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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아리스토텔레스 1. 아리스토텔레스의 생애 아리스토텔레스Aristoteles는 기원전 384년 트라키아 북동 해변의 스타게이라라는 작은 도시에서 태어났다. 그의 부친은 마케도니아 왕의 주치의였고 이 가문은 (갈레노스에 따르면) 관습적으로 해부의 기술을 교육해왔기 때문에 아리스토텔레스의 생물학과 과학 일반에 대한 관심과 기질에 영향을 끼쳤을 것으로 본다. 17세에 아테네로 가서 플라톤의 아카데미아에서 20년을 보냈고,플라톤의 사상과 인품에서 깊은 감화를 받았지만, 플라톤이 후기에 수학과 방법론, 자연과학에 관심을 갖게 된 상황과 아리스토텔레스 그 자신의 기질 때문에도 그의 사상은 플라톤과 다른 길을 향하게 된다. 플라톤의 죽음 후 조카인 스페우시포스Speusippos가 아카데미아의 경영을 맡게되고, 아리스토텔레스는 헤르메이아스의 초빙을 받아 아테네를 떠나 아소스로 향한다.(기원전 348) 인접한 레스보스 섬의 미틸레네에 머물면서 생물학, 특히 해양생물의 다양한 생태에 대한 연구를 계속했다. 기원전 342년 필립포스왕의 초빙을 받아 13살의 알렉산드로스의 스승으로 마케도니아에 머물게 되는데, 이때부터 그가 정치에 관심을 기울이기 시작한것으로 보인다. 기원전 335년경 아테네로 돌아온 후 자신의 학원 리케이온(숲의 이름)을 세우고 산책로를 거닐면서 철학을 토론했고, 12년 동안 교육과 강론뿐 아니라 그의 주요 사상들을 발전시키고 특히 보편적 지식에 대한 비상한 관심을 보여주었다. 알렉산드로스 죽음 이후 불경죄로 기소되어 리케이온을 떠나 칼키스로 피신하여 기원전 322년 위장병으로 사망했다. 플라톤의 사유의 세계는 변화하는 사물들의 세계와 분리된 채 존재했지만 아리스토텔레스는 자신의 사고방식이 초시간적 존재의 정적인 영역보다는 생동하는 자연속에 뿌리 박기를 원했고, 생성의 동적인 영역으로 나아가게 했다. 2. 논리학 아리스토텔레스의 논리학은 과학과 밀접한 관련을 갖는다. 그의 논리학은 사유에 대한 연구, 실재에 관한 인간의 사유를 과학적으로 논증하고 분석하기 위한 도구이다. 이 과정에서 중요한 것은 일반개념들과 이들의 연결 근거가 되는 이치를 엄밀히 정리하는 것이다. 먼저 어떤 것을 논증하거나 증명하려면, 다루고자 하는 문제와 그 문제의 구체적인 종류, 그것과 관련된 속성과 원인들을 파악해야 한다. 아리스토텔레스의 범주categories는 모든 존재가 존재하는 방식과 실현되는 방식을 구체적으로 나타내 주는 것으로 과학적 지식에서 사용되는 개념들의 분류를 의미했다. 이 범주나 분류들은 정신의 인공적 피조물이 아니다. "그 사물은 그 자체"이기 때문에 술어들(범주)는 항상 주어들(실체들)과 관련되고, 술어들이 어떤 사물에 본유 되어 있다면 그 술어들은 그 사물에 속한 것이다. 사물의 본성에 대한 근본 전제와 정의가 파악되면, 논증적 추론이 가능해진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삼단논법>을 통해 최초로 연역추리의 기본요소들을 분석, 체계화했다. 그는 삼단논법을 <어떤 사물들이 진술되는 표현양식이며 진술되는것 이상의 어떤 것이 필연적으로 그 진술로부터 나타나게 되는 표현양식>이라고 정의했다. 이것은 내포의 원리이다. 삼단논법을 구성하는 명제들은 본질적인 속성에 관한 것인데, 아리스토텔레스에 의해<중명사>라고 불리는 소전제와 대전제의 단일명사는 그 자체가 다른 것 속에 존재하면서 그 자체 속에 다른 것을 내포하는 명사로서 이 두 전제를 연결시킴으로써 결론에 필연적으로 도달하게 된다. 