새로운 인간인 것이냐? 이 질문에 답하기 위해서 다시 사고 실험을 해봅시다. 가령 테세우스를 유인원에게 넣었는데 능력이나 성격은 전혀 변하지 않았다고 한다면 우리는 테세우스를 테세우스가 아니라고 인식할까요 아니면 가면을 썼거나 전신 화상같은 불행한 사고를 당한 것처럼 취급을 할까요? 반대로 테세우스와 완벽하게 원자 레벨에서 일치하지만 운동하지 않는 - 기능하지 않는 - 물리적 실체가 있다고 한다면 그걸 테세우스라고 인정할까요 아니면 마네킹이나 조각 같은 취급을 할까요? 인간을 대상으로 한 사고 실험에서, 우리는 물리적 실체와 관계없이 테세우스라고 인식되는 무언가가 있다는 것을 발견하게 됩니다. 고전적으로는 '영혼'이라고 말하겠지만, 거기까지는 모르겠고, 저는 '소프트웨어'라고 부릅니다. 인간의 본질은 하드웨어가 아닌 소프트웨어이며, 둘 다 중요하긴 하지만 우리가 대상을 인식할 때의 본질적인 특징은 다름 아닌 소프트웨어에 있다고 말입니다.

    여기서 재밌는 것은 '배'는 물리적 실체에 기반해서 인식하면서 '테세우스'는 물리적 실체가 아닌 추상적인 무언가에 기반해 인식한다는 겁니다. 이건 모순이 아닙니다. 인간의 인식 체계가 가지는 복잡성이죠. 인간은 간단하고 구체적인 대상일수록 물리적 실체를 기반으로 판단하고, 복잡하고 추상적인 대상일수록 대상의 의미에 기반해서 (대충) 판단하는 듯 합니다. 즉, 판단 능력이 고도로 계층화되어 있으며 직접적으로 관찰이 불가능할수록 추론을 통해 이를 메꾸려고 든다는 말이죠.

    그러므로 이제 '테세우스의 배'는 중의적 의미를 갖습니다. 그게 다름 아닌 '테세우스의' 배라면 테세우스라는 대상이 직접 인식가능한 실체가 아니기 때문에 이건 사회적, 법적, 해석적 문제까지 확장됩니다. 동시에 '다수의 답을 갖는 질문'이죠. 하지만 테세우스의 '배'라면 이것은 관찰가능한 물리적 실체이므로 질문만 잘하면 답이 명확하게 나옵니다.

    결론적으로, '테세우스의 배'는 제 관점에서는 패러독스가 아닙니다. '장님 코끼리 만지기'라는 비유가 있는데, 장님끼리 모여있더라도 자기의 위치만 확실하게 인식할 수 있다면, 코끼리가 실존한다는 전제하에서 의견의 합치를 볼 수 있을 겁니다. 다시 제 원래의 주장으로 돌아가자면 '답의 불명확성은 단순히 질문의 불명확성에 기초하게 되는 셈'이며, 원래 본질적인 것도 아니고 철학자들이 합의만 본다면 해결되는 문제인데 정치/사회적인 문제일 뿐 이건 전혀 패러독스가 아니지 않느냐-라는 느낌입니다.

    긴 글을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변명을 하자면 인식이 원래 제가 다루는 주제다보니 저도 모르게 열중하고 말았군요.
  • 철학본색 2016/07/03 07:14 #

    의견감사합니다.

