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직논리라는 악마 by 잡문가

매일신문에 오늘 나간 글.
조직논리, 관료주의, 서열주의의 악마성을 간파했기에 예수는 말구유에 태어나 세상의 가장 높은 자리에 서게해주겠다는 사탄의 유혹을 이기고, 당나귀를 타고 예루살렘에 들어가 십자가에 못박히는 방법으로 왕이 된 것일지도 모르겠다. 바리새인도, 본디오 빌라도도 모두 '관료주의적 조직논리' 속에 갇혀 있던 자들이 아니었던가. 예수가 베드로에게 사탄이라 불렀던 것도 그가 예수에게 세상의 왕이 되어야 한다고 말했던 때가 아니던가. 이런 이야기를 K와 나눴지만 여기에 다 쓰진 못했다. K의 '영적 싸움'은 지금부터다.
















조직논리라는 악마 (매일신문 2017년 10월 10일)


대학에 갓 입학한 K는 교회에서 파키스탄 선교사의 선교 보고를 듣고 충격을 받았다. 이슬람 사회에서 여성의 삶은 남자의 부속품에 지나지 않고, 한 십 대 소녀가 교육도 받지 못한 채 성폭력 위험에까지 노출되었다는 이야기에 K는 눈물을 흘렸다. 복음의 힘으로 폭력적인 남존여비 문화로 상처받은 이슬람 여성들을 돕고 싶은 마음에 자신도 선교사가 되겠다고 다짐했다. 지금은 가기 어려운 곳이 되었지만 아프가니스탄 카불, 파키스탄 라호르, 페샤와르 등 또래가 유럽 여행을 갈 때 그녀는 전운이 감돌던 지역으로 향했다. 


누구도 선교사가 되겠다는 K의 열정을 꺾을 수 없을 것 같았지만 생활의 벽은 쉽게 넘을 수 없었다. 선교사로 파송받기 위해선 생각보다 많은 자격이 필요했고, 자격을 얻기 위해서는 예상보다 많은 돈이 들었다. 하는 수 없었던 K는 학위 후 필요한 돈을 마련코자 취업을 준비했다. 임용 고시에 합격해 학교 상담교사가 되었고, 얼마 지나지 않아 결혼을 했고, 두 아이의 엄마가 되었다.


K는 교사로 부임하고 얼마 있지 않아 신이 자신을 왜 이슬람 세계가 아니라 학교로 인도했는지 알게 되었다. 스무 살 때 선교사에게 들은 이야기보다 더 무서운 일들을 일상적으로 마주하며 학교야말로 선교지라고 생각했다. 가정폭력과 우울증, 성추행 등 도움을 필요로 하는 학생들을 만났다. 


하지만 K의 열정이 냉정이 되기까지는 오래 걸리지 않았다. 본격적인 상담이 시작되기도 전에 서류를 꾸미는 일에, 문제아가 말썽을 일으키지 않게 잘 관찰하라는 교장의 말에, 큰일 만들지 말고 적당히 졸업만 시키라는 행정실의 엄포에 불안감이 커져갔다. 소위 ‘사건’이 터져 카프카가 소설 ‘성’에서 말하는 것처럼 “과오가 있을는지도 모른다는 가능성은 전혀 계산에 넣지 않는 것이 관청 사무의 원칙”을 어길까 봐 두려웠다. 진급에 노심초사하는 교감은 매일 K를 불러 주의를 줬다. 


며칠 전 K와 만났다. 그녀는 내게 학교 행정 시스템이 ‘악마’인 것을, 복음의 적은 이슬람이 아니라 조직논리인 것을 아느냐고 했다. 그녀다운 물음이었다. K는 작은 행정 실수로 감당할 수 없는 책임을 지게 될까 두렵다고 했다. 그래서 윗사람들이 ‘시키는 대로’ 아이들을 내담자가 아니라 민원인으로 대했고, 상담가가 아니라 관료로서 만났다고 했다. 정의를 위해 검사가 되었고, 나라를 위해 정치인이 되었고, 사람을 구하고자 의사가 되었고, 영혼을 위해 종교인이 되었지만 우리의 초심은 ‘조직논리’ 앞에선 왜 이리 초라할 정도로 무력한 것일까. 생계 때문일까? 욕망 때문일까? 조직논리에 지배당하지 않고 심지어 변혁시키는 힘은 대체 어디에서 오는 것일까. 이러한 K의 깊은 고뇌에 답이 있을 리 없다. 하지만 니체의 말대로 자명한 사람들과 고독한 사람들 사이에는 싸우는 투사들이 있다. 고뇌하며 싸우는 것, 거기에 인간의 구원이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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