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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을 읽으며 / 그림을 보다가 / 강의를 듣다가 / 교회를 다니다가 / 드라마를 보다가> <동물에 대해 / 얼굴에 대해 / 열망에 대해 / 교회에 대해 / 태도에 대해> 먹는 욕구 보다 배설 욕구가 훨씬 강하다죠? 뭘 먹어서 얻는 쾌락보다도 내보내면서 누리는 쾌감이 훨씬 강하답니다. 오늘도 먹은게 있는데 좀 쌀까 해서 <철학본색>에 글을 남겨봅니다. 많이 긴 글이 될텐데, 인내하며 읽어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요즘 저는 서동욱 교수의 <일상의 모험>이라는 책을 읽는 중입니다. 평범한 일상에 '모험'이라는 것이 어떻게 가능한지.. 이런 의구심으로 펼친 책인데 나도 모르게 지나쳤던 일상의 소소한 것들이 '모험'보다 백배는 더 의미 있고 흥미로운 사태들을(사건이 아닌) 많이 담고 있는 것 같습니다. 어제는 '얼굴의 출현'이라는 장을 읽으면서 '고통받는 타인의 얼굴'을 이야기 하겠거니 하고 읽기 시작한 글에 토요일 모임에서 나눴던 내용, 동물 학대에 관해서 생각해볼만한 내용이 있어서 흥미로웠습니다. 뭐 직접적으로 관련이 있다고는 할 수 없지만 읽어보시면 어느정도 수긍이 되실 것 같아요. ![]() '베이컨에서, 얼굴이 해체된 후에 나타난 머리는 뼈라기보다는 일종의 고기(viande)이다. 베이컨의 이 고기에 대해 들뢰즈는 말한다. "베이컨은... 고통받는 모든 인간은 고기에 속한다라고 말한다. 고기는 인간과 짐승 사이의 공통 영역이고 이 둘의 식별 불가능한 영역이다...고통받는 인간은 한 짐승이고, 고통받는 짐승은 한 인간이다. ...예술, 정치, 종교 그 무엇에서든 혁명적인 사람이라면... 죽어가는 송아지들 '앞에서' 책임을 가지게 되는 하나의 극단적인 순간을 느끼지 않았겠는가?-이상 인용, 서동욱 <일상의 모험> 조금 길게 인용했는데, 꼭 한번 꼼꼼하게 읽어보시길 부탁합니다. 위 인용문은 요약하자면 다음과 같습니다. 얼굴은 사회적 기호다. 얼굴은 옷을 입지 않았다 해도 입은 것처럼 자신을 은폐시킨채 표상하는 것이다. 그러나 얼굴 안에는 고기가 있다. 동물에게도 고기가 있다. 그런 면에서 인간과 동물은 같다. 우리는 드러난 고깃덩어리 앞에서 책임을 느낀다. 고통받는 짐승과 고통받는 인간 앞에서.. 그들에게 얼굴은 없다. 그것을 통감하는 것은 정치다. 얼굴을 드러내는 자들의 정치에 맞서는 얼굴이 사라진 자들의 정치. 이것이 동물학대와 무슨 관련이 있을까요? 저도 잘 모르겠습니다. 다만 고통받는 인간과 고통받는 짐승 사이에 본질적 차이라고는 조금도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이겠죠. 결국 모두 '고기'이니까요. 우리가 죽어가는 송아지, 날뛰며 죽어가는 횟감을 보면서 느끼는 '마음 저림'은 짐승과 인간이 '고기'라는 공통성을 갖고 있다는 말이 아닐까요? 이것은 질 들뢰즈가 프랜시스 베이컨의 그림을 해설한 <감각의 논리>에서 쓰고 있는 내용이고 서동욱은 들뢰즈의 해설에 재해석을 가했습니다. ![]() 프랜시스 베이컨의 그림입니다. 심장약한 분은 주의해서 보세요. 무섭지만 직시하시길. 먼저 세번째 그림은 얼굴이 꼬여있습니다. 베이컨은 '얼굴'을 믿지 않습니다. 사람이 사람의 얼굴을 하고 있지만 알고 보면 '고기'라는 겁니다. 얼굴은 '기표'로서 작동하며 사람을 사람 자체로 만나지 못하게 합니다. 얼굴은 '사회성'이죠. 화장을 하고 표정을 짓고.. 세상과 대화하는 통로입니다. 얼굴은 늘 남을 의식합니다. 베이컨의 그림에서는 얼굴이 모두 저렇습니다. 