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디어를 먹고 난 배설물(-권영민)
<책을 읽으며 / 그림을 보다가 / 강의를 듣다가 / 교회를 다니다가 / 드라마를 보다가>
<동물에 대해 / 얼굴에 대해 / 열망에 대해 / 교회에 대해 / 태도에 대해>

먹는 욕구 보다 배설 욕구가 훨씬 강하다죠? 뭘 먹어서 얻는 쾌락보다도 내보내면서 누리는 쾌감이 훨씬 강하답니다. 오늘도 먹은게 있는데 좀 쌀까 해서 <철학본색>에 글을 남겨봅니다. 많이 긴 글이 될텐데, 인내하며 읽어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요즘 저는 서동욱 교수의 <일상의 모험>이라는 책을 읽는 중입니다. 평범한 일상에 '모험'이라는 것이 어떻게 가능한지.. 이런 의구심으로 펼친 책인데 나도 모르게 지나쳤던 일상의 소소한 것들이 '모험'보다 백배는 더 의미 있고 흥미로운 사태들을(사건이 아닌) 많이 담고 있는 것 같습니다. 어제는 '얼굴의 출현'이라는 장을 읽으면서 '고통받는 타인의 얼굴'을 이야기 하겠거니 하고 읽기 시작한 글에 토요일 모임에서 나눴던 내용, 동물 학대에 관해서 생각해볼만한 내용이 있어서 흥미로웠습니다. 뭐 직접적으로 관련이 있다고는 할 수 없지만 읽어보시면 어느정도 수긍이 되실 것 같아요.


'베이컨에서, 얼굴이 해체된 후에 나타난 머리는 뼈라기보다는 일종의 고기(viande)이다. 베이컨의 이 고기에 대해 들뢰즈는 말한다. "베이컨은...  고통받는 모든 인간은 고기에 속한다라고 말한다. 고기는 인간과 짐승 사이의 공통 영역이고 이 둘의 식별 불가능한 영역이다...고통받는 인간은 한 짐승이고, 고통받는 짐승은 한 인간이다. ...예술, 정치, 종교 그 무엇에서든 혁명적인 사람이라면... 죽어가는 송아지들 '앞에서' 책임을 가지게 되는 하나의 극단적인 순간을 느끼지 않았겠는가? 

이 순간에 그 사람은 [역시 송아지들과 같은] 한 마리의 짐승 이외에는 아무것도 아니다." 얼굴이라는 "괴상한 두건"을 벗겨내면 그 자리에 드러나는 것은 고통받고 있는 고기이다. 그런데 이 고통이 바로 나의 책임의 대상으로 다가오며, 이 책임은 '혁명적'인 자라면 누구나 가지는 책임이라는 것이다. 다시 말해 얼굴의 해체는 '고통받는 자들에 대한 윤리적 책임'을  가능케 하며, 그것이 혁명(정치)의 근저를 이룬다..가장 극단적인 예로서 광주의 사진들을 보라. 거기엔 얼굴이 없다. 얼굴의 흔적을 훼손하는 베이컨의 마지막 붓질처럼 총알이 얼굴을 부수어버린 까닭이다. 은유적인 의미라고는 조금도 없이, 이 사진들에는 참혹한 고기의 고통이 있다. 이 고통 앞에서 책임을 자각하지 않는자가 있겠는가? 이 도살장 사진들은 분명 통치자의 얼굴이 박혀 있는 플래카드와 맞서 싸우는 '비얼굴적' 장치로 작동한다.'
                                                                                                                           -이상 인용, 서동욱 <일상의 모험>


조금 길게 인용했는데, 꼭 한번 꼼꼼하게 읽어보시길 부탁합니다. 위 인용문은 요약하자면 다음과 같습니다.

얼굴은 사회적 기호다. 얼굴은 옷을 입지 않았다 해도 입은 것처럼 자신을 은폐시킨채 표상하는 것이다.
그러나 얼굴 안에는 고기가 있다. 동물에게도 고기가 있다. 그런 면에서 인간과 동물은 같다.
우리는 드러난 고깃덩어리 앞에서 책임을 느낀다. 고통받는 짐승과 고통받는 인간 앞에서..
그들에게 얼굴은 없다.
그것을 통감하는 것은 정치다. 얼굴을 드러내는 자들의 정치에 맞서는 얼굴이 사라진 자들의 정치.