아리스토텔레스는 결론이 그것의 전제들로부터 올바르게 추론되는 경우를 결정하는 규칙들을 고안해냈고, 19세기까지만 해도 철학자들은 삼단논법이 논리학에 관해 말할 수 있는 모든것을 구성하고 있다고 믿었다. 전제가 타당한 가정에 근거하지 않는다 해도 삼단논법은 논리적으로 사용될 수 있기 때문에 그는 세 종류의 추론을 구분지었는데, <일반적으로 인정되는 의견들>로부터의 <변증법적 추론>, <일반적으로 인정되는것 같지만 실제로는 그렇지 않은 속견들>로부터의 <논쟁적 추론>이 있다. 하지만 참된 과학적 지식이 이루어질 수 있으려면 사용되는 전제들이 속견이나 개연적 진리 이상의 것이어야 하고, 이러한 제1원리들archai 로부터 출발하는 것이 <논증적 추론>이다. 아리스토텔레스는 관찰과 귀납으로부터 제1원리에 도달할 수 있다고 했다. <우리가 어떤 사실들을 여러번 관찰하면 그곳에 존재하는 보편자는 명백히 나타나게 된다>는 것이다. 또, 어떠한 사실들에 작용하는 정신은 그것들의 진리를 <알고있기>때문에 우리는 그것들이 참이라는 사실을 인식할 수 있다. 이는 플라톤의 '상기한다' '기억한다'는 단어와 대조적인데 과학이 의존하는 근본전제들은 지적 직관nous에 의해 도달된다고 주장한 것이다. 이 전제들이 정확하게 실재의 양상을 파악하고 있다면 삼단논법은 중명사라는 매개자를 통해 대소 전제의 연결관계를 확고히 해주며 따라서 타당한 결론들이 도출된다. 과학이 관찰과 관찰의 결과들을 설명할 수 있는 이론을 모두 내포하는 참된 명제들인것 처럼 아리스토텔레스의 논리학은 단순히 명제들의 상호 관계나 언어 자체의 논리적 일관성에 국한된 것이 아니라 결론이 전제로부터 올바르게 추론될 수 있게 해 주는 규칙들(삼단논법),엄밀한 증명 형식들을 통해 인간이 정밀한 언어로 진술할 수 있는 것, 즉 어떤 사물과 왜 그것이 그러한 모습으로 존재하는가에 관한 문제였고, 이는 진리에 도달하려는 시도였다. 3. 형이상학 그는 <형이상학Metaphysica>에서 <모든 인간은 본래적으로 앎을 갈망한다>는 명제로 시작한다. 형이상학이 제기하고자 하는 문제는 <존재한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하는가의 문제이다. 아리스토텔레스에게 이 문제는 <모든 존재하는 것에 관한 과학>이 되었고 따라서 그가 생각했던 형이상학의 과제는 존재와 그것의 원리들 및 원인들에 관한 연구였다. 그의 논리학적 관심에서 볼 때 <존재한다는 것>은 정확히 정의될 수 있는, 따라서 논의의 주제가 될 수 있는 <어떤 것>이었다. 그가 다루었던 모든 범주들(또는 술어들)에 상응하는 주어를 그는 실체ousia라고 칭했다. 우리가 한 사물을 더 잘 인식하는 시기는 <그것이 무엇인가>를 인식할 때이고 그것의 <필연적인 본질>에 집중할 때이다. 그는 이들 특정한 성격들 역시 존재성을 갖는다는 사실에 동의하지만, 이러한 성질들의 존재는 형이상학적 탐구의 대상이 아니며 그의 주요 관심사는 실체의 연구, 사물의 본성에 대한 탐구였다. 이 본질이나 실체는 분명 특정한 성질 혹은 보편적 본질과 독립되어 있지만, 플라톤의 형상들이 개체로부터 동떨어져 있는것과는 달리 아리스토텔레스의 형상morhpe은 질료hyle와 조화를 이루어 존재한다. 그는 <보편적 형상들이 완전히 분리된 채 존재한다는 가정에 의해 무슨 목적이 달성될 수 있단 말인가>라고 물었다. 