저런 모습의 얼굴, 해체된 얼굴을 통해 얼굴 이면을 보게 하는 것이 들뢰즈는 '예술'의 사명이라고 합니다. 두번째 그림에도 얼굴이 있습니다. 중간에 있는 저 사람은 누굴까요? 베이컨은 벨라스케스의 <인노켄티우스 10세>의 그림을 많이 변용하는데 중간에 있는 이는 바로 그 교황입니다. 보시다시피 얼굴은 파괴되어 있습니다. 그리고 첫번째 그림과 두번째 그림 뒷편에는 도축당한 소의 고깃덩어리가 걸려져 있습니다. 아, 이 무슨 공포스러운 그림인가요? 얼굴 이면의 '고기성'을 알려주는 것이 아닐까요? 우리의 잔학함.. 베이컨이 동물애호가인지는 모르겠지만 그의 작품들이 얼굴, 사람의 사회성 넘어에 있는 것을 보여주려고 했던 것은 분명한 것 같습니다. 도대체 우리가 동물을 죽일 권리가 어디에 있는 것인가요? ![]() <벨라스케스와 렘브란트의 그림. 교황이 입은 옷에서 도축된 소의 선홍빛을 느낀 분은 잘보셨습니다> 베이컨의 그림들보다 더 잔혹한 <사진>입니다. 이 사진을 올리게 되어 유감입니다. 마음 가다듬고 보세요. ![]() 첫번째 사진은 5.18 광주항쟁의 희생자 사진입니다. 두번째도 마찬가지입니다. 이 그림이 세번째 그림과 무슨 차이가 있나요? 얼굴이 없다고 생각되는 사람은 이렇게 사라져도 되는 건가요? 위의 그림들 중 도축당한 소의 살점과 희생자의 그림은 무슨 차이가 있나요? ![]() 위의 사람들과 이들의 얼굴은 극명하게 대조적이군요. 얼굴이 있다고 하는 위의 사람들도 하지만, 알고보면.. 얼굴은 그저 옷에 불과하다는 것입니다. 동물을 쉽게 죽이는 것은 우리가 그들의 '얼굴'을 보지 못하기 때문인지도 모릅니다. 그저 얼굴 없는 '고기'로 대할 뿐이지요. 그리고 저는 이 땅의 많은 정치인들이 이 땅의 많은 사람들을 그저 얼굴 없는 '고기'로 대하고 있는 듯한 느낌을 받습니다. 아무렇게나 대해도 별 상관이 없는... 동물에게 얼굴을 달아주자는 것이 아니라, 우리 인간에게 얼굴이라는 것이 기만적인 것이며, 옷에 불과하다는 것을 발견하자는 이야기입니다. 동물에게 얼굴 달아줘서 사람 취급하자는 게 아닙니다. 그건 이미 많은 pets 가 경험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동물에게 얼굴을 달아서 애완견을 만들어 사람처럼 대하는 것만으로는 동물 일반에 대한 사랑으로 나아갈 수는 없지 않을까 싶습니다. 사람의 얼굴이 해체되어야 비로소 동물과 마주할 수 있는게 아닐까요. 아, 육식을 끊어야 하는 걸까요? 그리고 저는 얼굴 없는 사람의 모습을 보면서 '예수님'을 생각합니다. 예수는 우리에게 알려진 얼굴이 없죠. 예수의 얼굴을 만들어 내려는 사람은 있어도 말입니다.예수는 얼굴까지도 무참히 짓밟히고, 고깃덩이 같이 십자가에 달렸지요. ![]() <BBC에서 재구성해서 만든 예수의 얼굴. 이것이 무슨 의미가 있을까? 이 시도는 마리옹의 말처럼 시선이 보고 싶어하는 것을 그렸다는 점에서 우상숭배가 되는 건 아닐까요? 하지만 한편으로 예수가 참으로 역사적인 인물, 사회적 맥락 속에 처했던 한 사람이었다는 점은 분명히 시사하고 있지 않나요?> ![]() <영화 'Passion of Christ 중. 정치인의 얼굴인가, 아니면 베이컨의 그림인가. 예수는 얼굴인가, 고기의 모습인가?> 이제 조금 다른 이야기를 해볼까 합니다. 십자가 이야기가 나온 김에 교회 이야기를 좀 해보려고 해요. 저희 대학원 교수님 중 에리히 프롬(Erich Fromm)을 좋아하시는 분이 있습니다. 덕분에 저도 좀 보려고 하는데.. 오늘 선생님 말씀이 기억이 나서 함께 나눠봅니다. 프롬은 인간이라면 누구나 '열망'을 가지고 있다고 판단합니다. 중요하다고 생각되는 열망은 다음의 세가지 입니다. 