    1) 분석철학은 논리와 언어를 중시한다는 말씀이 맞습니다. 분석철학자들의 관심은 오직 옳은 말과 틀린 말을 구분하기 위한 언어의 규칙 문제입니다.
    사실 제가 ‘~인식하는데 그렇게 생각하는 근거가 뭔가?’라고 적은 것에서 오해를 불러 일으킬 수 있었겠다는 생각이 듭니다. 인격의 동일성 문제는 (분석철학적 주제이기 때문에) 인식론적 문제이지만 우리가 자아의 영속성, 의심할 수 없이 존재하는 나라는 문제를 다루기 위한 것이라는 점에서 동시에 존재론적 문제이기도 합니다. 무수한 차이에도 불구하고 우리의 직관은 두 시점의 배를 같은 배로 인식하는데, 두 배가 존재론적으로 여전히 동일하다고 말할 수 있는 근거를 찾는 것이죠. 다시 말씀드리면, 만약 우리가 두 배를 동일하다고 인식한다고 할 때, (1)우리의 인식 수준이 모든 변화를 포착하는 것이 현실적으로 불가능해서 혹은 (2)다른 배로 인식하는 것에는 실익이 없기 때문에 라는 견해는 우리가 여러 시점의 배들을 같은 배로 인식하는 사실적인 설명은 될 수 있지만, 존재론적 차원에서도 같다고 말할 수 있는 근거는 되지 않습니다. 원자 단위의 인식이 가능한 인간들로 구성된 가능세계에서는 변화를 인식하게 될텐데 그렇다고 해서 존재론적 차원에서 ‘배’가 달라졌다고 말할 수는 없기 때문입니다. ‘본질’ 자체에 도달할 수 없으니까 존재론적 문제까지는 다룰 수 없다는 결론도 물론 가능합니다. 그래서 알랭 바디우 같은 보편주의자의 경우는 언어에 천착하면 회의주의, 문화상대주의에 빠진다고 하죠.


    2) 테세우스의 배 패러독스는 ‘기계 뇌’ 이식이 가능한 경우 자아의 영속성을 다룰 때 자주 언급됩니다. “만약 기계 뇌를 부분적으로 혹은 전체적으로 나의 뇌에 이식한다면 나라고 할 수 있는가?”. 기계 뇌를 이식하더라도 정보가 같다면, (유빛님 말씀대로 소프트웨어가 같다면) 동일한 자아라는 견해가 있습니다. 이것은 테세우스의 배가 여러 가지 법적 증명서에 의해 동일한 배가 된다는 견해와 유비되지요. 이 경우 ‘자아=정보’가 되는데, 만약 이를 우리가 받아들인다면 다음과 같은 사고 실험이 가능합니다. 분석철학자들이 많이 드는 예인데요, 나는 지금 은하계 너머의 조난 당한 우주선에 탑승 중입니다. 지구에 돌아갈 방법은 없지만 대신 내 뇌의 정보를 스캔하여 전달해주는 전송기를 갖고 있습니다. 나는 절망적으로 내 뇌의 정보를 모두 스캔해 지구로 보냈습니다. 그리고 지구로 전송된 정보가 나의 복제인간, 즉 유빛님이 말씀하신 마네킹 같은 것이 지닌 기계 뇌에 이식됩니다. 이 경우 우주선에 탑승한 나와 내가 지닌 것과 동일한 정보를 가진 복제인간을 같다고 말하기는 어려운데 이 경우 인간의 본질적 속성이 소프트웨어에 있다고 할 수 있는가 하는 문제가 생깁니다. 사실 유빛님의 견해, 소프트웨어가 본질을 구성한다는 견해는 이 문제에서 가장 집중적으로 다뤄지는 문제 중의 하나입니다. 만약 정보 자체를 ‘나’라고 말할 수 없다면 정보의 총합이 같은지 다른지는 그렇게 중요하지 않게 됩니다. 나는 정보를 넘어선 무엇, 정보의 총합을 넘어선 무엇이 되는 것이죠. 테세우스의 배에 대해서도 두 시점의 배는 원소의 동일성 총합이 다르기에 두 배의 정보는 다를 수 있다 정도만 말할 수 있을 겁니다. 테세우스의 배도 원소의 총합 이상이 될 것입니다. 그럼 그 이상이 뭔가가 문제가 되겠지요. 이 쯤에서 분석철학의 견해를 대신한 프랑스철학의 견해를 가져오자면, 바로 이것이 ‘잔여’가 됩니다. 언어의 규칙만으로 말해질 수 없고 오직 볼 수밖에 없는 것이 있다는 것이죠. 데리다의 유령이나 흔적, 라캉의 대상a가 다 그런 잔여의 이념을 반영한 것들입니다.