이것이 동물학대와 무슨 관련이 있을까요? 저도 잘 모르겠습니다. 다만 고통받는 인간과 고통받는 짐승 사이에 본질적 차이라고는 조금도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이겠죠. 결국 모두 '고기'이니까요. 우리가 죽어가는 송아지, 날뛰며 죽어가는 횟감을 보면서 느끼는 '마음 저림'은 짐승과 인간이 '고기'라는 공통성을 갖고 있다는 말이 아닐까요? 이것은 질 들뢰즈가 프랜시스 베이컨의 그림을 해설한 <감각의 논리>에서 쓰고 있는 내용이고 서동욱은 들뢰즈의 해설에 재해석을 가했습니다. 


프랜시스 베이컨의 그림입니다. 심장약한 분은 주의해서 보세요. 무섭지만 직시하시길.

     


먼저 세번째 그림은 얼굴이 꼬여있습니다. 베이컨은 '얼굴'을 믿지 않습니다. 사람이 사람의 얼굴을 하고 있지만 알고 보면 '고기'라는 겁니다. 얼굴은 '기표'로서 작동하며 사람을 사람 자체로 만나지 못하게 합니다. 얼굴은 '사회성'이죠. 화장을 하고 표정을 짓고.. 세상과 대화하는 통로입니다. 얼굴은 늘 남을 의식합니다. 베이컨의 그림에서는 얼굴이 모두 저렇습니다. 저런 모습의 얼굴, 해체된 얼굴을 통해 얼굴 이면을 보게 하는 것이 들뢰즈는 '예술'의 사명이라고 합니다.

두번째 그림에도 얼굴이 있습니다. 중간에 있는 저 사람은 누굴까요? 베이컨은 벨라스케스의 <인노켄티우스 10세>의 그림을 많이 변용하는데 중간에 있는 이는 바로 그 교황입니다. 보시다시피 얼굴은 파괴되어 있습니다. 그리고 첫번째 그림과 두번째 그림 뒷편에는 도축당한 소의 고깃덩어리가 걸려져 있습니다. 아, 이 무슨 공포스러운 그림인가요? 얼굴 이면의 '고기성'을 알려주는 것이 아닐까요? 우리의 잔학함.. 베이컨이 동물애호가인지는 모르겠지만 그의 작품들이 얼굴, 사람의 사회성 넘어에 있는 것을 보여주려고 했던 것은 분명한 것 같습니다. 도대체 우리가 동물을 죽일 권리가 어디에 있는 것인가요?

         
<벨라스케스와 렘브란트의 그림. 교황이 입은 옷에서 도축된 소의 선홍빛을 느낀 분은 잘보셨습니다>


베이컨의 그림들보다 더 잔혹한 <사진>입니다. 이 사진을 올리게 되어 유감입니다. 마음 가다듬고 보세요.

   




첫번째 사진은 5.18 광주항쟁의 희생자 사진입니다. 두번째도 마찬가지입니다. 이 그림이 세번째 그림과 무슨 차이가 있나요? 얼굴이 없다고 생각되는 사람은 이렇게 사라져도 되는 건가요? 위의 그림들 중 도축당한 소의 살점과 희생자의 그림은 무슨 차이가 있나요?


위의 사람들과 이들의 얼굴은 극명하게 대조적이군요. 얼굴이 있다고 하는 위의 사람들도 하지만, 알고보면.. 얼굴은 그저 옷에 불과하다는 것입니다. 동물을 쉽게 죽이는 것은 우리가 그들의 '얼굴'을 보지 못하기 때문인지도 모릅니다. 그저 얼굴 없는 '고기'로 대할 뿐이지요. 그리고 저는 이 땅의 많은 정치인들이 이 땅의 많은 사람들을 그저 얼굴 없는 '고기'로 대하고 있는 듯한 느낌을 받습니다. 아무렇게나 대해도 별 상관이 없는...
동물에게 얼굴을 달아주자는 것이 아니라, 우리 인간에게 얼굴이라는 것이 기만적인 것이며, 옷에 불과하다는 것을 발견하자는 이야기입니다. 동물에게 얼굴 달아줘서 사람 취급하자는 게 아닙니다. 그건 이미 많은 pets 가 경험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동물에게 얼굴을 달아서 애완견을 만들어 사람처럼 대하는 것만으로는 동물 일반에 대한 사랑으로 나아갈 수는 없지 않을까 싶습니다. 사람의 얼굴이 해체되어야 비로소 동물과 마주할 수 있는게 아닐까요.