또, 플라톤의 형상은 운동하지 않기 때문에 우리에게 현상으로 나타난 사물을 이해하는데도 도움을 줄 수 없고, 더구나 비물질적이기 때문에 우리가 감각적으로 지각하는 대상을 설명할 수도 없다. 사물은 변화와 운동으로 충만해 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변화의 본질은 무엇인가? 아리스토텔레스에게 변화는 항상 새로운 발생을 내포하기 때문에 이 과정에서 몇 가지 질문이 제기될 수 있다. 1)그것은 무엇인가? 2)그것은 무엇으로 만들어 지는가? 3) 그것은 무엇에 의해 만들어지는가? 4) 그것은 어떤 목적을 위해 만들어지는가? 하는 것들이 그것인데 이에 대한 <네 가지 원인들>은 1)형상인 2)질료인 3)작용인 4)목적인 이다. 이들은 만물의 전체적 설명을 위한 폭넓은 형식이요, 뼈대였다. 아리스토텔레스에게 변화는 형상없는 질료나 질료 없는 형상으로부터 결코 발생할 수 없고, 이미 형상화 질료의 결합인 어떤 것 안에서 발생하여 새로운 다른 어떤 것으로 되어가는 과정인것이다. 그는 이 원인들을 생물학적 관점에서<생성하는 모든 사물은 어떤 작용인에 의해 또는 어떤 사물들로부터 생성하며 어떤 사물로 된다>고 요약하고 있는데 여기서 각각의 사물은 힘을 잠재하며 그 힘은 그 사물의 형상이 그것의 목적으로 설정했던 것을 실현한다. 즉, 만물 속에는 <목적>을 향해 나아가려는 역동적인 힘이 존재한다. 이러한 관념이 아리스토텔레스에게 가능태potentiality와 현실태actuality의 구분을 생각하게 했다. 여기서 주지할 것은 아리스토텔레스가 현실태를 가능태에 선재하는 것으로 주장했다는 점인데, 만일 도토리의 <목적>이 나무가 되는 것이라면 도토리는 잠재적인 한 그루의 나무이고 그러므로 변화의 궁극적인 양태는 가능태에서 현실태로의 변화이고, 현실적인 어떤 사물이 존재하지 않는다면 가능태에서 현실태로의 변화는 있을 수 없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그는 순수한 현실태로서의 최고의 존재의 개념을 필연적으로 수용하게 되었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운동을 설명하기 위해 <부동의 동자the unmoved mover>를 내세우게 된다. 이는 자연계에서 일어나는 모든 변화의 궁극적인 원인이다. 이 개념은 운동이 시작된<시간>도 아니고 <창조자>도 아니다. 운동이나 변화의 발생을 설명해 주는 유일한 방법은 모든 가능한 것에 논리적으로 선행해야 하며 가능태가 섞이지 않은 순수한 현실태이어야 한다. 따라서 그는 운동의 <이유>나 <원리> 그 자체를 부동의 동자로 채용했다. 이것은 <영원한>것이기 때문에 사물의 세계가 진행 중에 있지 않았을때는 <시간>도 존재하지 않았다. 간단히 말해 부동의 동자는 <형상>으로서 <실체>인 세계에 대한 목적인이며 작용인이다. 이것은 아퀴나스에 의해 기독교의 신을 철학적으로 설명해 줄 수 있는 도구가 되었다. 4. 인간의 위치:물리학, 생물학, 심리학 아리스토텔레스는 존재의 위계질서 속에서의 인간의 입장을 무생물 및 동물과 구별하는 방식으로 인간을 자연 속에 위치시켰다. 세계 내에는 <단순 물질들>, 즉 공기, 불, 흙, 물이라는 원질들이 존재하며 사물들은 그것들의 <본성>에 의해 만들어 진다. 이러한 자연적 대상들은 <각각 그 내부에 운동과 정지의 원리를 지니고 있다> 그러므로 조각가가 만든 상과는 달리 이 새로운 형상들의 발생은 자연 그 자체의 산물이다. 이러한 변화들 가운데 <자생과 성장>은 아리스토텔레스에게 생명을 의미했다. 