    3) 우주선에 있는 ‘나’야말로 진짜 나라는 것이 (의심 불가능할 정도로) 우리 직관에 부합합니다. 유빛님께서 “좌표계의 변동(즉, 물체의 운동) 자체만으로 물체의 유일성을 부정하는 것은 직관에 부합하지 않습니다”라고 쓰셨는데, 이것을 분석철학자들은 인격에 대해서라면 우리가 자아영속성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라고 말합니다. 데카르트도 ‘생각하는 나의 존재는 의심할 수 없다’고 하는데, 테세우스의 배가 시사하는 바는 결국 ‘나’라는 것은 내가 영속적으로 존재한다는 하나의 믿음에서 생겨나는 환상에 불과한 것이 아닌가 하는 것입니다. 기계 뇌 개념은 이런 믿음이 환상이라는 것을 보여줍니다. 나라는 것은 뇌의 기계적 작용이 만들어낸 환상이다라는 거죠.(데카르트는 신체를 기계로 설명합니다) 다시 테세우스의 배로 돌아오자면, 테세우스의 배는 ‘뇌’가 없으니까 결국 그 배를 관찰하는 우리의 인식 문제지만, 이제 테세우스의 배를 동일하다고 말하는 나 자신의 동일성이 문제가 됩니다. 처음 말씀드린대로 존재론적 문제이기도 하다는 것은 바로 이런 이유입니다.

    4) 유빛님께서 말씀하신대로 인간의 인식체계가 복잡성을 가지고 있다는 말씀에 동의합니다. 질문을 잘하면 답을 찾을 수 있다는 말씀은 전기 비트겐슈타인을 연상시킵니다. 테세우스의 배 경우도 분석철학자들이 ‘자아’라는 것을 하나의 실체로 전제하는 근대철학의 견해에 대해 도대체 실체가 뭔지, 영혼이라는 것이 어떤 의미인지 분석적으로 묻기 위해 도입한 것입니다. 하지만 사실 테세우스의 배 패러독스가 제가 이번에 말씀드린 ‘인격의 동일성’ 내지 ‘기계 뇌의 문제’를 다루고 있다는 맥락을 고려하지 않고 접근하면 유빛님 말씀대로 해석의 여지가 많아진다는 것은 분명합니다.

    5) 질문이 명확하다면 답도 명확하다는 말씀을 주셨는데, 아마 거기에 대해 분석철학자들이라면 대부분 동의할 겁니다. 테세우스의 배 패러독스도 어쩌면 분석철학자들이 질문을 명확하게 하기 위해 노력하고 있는 과정에서 나왔고, 지금까지도 더 명확하게 질문하기 위해서 애쓰고 있는 문제일 겁니다. 정치/사회적 문맥을 제거하고 가능 세계까지 동원하는 것 역시 명확성을 위한 것이지요. 그에 비하자면 프랑스철학자들은 너무 빨리 ‘언어’를 명료하게 하는 것을 포기한 것인지도 모르겠습니다. 물론 거기에 이유가 없는 것은 아닙니다. 프랑스철학자들은 언어의 규칙보다 언어의 다의성을 훨씬 더 중요하게 다루고 있다는 점, 또 분석철학자들처럼 언어에 천착하면 회의주의적 결론에 도달할 수밖에 없다고 봤기 때문입니다. 유빛님은 동의하실지 모르겠습니다만, 테세우스의 배 패러독스의 경우도 패러독스임을 받아들인다면 말해질 수 없는 것이 무엇인지를 지시하는 문제라고도 할 수 있을 겁니다. 명료한 질문이 오히려 말해질 수는 없는 명료하지 않은 답을 가르키고 있는 것이죠.

    저 역시 긴글 읽어주신 점 감사드립니다
  • 유빛 2016/07/03 11:24 # 삭제 답글

    거칠고 날 것인 비유를 써서 견해를 피력했는데도, 책하지 않고 이리 세련되게 대답을 해주셔서 감사합니다. 철학은 역시 어렵군요.

