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박육아는 어떻게 죄가 되나 by 잡문가

아이를 키우면서 생각해 본 부모인 내 죄와 신앙의 개념들
교제, 원죄, 불안, 죄책, 선, 섭리 그리고 믿음


1.1 독박육아는 어떻게 죄가 되나

외로움은 불안함을 낳는다. 나 혼자 뿐이라는 생각은 어떤 일을 더 무겁게 느끼도록 만든다. 일만이 아니라 삶에 대해서도 그렇다. 내가 어려움에 처해도 아무도 나를 도와줄리 없고, 주변 사람들은 모두 적, 적이 아니라도 경쟁자라는 식의 생각은 삶을 무겁게 만든다. 일이 무겁고, 삶이 무거우면 버티지 못할 것 같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 일과 삶을 혼자 짊어지고 있다는 외로움은 그래서 낭만적이지 않다. 외로움은 삶을 무거운 것에서 결국은 무서운 것으로 느끼도록 만든다. 삶에 대해 느끼는 막연한 무서움, 그것이 바로 불안이다.

불안함은 분노를 낳는다. 아무도 나를 돕지 않는다는 것을 실존적 차원에서 실감하면 세상에 대해서, 주변에 대해서 분노하게 된다. 어떻게든 버텨야 한다고 생각할수록 분노는 더 폭발적으로 일어난다. 불안함에 지배되는 순간 합리적인 사고는 마비되고, 내 삶을 방해하는 것들에 대해서 화를 내게 된다. 분노가 폭발되면 주변의 사람들이 사라진다. 내가 도우려고 했던 이들도 나와 만나는 것을 꺼리게 되고, 결국 나는 다시 혼자만 남게 되었다는 감각으로서 외로움을 느끼게 된다. 아무도 나와 함께 해주지 않고, 나를 돕지 않고, 내가 하지 않는다면 버틸 방법은 없다는 생각에 사로 잡히며 불안감을 느끼고, 다시 화를 내게 된다.

이를테면 혼자 하는 육아에 대해서 생각해보자. 전업주부는 물론, 워킹맘도 육아휴직을 내면 아이를 돌보는 임무는 오로지 엄마의 것이 된다. 내가 아니면 아이를 봐줄 수 있는 사람이 없다고 느낄 때, 그 외로움이 내 삶이 아이로 인해 무거워졌다는 감각을 낳고, 그 감각은 내 삶이 이전과 같지 않을 수 있다는 불안을 낳는다. 그러다가 여러 조건이 합해져 고립 육아의 시간의 길어지면 아이는 엄마의 분노가 쏟아지는 대상이 된다. 아이가 학령기가 되면 그런 경향은 더 강해진다. 학교, 학원을 보내고는 있지만 교사와 강사를 온전히 믿을 수 없다고 느끼는 부모라면, 내 아이를 내가 챙기지 않으면 안 된다는 강박관념을 갖게 된다. 그 감각의 외피를 드러내면 외로움이 드러난다. 교육 정보를 주고 받는 학부모 모임의 에너지도 어쩌면 각자도생의 외로움일지도 모른다.

외로움의 렌즈는 내 아이 주변의 아이들을 ‘친구’가 아니라 ‘경쟁자’로만 인식하게 만든다. 내 아이는 경쟁자로 둘러싸여 있고, 학교 교사도 책임 있게 내 아이를 돌봐주지 않고, 내가 나서지 않으면 안 된다고 생각하게 되면 불안이 만들어진다. 불안감이 커지면 교사를 향해 분노하게 하고, 아이 주변 아이를 적대적 감정으로 보게 되고, 내 아이의 천진한 아이다움에 대해서조차, 예를 들어 사소한 거짓말, 거친 장난, 게으름, 딴 짓, 놀고 싶어 하는 마음, 늦잠에 대해서까지도 화를 내게 만든다. 그리고 여러 가지가 겹친 날은 분노가 폭발하고, 엄마든 아빠든 깊은 자책감에 빠져들고 자신에 대해서 화를 내게 된다. 부모의 자책감은 아이의 죄책감이 된다. 자책하는 부모를 보며 아이는 잘못된 자아상을 갖는다. 부모가 주지 말아야 할 것 중 가장 나쁜 것, 그게 죄책감이다.