먼저는 '결합의 열망', 둘째는 창조와 초월의 열망, 셋째는 지향과 헌신의 열망이 바로 그것입니다. 위 세가지는 모두 생산적 계기와 비생산적 계기를 가집니다. ![]() 1) 결합의 열망은 사람이라면 누구나 '고독'을 느낀다는 것에서 발생합니다. 이것이 생산적 계기로 발현되면 '사랑'과 '우정' 같은 것이 됩니다. 자신과 대상을 분명히 구분하되 서로를 느끼고 경험하는 것이겠지요. 하지만 이것이 비생산적 계기로 발현되면 '중독', '도착'이 됩니다. 중독/도착의 특성은 대상, 예컨대 술이나 성, 게임, 도박 등에 사로잡혀 자신을 잃어버리고 고독과 외로움을 대상과의 결합에서 일시적으로 해소하려는 경향이 있다고 합니다. 정리하자면, 사랑은 대상을 '주체'로서 경험하게 하지만 중독은 대상이 '우상'이 되어 '비주체'가 되어버린다는 거죠. 2) 창조와 초월의 열망은 사람이라면 누구나 '변화'를 추구한다는 것에서 발생합니다. 이것이 생산적 계기로 발현되면 예술, 발명, 정치 등이 되는 것이지요. 반면에 비생산적 계기는 지배적 질서 구성, 독재 정치, 마초 등으로 나타난다고 합니다. 예술을 통해 사람은 창조하고 세상에 대한 변화를 기획합니다. 이 역시 주체가 중요하지요. 그러나 변화를 열망하는 비생산적 계기는 자칫하면 '폭력'이나 지배력 강화 등으로 나타나 스스로 '절대주체'가 되어 타자를 말소하고 사라지게 합니다. 정리하자면, 창조와 초월의 열망은 나와 세상을 더욱 풍요롭게 만드는 것이 되어야 한다는 것이죠. 3) 지향과 헌신의 열망은 사람이라면 누구나 '의미'(Sinn)를 추구한다는 점에서 발생합니다. 사람은 '의미'를 추구하기에 생산적 계기로 '철학'과 '종교'를 추구합니다. 수많은 철학체계와 다양한 종교는 인간의 다양한 의미체계 추구의 결과이죠. 그러나 비생산적 계기는 도그마, 사이비철학/종교 등으로 나타납니다. 어느 특정한 의미체계에 완전히 사로잡혀 버리는 거죠. 하이데거는 이를 '퇴락'이라고 부르기도 했습니다. 사태 자체가 아니라 어떤 '틀'로 세상을 판단하고 의미를 확인하는 거죠.긴 설명을 한 것은 각자가 생각해볼 메세지를 받았으면 하는 의도도 있었지만, 저는 프롬의 이 같은 설명이 '한국 교회의 오늘'을 평가하는데 좋은 도구가 된다는 생각에서입니다. 제가 지금 겪고 있는 '신앙의 성장통'은 한국교회에 대한 분개와 수치심 때문입니다. 저는 '기독교'가 여전히 위의 세 열망에 대해서 그 어떤 사상이나 종교보다 더 나은 '생산적 계기'를 제공하는 에너지라 생각합니다. 그러나 지금의 기독교회는 생산적계기를 창발해내기 보다 오히려 프롬이 지적하는바 '비생산적 계기'만 만들어내고 있지는 않나요? 1) 교회는 사람을 사람으로 만나게 해주는 '만남'의 장소여야 합니다. 그것이 사랑이죠. 진정한 만남이야 말로 결합의 열망을 해소합니다. 교회보다 이런 만남을 위한 더 좋은 공간이 있을까요? 그러나 지금의 교회는 사람들을 단지 '교인'으로서만 환원합니다. 새들백교회의 릭 워렌 목사의 말에 따르면 지역사회는 군중이 되기 위해, 군중은 교인이 되기 위해, 교인은 핵심멤버가 되기 위해 존재할 뿐이지요. 그런 '은밀한' 목적이 존재하는 한 진정한 '만남', '결합'은 있을 수 없습니다. <새들백교회에서 제공해서 사용하는 헌신의 동심원>
2) 교회보다 창조와 초월에 대해서 더 많은 것을 이야기해줄 수 있는 곳이 있을까요? 변화에 대해서 생산적 계기를 만들어 낼 수 있는 장소가 또 있나요? 신이 이미 창조의 신이며 초월자이며 그가 세상을 변혁합니다. 교회도 그러해야겠지요. 새로운 창조로 이 세상을 초월하고, 초월적 의식으로 세상에 휩쓸려 갈 것이 아니라 세상을 변화해야지요. 맞습니다. 창조를 위해서는 초월이 전제되어야 합니다. 복음의 정신도 그리스도의 초월을 이어받아 세상을 변혁시키라는 거죠.
