야곱의 씨름, 광기의 결단 by 잡문가

  • 나는 어떤 문제를 깊이 고민하고 있다. 어떤 선택을 두고 계속된 고민이 이어진다. 내 생애 전반에 결정적인 영향을 줄 수도 있는 문제라고 여겨질수록 고민은 깊어진다. 나는 이 문제를 두고 끊임 없이 대화를 이어간다. 의논은 토의로, 토의는 토론으로, 토론은 논쟁에서, 논쟁은 감정적 싸움으로까지 발전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어떤 선택을 해야 할지 판단하기는 어렵다. 답을 찾기 위해 나는 정보를 모은다. 가능한 더 나은 판단을 하기 위해 정보를 읽고, 분석하고, 종합한다. 하지만 정보는 미래를 판단하는 답을 주지 못한다. 정보를 통한 선택은 정보에 기대고픈 나약의 결과이지, 성찰의 결과가 아니다. 정보를 명령으로 여길 때, 정보는 타락한 것이 된다. 정보에서 답을 찾기를 포기하고 나면, 여기에 나 자신의 어두운 욕망이 개입되어 사고를 왜곡하는 것은 아닌지 검토하게 된다. 어제까지는 A를 선택해야겠다는 결론으로 잠이 들었다. 아침이 되면 A의 위험성이 다시 나를 엄습해온다. 다시 B를 선택해야겠다는 마음으로 기울었다가, A를 선택해야 한다는 가까운 이의 말에 마음은 다시 흔들린다. 나는 어떤 혼돈으로 들어간다. 그리고 그 혼돈은 어떤 선택을 해도 최선일 수 없다는 절망의 혼돈이다. ‘정답'은 보이지 않는다. 명확해 보였던 것조차 명확하지 않다. 삶을 ‘모순'과 ‘분열'로 부르는 문장이 떠오른다. 혼돈 속에서 기도할 때조차, 신의 목소리는 들리지 않는다. 대신 나는 이 어둠, 영혼의 심연이야말로 신비임을 조용히 고백하게 된다. 어떤 결정일지라도, 신은 내 결정을 당신의 섭리로 이끌어 갈 것이라는 고백, 신비의 고백으로. 겸손의 고백으로, 찬미의 고백으로. 

  • 너무나 고통스러운 고민은 어떤 선택이 갖는 ‘의미'를 더 깊게 이해하도록 만든다. 어떤 선택일지라도 아름다운 것으로 만들 것이라는 ‘믿음’이 생길 때, 우리는 비로소 ‘판단'하고 ‘결정'하게 된다. 그 때의 결정은 때로는 비상식적이고, 강한 반직관적 선택이라 누군가에게는 광적인 것, 미친 선택처럼 보인다. 납득되지 않는다. 이해되지 않는다. 조롱당한다. 비웃음당한다. 하지만 이 광기의 결단이 믿음의 증거가 된다. 어떤 결정을 해도, ‘벗어나지 않을 것'이라는 믿음. 그 믿음으로 우리는 광기의 결단, 오랜 죄를 그만두기로 하는 결단, 이익을 버리는 결단, 내 아이를 맡기는 결단, 신에게 내 몸을 드리는 결단, 실존을 뒤흔드는 결단에도 불안 대신 평화를 누리게 되는 것이다. 


  • 천사와 씨름한 야곱. 실존과 생을 내건 온전한 고민. 에서에게로 나아갈 것인가, 말 것인가. 신은 야곱에게 에서에게 가라고 말했는가. 그것은 야곱에게 주어진 답이었는가. 만약 야곱이 에서에게 용서를 구하러 가지 않았다면 신은 섭리하지 않으셨을 것인가. 뼈가 부서질 정도의 고통스러운 고민, 대화, 기도는 야곱이 혼돈으로 들어가, 신비를 경험하고, 목숨을 건 결정을, 광적인 저지먼트를 하도록 했고, 신의 섭리를 구하게 만든다.


  • 혁명가의 혁명을 위한 결단. 여기에도 ‘광적인 선택', 광기의 결단이 있다. 혁명은 불꽃 같지만 성공하기 어렵다. 그럼에도 혁명가는 어떻게 혁명을 선택하는가. 그 선택에는 야곱의 씨름이 있다. 혁명을 위한 선택을 할 것인가 말 것인가 하는 지독할 정도로 계속되는 불면의 고민. 동료와의 토의와 토론, 오래 계속되는 갈등은, 혁명가에게 무언가를 선택하도록 촉구한다. 그 때의 결단이 야곱이 에서에게 나아가도록 하듯이, 혁명가가 혁명을 시도하게 만든다. 야곱의 씨름이 없을 때, 혁명은 타락한다. 실존을 내건 고민이 부재할 때, 혁명가는 혁명을 명분으로 광장을 피로 물들인다.


  • 민주주의는 답이 없는 문제에 대한, 다양한 의견의 각축과 갈등을 촉진하고, 종국에는 선거라는 결단으로 우리를 이끈다. 그것은 집단적 선택, 집단적 광기의 결단이다. 하지만 이것은 소수 의견에 대한 묵살이나 폭력적 침묵만을 의미하지 않는다. 어떤 선택이든 민주주의라는 시스템이 더 나은 방향으로 인도해줄 것이라는, 민주주의적 섭리에 대한 믿음이 작동한 결과이다. 저지먼트가 ‘쉽게' 이뤄진 것이 아닐수록, 저지먼트는 소수에 대한 폭력의 가능성이 줄어들게 된다. 민주주의의 타락은 야곱의 씨름이 없을 때 발생한다. 결단이 제비뽑기가 될 때, 민주주의는 섭리를 버리게 된다.


  • 정신분열증을 가진 딸을 돌볼 것인가, 아니면 사회적 책임을 다할 것인가에 대한 여기 한 교수의 고민이 있다. 분열적 문제에 대한 고민이 두터울수록, 결정하기 어려운 문제에 대해 어떤 선택도 광기의 결단이 될 수밖에 없을 때, 선택은 배제된 선택을 배제하지 않는다. 대화는 혼돈은, 혼돈은 신비를, 신비는 광기를, 광기는 결단을! 광기의 결단, 저지먼트는 상대화되지도, 해체되지도 않는다.


  • 답이 없는 문제에 대한, 신비에 다가서는 혼돈을 두고 계속되는 진통을 가져오는 고민이 있다. 고민이야말로 광적인 선택을 낳고, 그 선택이 결코 실패가 되지 않도록 만든다. 온전한 고민은 결단코 실패하지 않는다.


덧글

  • 2020/06/02 23:22 # 답글 비공개

    비공개 덧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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