외로움은 불안을, 불안은 분노를, 분노는 자책을, 자책은 죄책을 낳는다. 다른 누구도 아닌 내 아이의 ‘죄책’을. 인간의 원죄가 있다면, 그건 외로움이다. 스카이캐슬에서 예서 엄마 한서진도 외로움에서 출발했다. 그리고 자기가 나서지 않으면 이룰 수 없다고 느꼈고, 예서 친구를 적으로 간주하고 비싼 코디를 고용했다. 기준 서준 아빠 차민혁도 아이 주변의 모든 아이들을 적으로 간주한다. 아이가 잘하지 못하면 불안했고, 분노가 자주 폭발했다. 거듭 말하지만 외로움은 낭만적이지 않다. 혼자 있다는 것은 위험하다는 것이다. 한서진과 차민혁은 아담처럼 보인다. 성서에서 아담의 원죄도 혼자 있을 때 일어난 것이다. 아담은 외로워서 불안했고, 분노는 하와에게 향했다. 이것은 우리가 달라지기 위해서는 외롭지 않아야 한다는 것을 말한다. 이 세계가, 우리 사회가, 공동체가, 이웃, 친구, 교사, 부모가 나에게 ‘친절’을 베풀고 나를 좋아해준다는, 세계를 인식하는 근본 감각 자체가 변화해야 한다. 그런 감각은 교만함을 줄여준다. ‘나 아니면 안된다는 감각’, ‘나 혼자서 해낼 수 있다는 믿음’, ‘아이에게 부모의 영향이 절대적이다’는 식의 생각이 모두 교만함이다. 예를 들어 아이가 커갈 수 아이에게 영향을 미치는 요소는 많아지고, 정도도 달라진다. 부모 말고 다른 영향 요소가 생기고, 부모의 영향 정도는 작아진다. 교사로부터, 친구로부터, 인터넷 어느 사이트로부터, 자연으로부터, 아이의 내적 기질로부터, 온갖 요소로부터 아이에게 미치는 요소들이 혼합작용을 일으키고, 인간을 성장시킨다. 우리가 그 모든 요소를 통제할 수 있다는 믿음, 그게 교만, 불신앙, 강퍅한 마음이다. 그 모든 요소들이 예측될 수 없는 방식으로 종합되어 결국은 우리를 올바른 방향으로, 더 나은 방향으로 인도할 것이라는 믿음, 그것이 약속에 대한 믿음, 섭리를 고백하는 삶이 된다.

1.2 부모의 통제, 관리는 어떻게 죄가 되는가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룬다’는 성서의 말은 자주 편의대로 해석되는 경향이 있다. 지금 나는 좀 힘들고, 어렵고, 곤란함에 처해 있지만 결국 이걸 다 지나면 복을 받을 것이라는 식으로 이 말을 이해하며 좋아한다. 나 역시도 마찬가지였다. 선을 복으로 이해하는 공리주의자적 심성과 달리 성서에서 말하는 선은 복이 아니다. 우리 각각에 영향을 미치는 모든 종류의 힘, 관계, 그것이 긍정적인 힘이든 중독이나 병과 같은 부정적인 힘이든, 혹은 보이는 것이든 보이지 않는 것이든 그 모든 것이 결국은 끝내 신적인 차원의 ‘선’으로 종결될 것이라는 믿음이다. 아이가 성장하는 데에 미치는 힘을 ‘부모’가 관리하겠다는 생각은 그런 점에서 신에 대한 도전이 된다. ‘미래에 대한 개방’이야말로 정의 그 자체라는 데리다가 한 말도 그래서 신학적인 주장이다.

2.1 부모는 언제 교만해지는가.