    1) '무수한 차이에도 불구하고 우리의 직관은 두 시점의 배를 같은 배로 인식하는데, 두 배가 존재론적으로 여전히 동일하다고 말할 수 있는 근거를 찾는 것'이라는 표현에서 존재의 근거 자체가 우리의 인식, 즉 직관인 것 같은데... 나 이외의 것을 대상으로 한다면 (1) 인식이 존재를 보장하지 않으므로 존재 자체를 의심할 수 밖에 없고, (2) '나'를 대상으로 놓고 인격의 동일성 문제를 따진다면 아무리 '나는 생각한다. 고로 존재한다'를 1원칙으로 받아들인다고 해도, '인식 실패'의 가능성은 전혀 고려하지 않는건가-라는 의문이 드는군요. 인간의 인식은 성공할 수도, 실패할 수도 있고 (가령 인간인 내가 스스로를 새라고 생각하는 경우 / 내가 아닌 다른 인물이라고 생각하는 경우), 환각, 환청, 편집증 같은 여러 장애들이 존재하는데... 철학자가 아닌 입장에서는 '철학자들이 모든 인식 결과를 맞다고 가정하고 문제를 풀려고 하기 때문에, 이건 풀리지 않는 문제를 만들어놓고 답을 내려는게 아니냐?'라는 생각이 듭니다. 이건 제가 허무주의나 극단적 상대주의를 피하기 위해 '철학적 회의주의'가 아닌 '과학적 회의주의'를 채택하고 있기 때문일지도 모르겠습니다.

    2) '기계 뇌'의 경우에는 저도 생각해본 적이 있습니다만 그 때 제가 내린 결론은 '정보의 복제라는 개념이 문제다'라는 것이었습니다. 정보 이론에서는 정보 자체가 하나의 물리적 실체로서, 정확히 말하면 세상의 모든 물체는 정보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이 때 정보의 이동과 복제는 엄연히 다른 개념입니다. 제가 제 정보를 복제한다고 하더라도, 그게 당연히 '나'는 아니겠지요. 만약 맞다면 나는 유일하지 않고 동시에 여러 곳에 존재하는 것인데 이건 직관에 부합하지 않으니까요 (이게 바로 형식논리학에서 동일율을 위배한다-라는 것 같습니다만...). 이렇게 보면 분명 정보만으로는 본질을 규정할 수 없어보이지만, 한가지 모순이 있습니다. 나를 '유일한 것'으로 정의한다면 애시당초 그것이 '복제 가능한가'라는 의문점입니다. 만약 불가능하다면 두 개의 나는 원래 불가능한 것이고, 가능하다면 유일한 나는 없는 것이니 어느 쪽으로든 모순이 발생하게 됩니다. 즉, 우리가 자아를 유일하고 연속적이라고 규정한다면, 이것은은 '복제 불가능한 소프트웨어'일 수 밖에 없다. 매체가 있어야하니 어느 시점에든 '형태'에 구속을 받기는 하지만 이것이 '물리적 형태에 대한 종속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라는 것이 제 결론이었습니다.

    가령 '나'라는 정보를 원자 단위로 직렬로 늘어놓는다고 해도, 형태가 변할 뿐 정보 자체는 변하지 않습니다. 이 때 원자 단위로 하나씩 공간 이동시키거나 혹은 복제 후 곧바로 파괴한다면, 복제의 문제는 생기지 않습니다 (왜냐면 나는 부분의 합이지만, 부분은 내가 아니므로). 이 과정에서 다소의 정보가 파괴될 수 있지만 정보의 잉여성(redundancy)을 고려하면 - 잔여라는 단어와 묘하게 겹치는군요 - 정보의 본질이 파괴되지는 않습니다. 그러므로 그 잉여성의 범위에서는 안전하게 '이동'이 가능한 것이지요. 또, 만약 자아의 유일성이라는 전제를 없앤다면 두 곳의 장소에서 동시에 '내'가 존재할 수 있는데, 완전하게 동일한 환경에 처해있지 않은 이상 바로 다음 순간에 이 두 개의 나는 서로의 유일성을 확보하게 됩니다. 입력값이 변하면 정보처리기계도 변경되니까요. 한 가지 가정을 할 수는 있겠는데, 자아라는 정보가 결정적인(deterministic) 알고리즘이라고 가정하고 완벽한게 동일한 환경에 놓는다면 동일성과 동질성을 구별할 수 없는데 그럼 어떻게 할 것이냐? 흥미롭지만 인식불가능한 대상에 대한 논의가 실제로 무슨 의미가 있는지는 모르겠습니다.