물질적 실체가 잠재적으로 살아있는 이유는 그 근거인 <형상>으로부터 생명을 부여받았기 때문이다. 따라서 영혼은 육체의 형상이고,<육체의 현실태 가운데 제1등급>인 것으로 육체에서 분리된 것이 아니라 결합된 형상과 질료인 것이다. 그가 우리의 지식이나 학식을 영혼이 이전에 알고 있었던 것에 대한 회상의 과정이라고 묘사할 수 있었던 근거가 바로 이러한 것이다. 그는 하나의 물체가 생명을 표현할 수 있는 세 가지 형태를 구분했는데 식물vegetative의 영혼(단순히 살아있는 행위)과 동물sensitive의 영혼(살아있는 것과 감각하는 행위)과 인간rational의 영혼(살아있음과 감각과 사유를 모두 포함)이 그것들이다. 이는 어떤 물체의 다양한 활동 능력을 나타낸다. 특히 동물의 영혼은 <질료>를 통하지 않고 사물의 성질과 <형상>을 감지할 수 있는 능력이 있다. 우리의 감관은 다른 성질과 관련하여 유사한 가능태들을 소유하고 오관은 감각 내용들이 생겨나는 단일한 대상이나 세계를 반영하면서 그들의 정보를 하나로 결합시키는 방식을 갖는다. 그런데 우리가 감각한 성질들은 그것을 더 이상 직접적으로 지각할 수 없을 경우에도 계속될 수 있고 이러한 현상이 <기억>과 상상의 입장에서 설명되며 이러한 능력으로 부터 결국 영혼의 최상의 형식인 인간의 영혼이 발생한다. 이성적 영혼은 과학적 사유의 힘을 갖고 사물들간의 차이나 상호 관계를 이해하는 능력도 있다. 또, 어떤 진리가 사물의 본성에 존재하는가 하는 것 뿐만 아니라 인간의 행위를 위한 지침을 발견하는 <심사숙고>하는 능력도 있다. 그런데 인간의 정신은 지식을 획득할 수도 그렇지 못할 수도 있는 <현실적으로>아는 것과 <잠재적으로>아는 것 사이의 중간자이다. 그러나 그는 <능동적 지성>에 대해 언급하면서 이 지성이 순수하게 능동적이라면 그것은 진정한 진리를 소유할 수 있고 이러한 순수행위는 <부동의 동자>의 그것처럼 모든 실재에 관한 진리와 완전히 조화된 정신의 활동이다. 그러나 수동적인 지성은 그것의 질료인 육신이 죽으면 함께 사라지고 인간의 실체는 더이상 존재하지 않게 된다. 5. 윤리학 아리스토텔레스의 도덕론은 인간을 포함한 자연 안에 있는 만물에게는 성취하려는 분명한 목적이나 수행하려는 기능이 존재한다는 그의 신념에 중심을 둔다. 그는 <니코마코스 윤리학>에서 <모든 예술과 학문 그리고 모든 행동과 추구는 선을 지향한다>고 했다. 플라톤에게 인간은 선의 이데아에 대한 지식을 지향하는 존재였으며 이는 정신이 가시계에서 가지계로 상승함으로써만 도달될 수 있는 것이었다. 그런데 아리스토텔레스에게 <선>이란 인간 본성을 탐구하고 그 구조속에 존재하는 도덕성의 근거를 발전해 나가면서 일상생활에서의 현실적인 행동을 통해 획득될 수 있는 것이었다. 모든 행동은 목적을 지향하는 것이라고 주장했던 그는 목적을 두 가지 종류로 구분했다. 하나는 도구적 목적-다른 목적들을 위한 수단으로서 행해진 -이며, 다른 하나는 본래적 목적-이 행위들은 그것들 자체를 위해 수행된다 -이다. <전쟁과 관련된 모든 행동>에 대한 예증에서 이 두 가지 목적에 대해 이해할 수 있는데 우리가 어떤 과정에서 이루어지는 모든 행동을 단계적으로 고려한다면 우리의 일련의 특수한 행위들은 그 나름의 목적을 갖고 출발하지만 결국 다른 목적들을 위한 수단이 될 뿐이라는 것이다. 플라톤과 마찬가지로 <선>이라는 개념을 어떤 사물의 특수한 기능을 충실히 해내는 상태로 설명했지만 인간의 기술이나 직업을 인간으로서의 그의 기능과 구별하려 한 것을 알 수 있다. 인간이 인간으로서 추구하는 것은 다시말해 모든 다른 행동을 수단으로 삼을 수 있는 것이고 그는 이러한 행동이 <선임에 틀림없다>고 말한다. 