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예 12년 (12 Years a Slave, 2013) by 잡문가

노예 12년 (12 Years a Slave, 2013)
스티브 맥퀸 감독

1. 주인은 노예를 죽이지 못한다.

이것은 하나의 법칙 같은 것이다. 노예는 재산이기 때문에 자의대로 할 수 있을지언정  그 '자의' 안에 노예를 죽이는 것은 포함되지 않는다. 영화에서도 플랫의 주인이었던 포드나 옙스 모두 노예를 자기 손으로 죽이지 못한다. 죽어가는 노예를 방기하는 것과 노예를 죽이는 것은 다른 이야기다. 죽어가는 노예가 있다면 노예를 살리는 비용과 그 노예의 활용 가치를 비교할 것이다. 그러나 결코 주인은 노예를 죽이지는 못한다. 다시 말하지만 노예는 재산이기 때문이다.  그건 비교적 인간적인 주인인 포드에게나, 비인간적인 주인인 옙스에게나 마찬가지로 적용된다. 목화를 많이 따는 여자 노예라면 아내가 팔아라고 종용해도 팔지 않는다. 노예의 자식과 노예가 생이별하는게 마음이 아프더라도 노예의 자식이 너무 비싸면 생이별도 가능하다. 그러나 죽이지는 못한다. 주인은 노예의 생명을 철저하게 '관리'한다. 노예가 스스로 목숨을 끊는 것도, 노예에게 매질하더라도 노예가 죽는 것도 허용되지 않는다. 적당하게 밥을 주고, 공포심을 주고, 정신을 마비시키는 방식으로 노예의 생명을 관리한다. 

영화에서 팻시는 플랫에게 다가가 죽여달라고 부탁한다. 플랫은 간곡한 팻시의 청에도 뒤돌아 눕는다. 노예를 죽일 수 있는 것은 노예 뿐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노예가 스스로 목숨을 끊지는 못한다. 노예는 죽어가지만 죽을 수는 없다.

포드의 노예 관리자를 폭행한 플랫은 진흙 속에 까치발을 딛고서 목이 매달린 채 '꺼어 꺼어' 소리를 내고 있다. 진흙 위에서 발을 부지런히 움직이지 않으면 숨이 막혀 죽을 수밖에 없는 상황이다. 플랫은 간신히 살아있다. 진흙 속에 발을 딛고, 목은 나무에 걸린 채 겨우 겨우 힘겨운 소리만 내며 살아가고 있다. 다른 노예들은 그를 뒤로하고 작업량을 채우기 위해 일하러 나갔다. 포드의 자녀들은 집 앞 정원에서 행복한 한 때를 보내고 있다. 

2. 솔로몬 노섭이 플랫이 되었다. 플랫은 노예가 된 솔로몬 노섭의 이름이다. 주인과 싸우는 것이 불가능한 상황이라면 주인에 대해 할 수 있는 유일한 저항은 자살이다. 그러나 영화에서는 노예가 자살하는 장면은 나오지 않는다. 플랫이 자살하지 않는 이유는 오직 뉴욕에서 자신을 기다리고 있을 가족들 때문이다. 그는 자유민이었기에 자유민으로서의 삶을 끝내 포기하지 않는다. 플랫은 주인 때문에, 혹은 자신 때문에 죽지 않은 것이 아니다. 오로지 가족 때문에 삶을 포기하지 않는다. 

3. 팻시의 엄마인 쇼는 주인에게 잘 보여 노예의 신분에서 벗어난다. 즉 주인의 첩이 되었기에 더 이상 목화를 따지 않아도 된다. 쇼는 딸 팻시에게 주인인 옙스가 자신의 몸으로 들어오려면 주저하지 말고 몸을 내주라고 가르친다. 그렇게 살아남으라는 것이다. 그러나 옙스의 아내가 이를 용인할리 없다. 그녀는 팻시를 폭행하고, 그녀로 하여금 씻지도 못하게 한다. 팻시는 단지 비누 하나 때문에 등이 다 패일 정도의 채찍질을 당한다. 그리고 팻시에게 채찍질을 가하는 사람은 팻시를 아꼈던 옙스도, 그의 아내도 아니다. 팻시가 죽여달라고 간청했던, 믿을만한 사람, 바로 플랫이었다. 플랫은 옙스의 명령에 따라 팻시에게 고통스럽게 매질을 한다. 팻시가 옙스에게 자신의 생명을 지켜 달라고 간청하면서 '자신이 하루에 목화를 가장 많이 생산한다'는 것이다. 쇼는 팻시에게 몸을 내주라고 하고, 플랫은 팹시의 등에 매질을 가한다. 팻시는 옙스에게 몸을 주고, 매질을 당한다. 주인은 노예를 적대시하고, 노예는 노예의 등에 매질을 한다. 어디서 많이 본듯 한 그림 아닌가.