    3) '분석철학자들이 질문을 명확하게 하기 위해 노력하고 있는' 부분은 이해합니다만, 개인적으로는 모순이 내재한 상황을 가정하거나 불완전한 가정에 기반해서 답이 없는 질문을 만들어놓고 풀려고 한다-라는 느낌이 좀 드는군요. 과학적 회의주의에서 '과학적'이라는 부분을 빼버리면 회의주의만 남는데, 확고한 기반 - 전제 혹은 관찰 - 이 없다보니 아무런 결론을 못내리고 순환하거나 허무주의로 귀결될 위험이 높습니다. 언어와 논리를 중시하는 건 좋지만, 실체와는 분리된 '상징'만을 다루고 있어 회의주의의 함정에 빠지는게 아닌가 싶습니다. (기분 나쁘셨다면 죄송합니다) 하지만'내게는 확고한 것들이 분석철학자들에게는 아닌지-는 이해했습니다. 이게 '언어에 천착하면 회의주의적 결론에 도달할 수 밖에 없다'는 것이로군요.

    4) '테세우스의 배 패러독스의 경우도 패러독스임을 받아들인다면 말해질 수 없는 것이 무엇인지를 지시하는 문제라고도 할 수 있을 겁니다. 명료한 질문이 오히려 말해질 수는 없는 명료하지 않은 답을 가르키고 있는 것이죠.'라고 하셨는데... 정확한 지적입니다. 저는 장자의 '세상에 가을철 짐승 털 끝보다 더 큰 것은 없으니 태산도 그지없이 작다'라는 단어가 표현 그대로 역설적이라고 생각합니다. 본질적으로 중의적이며 비물리적인 표현이라 명확하게 표현할 수 없다. 명확하게 표현하면 그건 일부만을 가리킨다. '도라고 말할 수 있는 도는 도가 아니다'라고 말이죠. 다만 크다/작다는 본래 물리적인 실체가 아닌 관념이지만 '테세우스의 배'의 경우에는 '테세우스'라던가 '배'라는 대상 자체가 관찰 가능한 대상을 가리키는 것이기 때문에 역설로 생각되지 않는 것 같군요.

    답변해주셔서 감사합니다.
  • 철학본색 2016/07/03 12:51 #

    유빛님과 대화하며 저도 새로운 것을 많이 알게 되었습니다.

    저는 분석철학 전공자가 아니라 기분이 나쁠 이유가 없습니다. 물론 분석철학자들이라면 이런 대화를 정말로 재밌어했겠죠?^^ 철학자들 역시 인식오류는 철저히 고려하는데요, 제가 쓴 댓글에서 그런 점이 잘 표현되지 않았으리라 생각합니다. 어쩌면 풀리지 않는 문제를 만들어 놓고 답을 찾으려는 것 아니냐는 혐의가 있다 하셨는데 최소한 이 문제는 어떤 면에서는 그렇다고 해야 할 것 같습니다. 최근 철학이, 비트겐슈타인을 포함해, 어떤 신비주의로 전회하는 것은 그와 무관하지 않을 겁니다. 굳이 말하자면 인식이 문제가 된다고 할 때 존재론적 근거를 제공해주는 인식론적 근거가 무엇인가가 되겠지요. 나를 유일한 것으로 정의한다면 복제 가능한가라는 견해는 흥미롭습니다. 우주선 논증은 귀류논증이라 볼 수 있습니다. 만약 ‘나’를 ‘정보’로 본다면 말씀하신대로 어떤 문제에 봉착하는지를 가능세계를 끌어와 설명하는 것입니다. 나는 정보의 연속이 아니기에 설령 복제가 가능하더라도 그건 ‘나’가 아니다라는 식의 논증입니다.