아, 육식을 끊어야 하는 걸까요? 그리고 저는 얼굴 없는 사람의 모습을 보면서 '예수님'을 생각합니다. 예수는 우리에게 알려진 얼굴이 없죠. 예수의 얼굴을 만들어 내려는 사람은 있어도 말입니다.예수는 얼굴까지도 무참히 짓밟히고, 고깃덩이 같이 십자가에 달렸지요.

<BBC에서 재구성해서 만든 예수의 얼굴. 이것이 무슨 의미가 있을까?
이 시도는 마리옹의 말처럼 시선이 보고 싶어하는 것을 그렸다는 점에서 우상숭배가 되는 건 아닐까요?
하지만 한편으로 예수가 참으로 역사적인 인물, 사회적 맥락 속에 처했던 한 사람이었다는 점은 분명히 시사하고 있지 않나요?>

<영화 'Passion of Christ 중. 정치인의 얼굴인가, 아니면 베이컨의 그림인가. 예수는 얼굴인가, 고기의 모습인가?>


이제 조금 다른 이야기를 해볼까 합니다. 십자가 이야기가 나온 김에 교회 이야기를 좀 해보려고 해요.

저희 대학원 교수님 중 에리히 프롬(Erich Fromm)을 좋아하시는 분이 있습니다. 덕분에 저도 좀 보려고 하는데.. 오늘 선생님 말씀이 기억이 나서 함께 나눠봅니다. 프롬은 인간이라면 누구나 '열망'을 가지고 있다고 판단합니다. 중요하다고 생각되는 열망은 다음의 세가지 입니다. 먼저는 '결합의 열망', 둘째는 창조와 초월의 열망, 셋째는 지향과 헌신의 열망이 바로 그것입니다. 위 세가지는 모두 생산적 계기와 비생산적 계기를 가집니다.



1) 결합의 열망은 사람이라면 누구나 '고독'을 느낀다는 것에서 발생합니다. 이것이 생산적 계기로 발현되면 '사랑'과 '우정' 같은 것이 됩니다. 자신과 대상을 분명히 구분하되 서로를 느끼고 경험하는 것이겠지요. 하지만 이것이 비생산적 계기로 발현되면 '중독', '도착'이 됩니다. 중독/도착의 특성은 대상, 예컨대 술이나 성, 게임, 도박 등에 사로잡혀 자신을 잃어버리고 고독과 외로움을 대상과의 결합에서 일시적으로 해소하려는 경향이 있다고 합니다. 정리하자면, 사랑은 대상을 '주체'로서 경험하게 하지만 중독은 대상이 '우상'이 되어 '비주체'가 되어버린다는 거죠.
2) 창조와 초월의 열망은 사람이라면 누구나 '변화'를 추구한다는 것에서 발생합니다. 이것이 생산적 계기로 발현되면 예술, 발명, 정치 등이 되는 것이지요. 반면에 비생산적 계기는 지배적 질서 구성, 독재 정치, 마초 등으로 나타난다고 합니다. 예술을 통해 사람은 창조하고 세상에 대한 변화를 기획합니다. 이 역시 주체가 중요하지요. 그러나 변화를 열망하는 비생산적 계기는 자칫하면 '폭력'이나 지배력 강화 등으로 나타나 스스로 '절대주체'가 되어 타자를 말소하고 사라지게 합니다. 정리하자면, 창조와 초월의 열망은 나와 세상을 더욱 풍요롭게 만드는 것이 되어야 한다는 것이죠.
3) 지향과 헌신의 열망은 사람이라면 누구나 '의미'(Sinn)를 추구한다는 점에서 발생합니다. 사람은 '의미'를 추구하기에 생산적 계기로 '철학'과 '종교'를 추구합니다. 수많은 철학체계와 다양한 종교는 인간의 다양한 의미체계 추구의 결과이죠. 그러나 비생산적 계기는 도그마, 사이비철학/종교 등으로 나타납니다. 어느 특정한 의미체계에 완전히 사로잡혀 버리는 거죠. 하이데거는 이를 '퇴락'이라고 부르기도 했습니다. 사태 자체가 아니라 어떤 '틀'로 세상을 판단하고 의미를 확인하는 거죠.
긴 설명을 한 것은 각자가 생각해볼 메세지를 받았으면 하는 의도도 있었지만, 저는 프롬의 이 같은 설명이 '한국 교회의 오늘'을 평가하는데 좋은 도구가 된다는 생각에서입니다. 제가 지금 겪고 있는 '신앙의 성장통'은 한국교회에 대한 분개와 수치심 때문입니다. 저는 '기독교'가 여전히 위의 세 열망에 대해서 그 어떤 사상이나 종교보다 더 나은 '생산적 계기'를 제공하는 에너지라 생각합니다. 그러나 지금의 기독교회는 생산적계기를 창발해내기 보다 오히려 프롬이 지적하는바 '비생산적 계기'만 만들어내고 있지는 않나요?
1) 교회는 사람을 사람으로 만나게 해주는 '만남'의 장소여야 합니다. 그것이 사랑이죠. 진정한 만남이야 말로 결합의 열망을 해소합니다. 교회보다 이런 만남을 위한 더 좋은 공간이 있을까요? 그러나 지금의 교회는 사람들을 단지 '교인'으로서만 환원합니다. 새들백교회의 릭 워렌 목사의 말에 따르면 지역사회는 군중이 되기 위해, 군중은 교인이 되기 위해, 교인은 핵심멤버가 되기 위해 존재할 뿐이지요. 그런 '은밀한' 목적이 존재하는 한 진정한 '만남', '결합'은 있을 수 없습니다.