4. 주인은 노예들에게 주일마다 설교를 한다. 여기서 설교, 성서의 기능은 노예에게 두려움을 주고, 주인에게 자발적으로 복종하도록 만드는 것이다. 신은 백인을 위한 것이다. 주인은 노예를 가졌고, 돈을 가졌고, 땅을 가졌고, 성서를 가졌다. 흉작이 오는 까닭은 옙스의 신앙에 따르면 노예들의 불신앙 때문이다

5. 플랫은 노예 생활을 12년으로 종지부를 찍을 수 있었던 것은 베스의 도움이 결정적이었다. 베스는 캐나다 출신으로 이곳 저곳을 옮겨 다니며 건물을 지어왔다. 그는 노예제에 대해 근본적인 의문을 갖는 영화의 거의 유일한 인물이다. 베스를 보면 사고가 경직화되는 것에는 양심이나 신앙의 선량함 따위와는 상관 없이 장소나 공간의 '이동성'과 관련이 있다는 생각이 든다. 공간을 끊임 없이 이동하는 것, 장소를 옮겨 다니는 삶이 어떤 삶이든 상대화 시키는 것이리라. 그래서 반성이니 성찰이니 하는 것이 앉아서 책본다고 생기는게 아니다. 기도한다고 생기는게 아니다. 생활 정치나 생활에서의 철학, 반성은 '옮겨 다니는 것'에 근원적으로 기초하고 있다. 데카르트, 아도르노, 리쾨르 등등 교조가 아닌 사람은 언제나 이동하는 사람들이었다. 
 
6. 자유를 되찾은 플랫이 가족을 만난 후 첫 마디는 '미안해요' 였다. 그리고 그의 아내는 '미안해 할 것 없어요'라고 한다. 오래 기다리게 한 것에 대해, 수많은 질문과 가난 속에서 살도록 한 것에 대해 그는 미안했다. 어떤 체제가 잘못되었는지 그렇지 않은지는 미안함의 조건을 따져보면 판단할 수 있다. 노예 플랫은 자신이 살아남기 위해 다른 노예들에게, 자신의 가족들에게 끊임 없이 미안해 해야했다. 만일 우리 사회가 가족들에게, 동료들에게, 이웃들에게 이런 형식의 미안함을 계속적으로 생산해내고 있다면 본질상 살아남기 위해 자신만 생각하지 않으면 안되는 노예제와 같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2011년 장애인 아들이 자신의 존재 때문에 수급 대상자가 안된다는 것을 알고 스스로 서울 한복판에서 목을 매단 50대 아버지의 마지막 말도 '아들에게 미안하다'는 것이었다. 지난 2월, 마지막 집세와 공과금을 남겨두고 목숨을 끊은 세 모녀의 마지막 말도 '주인 아주머니 죄송해요' 였다. 이들을 돕지 못해 '미안하다'.

플랫이 뉴욕으로 마침내 돌아간 후 솔로몬 노섭이라는 이름을 찾고 이후 책을 내고 강연을 하며 노예제의 폐단을 알리며 삶을 보낸다. 솔로몬 노섭이 어떻게 죽었는지는 알려지지 않고 있다고 한다. 중요한 것은 그의 죽음이든 그의 삶이든 그것이 이웃, 남부의 고통 받는 다른 흑인들, 인신 매매의 위험에 노출되어 있는 흑인 동료들을 향해 있었다는 사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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