    2)의 후반부에 쓰신 내용은 저 역시 완전히 동의합니다. 4)에 대해서는 배의 구성요소가 달라질 때 그것을 애초의 배와 같은 것이라 할 수 있는가에서 T0와 T1의 차이에 대해서는 다른 배라고 말하기는 직관적으로 부담스럽지만, T0와 T10에 대해서는 다른 배라고 말하는 것은 상당히 흔한 경우라 그 점에서 패러독스로 다뤄진다고 할 수 있습니다.(물론 이 역시 앞의 경우에 비해 사정이 조금 나을 뿐입니다) 이것은 관찰가능한 대상이라 하더라도 그렇게 자명해 보이지 않는 것이죠. 만약 다른 배가 되었다고 한다면 언제부터 다른 배가 되었는가, 만약 같은 배라면 왜 같은 배라고 말할 수 있는가 하는 문제가 있으니 말입니다. 정보의 잉여성에 대해서는 저도 더 알아보고 싶습니다.

    말씀 나눌 수 있어 기뻤습니다. http://plato.stanford.edu/entries/identity-time/ 흥미가 가실 소개글이 아닐까 싶습니다.

  • 유빛 2016/07/03 15:04 # 삭제 답글

    제가 이것저것 일방적으로 물어봤기 때문에 혹시 조금이라도 도움이 될까해서, 제가 전공하는 '인공지능'의 관점에서 '테세우스의 배'에 대해서 간단하게 풀어보고자 합니다. 그냥 재미로 들어주셨으면 합니다.

    일단, 공학적 관점에서 테세우스의 배는 아주 말도 안되는 문제(뜬구름 잡는 문제)까지는 아니고 단순하게 '답이 여러 개이거나 초기조건에 따라 답이 변하는 불안정한 문제(ill-posed problem)'입니다. 그러니 공학자라면 우선 조건을 명확히 해서 답을 안정화하는 수준까지 단순화하거나 가정을 포함시켜 답을 찾을 수 있는 공간을 제한하려고 할 겁니다. 이건 분석철학자들이 질문 자체를 명확하게 하는 것과 같군요.

    컴퓨터가 이 질문에 답을 하는데는, (사람도 마찬가지지만) 연역 추론을 사용하거나 귀납 추론을 사용해야 합니다. 연역 추론을 사용한다면 지식 기반(rule-based, knowledge-base)으로 진행하게 되는데, 이 때 논리적 애매모호함은 모두 사라지게 되므로 모순이 사라지게 됩니다. 가령 '~의 배'는 소유를 의미하거나 타고 있을 때를 의미한다.라고 명확히 선언을 해놓는 것이지요. 기존에 있는 논리 술어를 확장해서 '이것은 테세우스의 배다'라는 논리적 증명을 찾기 때문에 '그렇다'거나 '그렇지 않다', (전제가 잘못된 경우) '모순이다'가 결과로 나옵니다. 물론 대답할 수 있는 공간은 지식의 조합으로 규정되기 때문에 지식이 많이 필요하겠지요. 이게 80년대까지는 주류였습니다.

    만약 귀납추론을 한다면 확률적 방법 / 정보 이론 기반 방법 / 인공신경망 / 확률 그래프 기반 방법 등을 사용하게 되는데, 이 경우에도 결과는 대답에서 가장 확률이 높은 대답을 찾거나, 제약조건 하에서의 확률이 가장 높은 대답을 하게 되므로 명확한 답이 나오게 됩니다. 사람하고 좀 다른 점이 있다면, 정보량만 충분하고 하드웨어만 허락한다면 문맥에 따라 대답이 (인간은 할 수 없을 정도로) 세분화될 수 있는 것이겠죠. 물어보는 사람이 몇 살인지, 어디에 있는지, 성별은 무엇인지, 날씨가 어떤지와 같은 요소들까지 모두 포함해서 가장 확률이 높은 대답을 할 수 있습니다. 즉, 대답은 모델을 얼마나 복잡하게 가져갈 수 있는지에 따라 결정됩니다. 만약 철학자들을 전수조사해서 테세우스의 배에서 고려해야할 요소들을 전부 수집하고 답을 수집해서 학습하면 인간은 보통 생각할 수 없는 모든 요소의 조합을 이용해서 답을 설명하려고 시도할 겁니다. 이것이 가장 기본적인 원칙인 경험적 오류 최소화(empirical risk minimization)이고 필요에 따라 가장 단순한 가설을 지지하는 구조적 오류 최소화(structure risk minimization) 를 하기도 하지요. 혹은 대답을 거절(reject)할 수도 있겠는데, 이 경우에는 주로 대답의 비용(cost)을 고려하게 됩니다. 잘못 대답하면 이것이 얼마의 비용을 가져올 것이냐를 생각해서 만약 비용(cost)과 효용(utility)이 뚜렷하지 않다면 거절을 하게 되겠죠. '모름. 자신없음'이라고.