아리스토텔레스에 의하면 선을 발견하기 위해서는 먼저 인간 본성의 기능을 판명하게 발견해야 하고 인간으로서 자신의 기능을 수행하고 있는 사람이야 말로 선한 사람이다. 그렇다면 인간의 고유한 기능, 즉 본래적 목적이란 무엇일까? 인간에게는 분명 고유한 행동양식이 존재하고 아리스토텔레스는 인간의 본성을 분석하여 그 행동에 대해 규명하고자 했다. 식물에게나 동물에게도 존재하는 식물적 이성과 동물적 이성을 제외하고 나면 인간에게는 <이성적인 원리를 대표한 요소의 능동적인 활동>만이 남는다. 이 <활동>은 '영혼의 고유한 기능'이므로 영혼의 본성에 대한 설명이 필요하다. 영혼은 육체의 형상이므로 인간 전체와 관련된다. 그러므로 영혼은 이성적인 부분과 비이성적인 부분으로 나누어지고, 이는 다시 '식물적인 부분'과 갈망 또는 <욕망>의 부분으로 나누어 진다. 대부분의 경우 이 양자는 <이성적 원리에 대항하거나 반대하는 것>이고 이러한 이성적 요소와 비이성적 요소 간의 투쟁은 도덕에 관한 제반 문제를 제기한다. 이러한 분석에서 인간의 특수한 행동양식이란, 영혼의 비이성적인 부분에 대한 이성적인 통제와 인도를 암시함을 추측할 수 있다. 덧붙여 기능이 없다면 어떤 행동을 <선하다>고 부를 수 없으므로 도덕은 행동을 요구한다. 선한 인간의 모든 생활은 선으로 항상 충만해 있어야 한다. 이러한 행위야 말로 인간에게 고유한 기능의 수행이고 아리스토텔레스는 이를 <행복>이라고 설명하며 이것이야 말로 인간 행위의 궁극적 목적에 대한 다양한 견해를 충족시켜 줄 수 있는 유일한 목적이라는 사실에 모든 사람들이 동의할 것이라고 확신했던것 같다. 그렇다면 영혼은 어떤 방식으로 행복을 실현하기 위해 작용하는가? 도덕성의 보편적인 법칙은 <정의로운 이성에 따라 행동하는것>이다. 영혼의 비이성적인 부분으로서의 욕망은 자아의 외부 즉 대상물들이나 다른 인간들에 의해 영향을 받고 <사랑>과 <증오>의 형식으로 반응한다. 도덕적 행위는 결코 자연적으로 발생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존재하는 어떠한 것도 자연적으로 그것의 본성과 대립되는 습관을 형성할 수 없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도덕은 올바르게 사유하고, 올바르게 선택하고, 올바르게 행동하는 습관의 발전과 관계한다. 중용으로서의 덕 인간의 감정은 매우 넓은 행동의 영역을 갖기 때문에 과다와 과소의 조화를 발견하지 않으면 안된다. 즉 적절한 중용golden Mean을 발견해야 하는 것이다. 공포, 자만, 색욕, 갈망, 연민, 쾌락, 고통과 같은 감정들은 과다나 과소의 양극단에 이르지 않도록 통제되고 행동들이 인도되어 최상의 상태인 중용에 이르러야 하고 이는 영혼의 이성적인 힘을 통해서 가능하다. 즉 덕의 상태는 <심사숙고에 의한 선택을 실행하는 상태이며 상대적인 중용속에 머무는 상태고, 이성에 의해 결정되는 상태며 실천적이며 지혜로운 인간이 결정하는 상태다> 이러한 중용은 상황 변화에 따라 각각의 인간에게 상대적이다. 중용이 존재하지 않는 경우도 있는데 또, 악의, 질투, 절도, 살인과 같이 사악함을 이미 그 본성 속에 내포하고 있는 경우에는 중용이 존재하지 않으며 그러한 행동들은 항상 잘못된 것이다. 심사숙고와 선택 이성적 영혼에는 두 종류의 이성적 기능이 존재하는데 하나는 이론적인 것으로 우리에게 확고한 원리들이나 철학적 지혜를 제공하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실천적인 것으로서 특수한 상황에서 이루어지는 우리의 행동에 대한 이성적인 지침이 되는 실천적 지혜다. 