부모인 내가 잘하면 아이도 잘하겠지, 부모인 내가 모범을 보이면 아이도 잘하겠지, 이런 생각이 도덕적으로 보일지 몰라도, 부모를 외롭게 하고, 교만하게 한다. 한 인간은 부모를 포함한 여러 힘, 관계를 이끌어 가는 ‘섭리’가 성장시키는 것이다. 책 읽는 부모 밑에서 아이도 책을 읽는다는 말은 거짓말에 가깝다. 부모가 공부하면 아이도 공부한다는 말도 마찬가지다. 그럴 가능성이야 조금 증가할 수 있겠지만 모든 아이들은 부모라는 나무에서 멀리 떨어진 열매들(far from tree)이다. 부모인 나-학교-사회-친구-이웃-가족-교회 등 우리를 둘러싼 것들이 우리의 적, 경쟁자가 아니라 우리에게 우호적이고 친절하고, 나는 이들과 협력하고 연대한다는 인식의 전환이 있어야 ‘멀리 떨어진 열매들’을 두고도 안심할 수 있다. 세상 사람들은 멀리 떨어진 열매를 기다렸다가 훔쳐가는 도둑이 아니라는 믿음, 나도 그들을, 그들도 나를 돕는다는 믿음이 나를 좀 덜 외롭게, 덜 불안하게, 덜 분노하게 만다는 것이다. 코이노니아적 교제는 나와 우리가 세계를 좀 덜 적대적으로 바라보도록 도와주는 명령이 된다.

2.2 부모는 무엇을 믿어야 하는가

믿음이란, 보이지 않는 것을 믿는 것이다. 본다는 것도 철학적으로는 암묵적으로 믿는 행위라고 할 수 있겠지만, 우리가 암묵적이 아닌 의식적으로 믿고자 하는 것은 모두 ‘보이지 않는 것’이다. 혼자 방에 있는 아이가 무엇을 하고 있는지 불안하다면, 아이가 인터넷 게임에서 나쁜 영향을 받을 것이고, 거기서 만나는 사람들은 우리 아이의 시간을 좀 먹는다고 생각하고 있다면, 세계를 적대적으로 볼 뿐 아니라, 설령 아이가 혼자 방에서 몰래 게임이 주는 즐거움에 취해 있다고 해도, 그 모든 것을 아이가 견디고, 여러 힘과 관계의 종합으로 더 나은 ‘선’으로 인도해줄 것이라는 믿음이 부족한 것일지도 모른다. ‘모든 것이 합력해 선을 이루게 된다’는 것을 믿는다는 것은 아이가 바람직한 일만을 선택하는 것이 아니라 아이가 잘못된 선택을 할 수도 있다는 것까지 용인해주는 것에서 시작한다. 아이가 잘못된 선택을 하더라도, 아이에게 미치는 영향을 부모가 ‘통제’하지 않고 아이가 그 안에서 ‘섭리’를 보도록 응원하는 것이다. 남편에게든, 부인에게든, 동료에게든, 연인에게든 우리에게 ‘믿음’은 남편, 부인, 동료, 연인을 믿는 것이 아니라, 그들의 실수와 약점에도 불구하고 우주의 창조자가 우리 모두를 더 나은 쪽으로 이끌 것임을 믿는 것이다. 내 아이의 실수, 나쁜 습관, 유치함이 가져온 어둠은 여태 아이가 자라온 성장의 빛에 비하자면 아무 것도 잠식하지 못했다. 우리가 통제하려고, 관리하려고 노력해왔지만 결국 아이는 부모의 빛이 향하는 곳과는 다른 방향으로 자라고, 열매는 나무가 예상하지 못하는 곳까지 굴러간다.

나는 혼자가 아니다. 내가 아니라도 내 아이는 자란다.
세상은 나에게 적대적이지 않고, 내가 삶이 너무 무겁다고 느껴질 때 도울 것이다. 아이는 결국 그 힘들의 종합으로 자랄 것이다. 믿음의 대상은 ‘아이가 오직 건강한 것만 선택할 것’임이 아니다. 그건 부모인 나 자신보다 더 믿을 수 없는 아이를 믿겠다는 것이다. 우리 믿음은 ‘아이가 오직 건강한 것만 선택하지 않을 것임에도 결국은 빛이 있다면 빛을 향해 자랄 것임’에 관한 것이다.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게 될 것이라는 약속이 이 믿음을 보이지 않는 소망에 대한 증거로 정당화해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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