    위에서 제가 명확하다고 했는데, 사실 이건 어디까지나 '대답이 가능하다'는 것일 뿐, 현재의 기술로는 그 인과 관계를 설명할 수는 없습니다. 그러니 어디까지나 '기능적으로 모방해서 구분이 불가능하다면 그것은 동일한 것이다'라고 생각하는 '튜링 머신 관점'에 편향되어 있습니다. 중국어방 논쟁에서 '기능의 모방이 정말 지능인 것이냐?'라는 반론이 나왔지만, 사실 최근의 경향은 '그런거 모르고, 일단 돈이 되니 기능만 모방해도 그게 어디냐'라고 할까요. 알파고가 이세돌을 이긴게 중요하지 그게 실제로 지능적인 것인지 아닌지는 사람들이 중요하게 여기지 않는 것처럼 말입니다.

    이처럼 결국 인공지능이 하는 일은 사람들의 인식의 메커니즘을 밝혀내서 모방하고 복제하는 것인데요. 기초적이기 그지없지만 일부 학자들은 인공 윤리, 인공 감정, 인공 창의성에 대해서도 연구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철학자들의 견해를 듣는 것은, 제게는 오래전부터 인간이라는 테마를 가지고 분석해온 사람들의 견해를 참고하는 것과 다를 바가 없지요. 차이는 철학자들을 밝혀내고,. 인공지능 연구자들은 그것을 실체화한다는 것입니다. 먼 미래에 '인공 철학'이라는 분야가 생긴다면 실로 흥미롭지 않을 수 없겠습니다. ^^

    감사합니다.
  • 철학본색 2016/07/03 22:35 #

    제가 분석철학을 더 깊이 알았다면 유빛님과 더 흥미로운 대화를 할 수 있었을텐데 그러지 못해서 유감입니다. 지금 남겨주신 글도 제게는 큰 도움이 됩니다.특히나 귀납추론하여 적어주신 부분은 정말 흥미롭게 읽었습니다. 감사합니다.

    유빛님께서도 블로그 운영하시는지요? 저도 유빛님 블로그에서 포스팅해주시는 글을 통해 배울 수 있다면 좋을 것 같습니다^^
  • 유빛 2016/07/04 12:49 # 삭제

    도움이 되었다니 다행입니다. 저만 배워가는 듯 싶어 '이건 좀 불공평한 것 같다'라고 생각하면서도 '이런 기초적인 걸 말해봤자 상대방에게는 도움도 안되는거 아닌가?' 싶어서 염려가 되었습니다. 개인적으로는 홈페이지를 하나 갖고 있습니다만, 다른 사람에게 알리거나 하지는 않고, 개인적인 기록들을 모아놓는 장소로 사용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공개로 돌려놓은 것들은 지나가는 상념을 끄적거려 놓은 것 뿐이라, 솔직히 좀 부끄러워서(...) 알려드릴 수가 없군요. 네이버 댓글이나 블로그 운영하는 사람들이 서로 싸우는 것을 보면, 블로그를 운영하고는 싶지 않고, 그래도 사람들이 어떻게 생각하고 있는지는 알고 싶어서 이래저래 살펴 보는 정도 입니다.

    이번에는 '사실 이 배가 테세우스가 탄 배인가, 소유의 배인가 는 이 문제를 다루는 분석철학자들은 거의 고려하지 않습니다'라는 한 마디를 보고, '그게 가장 중요한 것 같은데, 그걸 빼고 도대체 뭘 고려하는걸까...? 알고 싶다. 궁금하다. 얘기해보고 싶다'라는 생각이 너무 강하다보니 도저히 참을 수가 없었군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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