'핵심멤버'의 조건은  '십일조'에 있는 것 아닐까요?  십일조 하지 말라는게 아니라 교회가 지역사회를 진정한 지역민으로써 만나지 못하게 하는 가장 큰 장애가 바로 '십일조'인지도 모릅니다. 오히려 교회는 중독을 강요하지 않나요? '종교중독' 말입니다. 중독은 중독된 어떤 것을 취하지 못할 때 불안을 느끼고, 무기력해지는 현상이지요. 대부분의 교인들은 기도하지 않거나 성경을 읽지 않거나 예배에 참석하지 않으면 불안을 느끼고, 무기력, 심지어 공포까지 느낍니다. 그리고 그것은 '성령의 인도하심'으로 환원되어 버립니다. 이것은 기독교회가 사람과 사람의 만남, 신과 신의 형상으로 지음받은 인간이 만나는 장소로서의 교회가 아닌 교인과 성도의 만남, 신과 노예들이 만나는 장소로 만든 결과가 아닐까요?


<새들백교회에서 제공해서 사용하는 헌신의 동심원>

2) 교회보다 창조와 초월에 대해서 더 많은 것을 이야기해줄 수 있는 곳이 있을까요? 변화에 대해서 생산적 계기를 만들어 낼 수 있는 장소가 또 있나요? 신이 이미 창조의 신이며 초월자이며 그가 세상을 변혁합니다. 교회도 그러해야겠지요. 새로운 창조로 이 세상을 초월하고, 초월적 의식으로 세상에 휩쓸려 갈 것이 아니라 세상을 변화해야지요. 맞습니다. 창조를 위해서는 초월이 전제되어야 합니다. 복음의 정신도 그리스도의 초월을 이어받아 세상을 변혁시키라는 거죠.

그러나, 한국교회는 세상을 초월하기는 커녕 세상에 철저히 지배받고 있습니다. 재물과 권력의 '핵심'이 되어갑니다. 그 힘으로 세상을 섬기고 변혁하는 것이 아니라 MBC를 위협하고 이랜드 노조를 탄압하는데 보탭니다. 세상을 지배하려들기 시작하고 있어요. 비생산적 계기와 어떻게 이토록 일치하는지요. 초월하지 못했기에 '창조'도할 수 없는 곳이 바로 교회가 되어 버렸습니다. 세상의 관습과 기준에 너무 많이 휩쓸렸지요. 그래서 자본주의가 옳다고 미국이 잘못했어도 하나님 나라라고 주장하는 거겠죠. 그리스도는 세상에서 '초월'했기에 마음이 가난한 자가 천국을 소유한다고 한 것 아니겠어요?