선이란 인간 내부의 <가능태>이므로 자신의 내부에 잠재한 것을 현실태로 개발해야 한다. 도덕적 행위의 기원은 작용인으로서의 선택이며 선택의 기원은 갈망과 목적에 대한 견해를 가진 이성적 추리다. 이성이 없다면 선택도 존재할 수 없지만, 지성 그 자체는 아무것도 움직이게 하지 못한다. 그러므로 목적을 지향하는 실천적인 지성만이 어떤 것을 움직이게 할 수 있다. 이러한 선택에는 책임이 따르는데 이는 <자발적인 행동>의 결과에 대한 것이고 <비자발적인 행위에 대해서>(특수한 상황에 대한 무지에서 행해진 경우, 외적 강제의 결과, 더 큰 죄악을 피하기 위해 행해진 경우)는 정상이 참작되며 동정이 주어지기도 한다. 명상 아리스토텔레스는 그의 철학적 지혜와 지적 진리의 명상 행위에 대한 논의로 윤리학에 관한 주요 저작을 결론 짓는다. 행복이 우리의 고유한 본성에 따라 행동할 때 생겨나는 것이라면 행복은 우리의 최고 본성에 따라 행동하는 것이고 이러한 행위는 <명상적인 것>이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이렇게 말한다. <이성은 우리의 내면에서 최상의 것일 뿐 아니라, 이성의 대상도 인식 가능한 대상 중에서 최상의 것이기 때문이다. 또한 우리는 어떤 행위를 할때보다도 더 연속적으로 진리에 관해 명상할 수 있기 때문에 가장 연속적인 행위이다. 우리는 행복이 그것과 결부된 쾌락을 내포한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철학적 지혜의 행위들은 가장 환희에 찬 덕행들임에 틀림없다> 6. 정치학 아리스토텔레스는 윤리학에서와 마찬가지로 정치학에서도 목적의 요소를 강조한다. <국가란 자연의 피조물이며 따라서 인간도 자연적으로 정치적인 동물이다> <사회속에서 살 수 없는 사람이나 스스로 자족적이기 때문에 그러한 욕구도 갖지 않은 사람은 동물이 아니라면 신임에 틀림없다>라고 말하면서 국가에게도 인간과 마찬가지의 하나의 고유한 기능을 부여한다. 인간은 경제적 목적뿐만 아니라 인간의 최고선 즉 도덕적이며 지적인 인간의 생활을 보증해 주게된다. 그러나 실천적인 국가 이론은 단지 <어떤 정부 형태가 각각의 국가들에 적용되는가>만을 제시해 주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따라서 입법가들이 고려해야 할 것은 <여러 환경에 대해 상대적으로 최상인 것은 무엇인가, 어떤 주어진 조건에서 한 국가가 어떻게 성립될 수 있는가, 그 국가가 가장 오래 존속할 수 있는 방식은 무엇인가>이다. 이러한 이유에서 아리스토텔레스는 플라톤의 급진적인 이상에 대해 인내할 수 없었다. 아리스토텔레스가 구분한 국가의 형태는 한 명에 의한 통치 형태(왕정)와 소수자에 의한 통치 형태(귀족정), 다수자에 의한 통치 형태(민주정)다. 한 명의 특출한 인재도 이상적으로는 가능하지만 그러한 인물이 충분하게 존재할 수는 없기 때문이다. 그는 유능하고 탁월하며 업적도 이루었고 재산도 있어서 책임감이 있고 유능하고 명령을 내릴 줄 아는 소수 집단에 의해 통치되는 귀족정을 선호했다. 차이와 불평등에 관해 아리스토텔레스의 노예관은 '사실에 관한 관찰에 의존한 그의 이론의 오류'의 한 예이다. 그는 노예들이 항상 힘이 세고 장대하다는 사실을 관찰하고, 노예란 자연의 산물이며 <어떤 사람들은 태어날 때부터 자유로우며 어떤 사람들은 태어날 때부터 노예가 된다. 