진짜 만남이 있는 교회, 세상을 초월하고 창조/변혁하는 교회, 삶의 진정한 의미를 주는 교회를 꿈꿉니다. 그런 교회는 불가능한 걸까요? 저는 가능하다고 생각하고, 또 확신하고 싶습니다. 성경이 있고 하나님이 계시니까요. 저는 정반대의 길을 가는 한국교회가 슬픕니다. 이 같은 제 주장이 일방적인 비판이라는 점도 수긍합니다. 대형교회만이 그렇다는 거죠. 그러나 많은 군소교회들이 대형교회를 모델로 하고 따라가려한다는 점에서 다수가 그렇다는 것은 부인하기 힘듭니다. 제가 지금 다니는 교회도 그 길을 걸어가려고 노력하고 있는 듯이 보여 마음이 아픕니다. 말이 엄청 길었네요. 교회에 대해 답답한 마음으로 저는 최근 꽤나 힘듭니다. 오늘 <대왕세종>에서 원지로 유배당한 충녕에게 최윤덕 장군이 변방을 지키며 하는 말이 저를 위로하더군요. 충녕은 온갖 오해로 고초를 당하는 최윤덕에게 묻습니다. ![]() "왜 그렇게 삽니까? 이런 의심, 오해, 분란을 겪으면서까지 말입니다." "[관료들이 하는] 의심이야 백성들에게 믿음을 충분히 얻었으니 괜찮고, 오해야 시간이 지나면 풀리테니 괜찮고, 분란은 지금이라도 가서 해결하면 되니 괜찮습니다." <최윤덕이 충녕과 대화하는 중> 요즘 저도 교회에 대해서 하도 욕을 해대고 딴지를 걸다보니, 적잖은 사람들이 저보고 신앙없다고 의심도 하고, 오해도 하고, 분란을 일으킨다고 생각하는 것 같습니다. 아직 누구로부터 믿음을 얻은 적도 별로 없고, 시간을 여유롭게 기다릴만큼 통큰 사람도 아니고, 해결할 능력이 있는 것도 아니지만 최윤덕 장군이 정말 장군이었구나 하는 생각에 혀를 내두르며 마음을 다잡아 봅니다. 긴 이야기를 썼습니다. 시작은 동물학대였는데, 얼굴, 정치, 베이컨의 회화, 에리히 프롬, 한국교회, 드라마 이야기까지 장광성을 늘여놨네요. 시원하게 쌌습니다. 여러분들도 한번 싸봐요. 우리 블로그가 구수한 향기나는 <해우소>가 되면 좋겠네요..^^ 댓글로 제 생각에 대한 여러분들의 의견도 듣고 싶습니다. 함께 이야기해봅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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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 반갑습니다. 제가 존..
by 검은머리 앤 at 08/06 나도 오랜만에 블로그에.. by 영주 at 08/03 정말 잘 읽었습니다. 저.. by 어우르기 at 07/29 식코을 말로만 들으신 .. by 보라빛광기 at 07/25 저 휴가계획이 8월2일부터.. by 이종수 at 07/25 미란이네 놀러가요~ .. by 영주 at 07/20 -미란미란..보고 싶지.. by 이은희 at 07/19 혼자 서울특파원이고 싶.. by 이종수 at 07/18 요즘 저는 시골에서 대.. by 미란 at 07/17 위엣분....ㅎㅎㅎㅎ ㅠ.. by 종열)) at 07/12 최근 등록된 트랙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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