<세상속에서 세상을 공격하는 기독교, 뉴스후 방송 이후 한기총은 MBC 시청거부운동을 펼치기도 했다>
3) 지향과 헌신의 열망, 의미를 추구하는 인간에게 진정한 삶의 '의미'를 기독교만큼 잘 전해줄 수 있는 곳이 어디인지 저는 모릅니다. 성경은 우리 삶의 의미가 '옳은 것'을 위해 목숨을 버리고, 고아와 과부의 형편을 돌보고, 이 땅에서 천국의 삶을 살다, 천국에 오르는 부활을 하는 것이라고 알려줍니다. 이것은 정적 도그마가 아니라 동적 명령입니다. 니힐리즘의 극단에서 니체는 '나를 위해 살아라'고 하고, 하이데거는 '본래적 자아를 만나는 경험'을 하라고 하는데, 성경은 오히려 신이라는 전적 타자 앞에서 자기 자신을 만나는 경험을 하고, 이웃이라는 또 다른 타자와 진실한 관계를 맺는 경험을 하라고 명합니다. 그것이 '의미'라는 거지요.
그러나 오늘날 한국교회는 '도그마' 자체입니다. 저는 교리상의 잘못보다 윤리상의 잘못이야말로 이단 판별의 조건이라고 생각합니다.(위험한 발언 용서하세요) 한국교회는 도그마화 되었다는 것이 문제라기 보다 그것이 비윤리적으로 기능한다는데 문제가 있어요. 한국 교회는 도그마를 인간이 취할 수 있는 유일한 의미라고 소개합니다. 그것은 예수 믿고 천국가고, 잘먹고 잘살고, 다른 사람 예수 믿게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사명' 곧 삶의 의미는 '전도/선교'가 됩니다. 누굴 위한 걸까요? 저는 이 도그마는 교회산업화의 모토라고 생각합니다. 교회/절.. 세속화된 종교는 이미 산업화되었지요. 독일교회가 세속화된 것이 아니라 한국교회야말로 세속화 된거죠. 예수그리스도의 십자가 역시 교회는 '의미'가 아니라 '거짓 의미'/'도그마'로 사용합니다. 십자가를 통해 죄를 쉽게 용서하는 것으로 만들어버리는 기제로 사용하죠. 말로는 아니라고 하면서 말입니다.

진짜 만남이 있는 교회, 세상을 초월하고 창조/변혁하는 교회, 삶의 진정한 의미를 주는 교회를 꿈꿉니다. 그런 교회는 불가능한 걸까요? 저는 가능하다고 생각하고, 또 확신하고 싶습니다. 성경이 있고 하나님이 계시니까요. 저는 정반대의 길을 가는 한국교회가 슬픕니다. 이 같은 제 주장이 일방적인 비판이라는 점도 수긍합니다. 대형교회만이 그렇다는 거죠. 그러나 많은 군소교회들이 대형교회를 모델로 하고 따라가려한다는 점에서 다수가 그렇다는 것은 부인하기 힘듭니다. 제가 지금 다니는 교회도 그 길을 걸어가려고 노력하고 있는 듯이 보여 마음이 아픕니다. 말이 엄청 길었네요.

교회에 대해 답답한 마음으로 저는 최근 꽤나 힘듭니다. 오늘 <대왕세종>에서 원지로 유배당한 충녕에게 최윤덕 장군이 변방을 지키며 하는 말이 저를 위로하더군요. 충녕은 온갖 오해로 고초를 당하는 최윤덕에게 묻습니다.


 "왜 그렇게 삽니까? 이런 의심, 오해, 분란을 겪으면서까지 말입니다." 

 "[관료들이 하는] 의심이야 백성들에게 믿음을 충분히 얻었으니 괜찮고,
오해야 시간이 지나면 풀리테니 괜찮고, 분란은 지금이라도 가서 해결하면 되니 괜찮습니다."