따라서 노예제는 수단인 동시에 올바르다>라고 말했다. 하지만 정복 전쟁에 의해 노예가 된 사람들은 정당하지 않다고 생각했고, 동시에 <노예에 대한 적절한 대우>에 관해 <노예들에게는 그들의 봉사의 대가로서 항상 자유가 보장되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또 아리스토텔레스는 시민권의 불평등성을 믿었다. 그에게 시민권이란 정의로운 행정에 참여하는 권리와 의무를 동시에 갖는다. 그런데 시간도 없고 적합한 기질과 인품도 계발되지 않은 노동자들까지 시민이 되어야 한다고는 믿지 않았던 것이다. 아리스토텔레스가 계속 강조한 점은 국가란 인간의 도덕적이며 지적인 완성을 위해 존재한다는 사실이다. 선한 정부는 선한 통치자들이 만민의 선을 이루기 위해 노력하는 반면 사악한 정부는 사악한 통치자들이 자신들의 사적인 영리만을 추구한다. 또한 정부는 정의와 적절한 평등의 개념에 기초해야 한다. 그러나 다양한 정의의 개념들은 궁극적으로 혁명을 낳을 수 있다. 특히 민주제는 <인간은 평등하게 자유롭기 때문에 절대적으로 평등해야 한다>가정에 기초한다. 반면 <과두제>는 재산의 소유에서 불평등하므로 자신들이 절대적으로 불평등하다>고 한다. 이러한 이유로 민주론자들과 과두론자들이 수적으로 열세하게 되면 <그들의 이상과 불일치 하게 되고 따라서 혁명을 자극하게 된다>. <이 혁명적 감정의 보편적이며 주된 원인은 평등에 대한 갈망이다. 즉 그 때 사람들은 그들 이상이 다른 사람들과 평등하다고 생각하게 되는 것이다> 물론 <오만과 탐욕>과 같은 다른 원인도 있다. 아리스토텔레스는 각각의 정부의 형태와 국가가 백성으로 하여금 훌륭한 삶이라 여길 만한 행복을 성취할 수 있도록 그들의 생활 조건을 만들어 줌으로써 혁명을 예방할 수 있다고 생각했다. 7. 예술철학 아리스토텔레스의 예술에 대한 관심은 플라톤의 그것보다 훨씬 긍정적이었다고 할 수 있는데 이데아의 모방에 불과하다고 생각한 플ㄹ톤의 예술관은 예술의 인식적 측면에 집중되어 있었고 따라서 실재로부터 몇 단계 떨어진 예술은 지식을 왜곡하는 결과를 낳을 뿐이라는 결론을 지었다. 반면에 아리스토텔레스는 보편적인 형상이 구체적인 사물들 속에만 존재한다고 믿었기 때문에 예술가들은 이것을 직접적으로 취급하는 것이라고 생각했다. 즉 사물들을 연구하면서 그것을 예술의 형식으로 바꾸는 것이다. 즉 그 인식적 가치를 인정하여 자연의 모방을 통해 자연에 대한 정보를 전달해 줄 수 있다고 생각했다. 그는 <시학>에서 시의 인식론적 측면을 강조하고 있다. 특수한 인간과 사건을 취급하는 역사가와 달리 시인은 인간의 근본을 다룬다는 측면에서 시는 보편적인 것을 표현하려는, 좀 더 철학적이며 높은 수준에 있다고 생각했다. 또, 아리스토텔레스의 예술은 심리학적으로도 중요한 의미를 갖는데 이는 예술이 인간 본성의 심층 구조를 반영하고 있고 이러한 점이 모방에 대한 본능을 심어주기 때문이다. 또한 이러한 모방을 통해 그것을 관조함으로써 학습할 수 있고 아. 그것은 바로 저것이라고 말할 수 있는데서 '유사함을 발견하는' 쾌락을 얻을 수 있다. 그는 특히 비극의 감정적인 측면을 강조하면서 카타르시스catharsis라는 개념에 집중했다. <그러므로 비극은 어떤 행동의 모방이다. 공포나 연민을 통하여 이러한 감정들을 적절히 추방할 수 있도록 해준다>고 아리스토텔레스는 주장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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