<최윤덕이 충녕과 대화하는 중>


요즘 저도 교회에 대해서 하도 욕을 해대고 딴지를 걸다보니, 적잖은 사람들이 저보고 신앙없다고 의심도 하고, 오해도 하고, 분란을 일으킨다고 생각하는 것 같습니다. 아직 누구로부터 믿음을 얻은 적도 별로 없고, 시간을 여유롭게 기다릴만큼 통큰 사람도 아니고, 해결할 능력이 있는 것도 아니지만 최윤덕 장군이 정말 장군이었구나 하는 생각에 혀를 내두르며 마음을 다잡아 봅니다.

긴 이야기를 썼습니다. 시작은 동물학대였는데, 얼굴, 정치, 베이컨의 회화, 에리히 프롬, 한국교회, 드라마 이야기까지 장광성을 늘여놨네요. 시원하게 쌌습니다. 여러분들도 한번 싸봐요. 우리 블로그가 구수한 향기나는 <해우소>가 되면 좋겠네요..^^ 댓글로 제 생각에 대한 여러분들의 의견도 듣고 싶습니다. 함께 이야기해봅시다.
by 철학본색 | 2008/04/15 01:00 | 똥통 | 트랙백 | 덧글(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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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mmented by 철학본색 at 2008/04/15 01:16
(미 소 ) 쓰자마자 읽었습니다.밤이 깊었는지라 잡생각없이 단숨에 읽어내려가긴 했는데
영민햄말대로 너무 많은 내용들이 함께 있어서 제 머릿속에 정리가 좀 필요할 듯 하네요. ^^
Commented by 철학본색 at 2008/04/15 01:27
너무 많은 내용보다는 아마, 너무 산만한 구성과 글 때문이겠지..ㅋㅋ 영민햄이 앞에서 말로 한다고 생각하며 읽어주면 아마, 침 튀기는 느낌도 들고 읽기가 좀 수월할 거야.. 내가 써 놓고도 잘 안읽힌다. 싼 똥을 오래보며 확인하는 사람은 별로 없지. 그냥 누고 보고 물내리면 끝이니깐..ㅋㅋ (권영민)
Commented by 철학본색 at 2008/04/15 01:43
( 미 소 ) 영민햄이 앞에 있다고 생각하니 와닿는데요? 아하하.
어쨋든 너무 많은 주제들의 이야기가 있어서 (아까 말했던 많은 내용의 글이란 의미가 요것!^^)
하나하나의 주제들에 대한 생각들을 차례차례 정리해봐야 할 듯..
그나저나 싼 똥 확인하는게 녹록치는 않겠는데요?ㅎ
Commented by 문현주 at 2008/04/15 14:33
너무 잘읽었어요... 그리고 깊이 공감합니다.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모르겠네요... 가슴이 답답하고 참혹합니다.
Commented by 철학본색 at 2008/04/15 17:07
(이은희)오랜만에 한번에 쭉 따라가며 글을 읽었습니다. 평소에 툭툭 던지며 얘기하던 것들을 여기다 왕창 싸셨구만요..

시원하겠다..어렸을때는 하나님을 꿈속에서라도 만나고 싶다고, 커서는 마음으로 느끼고 싶다고 말했었는데..어느 순간 하나님과의 만남보다 사람들과 교회에 온 마음을 휘둘려 하나님은 만나지도 못하고..

마음대로 박제된 신을 향한 매주의 어줍짢은 신앙고백이 이제는 힘이 들다 못해 짜증이나네요..

생각하지 않으면 답답해 미치겠고 생각하면 또 미치겠으니..
Commented by 철학본색 at 2008/04/17 13:51
매주 화요일은 제가 소속된 (소속을 당한!) 목장의 정기 모임이 있는 날 입니다.
어김없이 참석 가능 여부를 묻는 문자가 왔고, 전 어김없이 참석불가를 답문으로 보내곤 했었죠.

그런데 이번 주 모임에 참석이 가능하냐는 질문의 문자에 답장을 못하고 넘어갔습니다. 그리고
저녁에 목장지기로 부터 전화를 받았죠.

한 가지 질문과 한 가지 질타를 받았습니다. 그리고 목장지기를 하는 분이 자꾸 떠오르더군요.

질문은 목장 모임에 나오지 못하는 사유가 무엇이냐?
질타는 왜 주일날 교회에 나오지 않느냐? (웃으시면서 목장 모임은 몰라도 이것은 용서할 수 없다고 하시더군요)

였습니다. 목장 모임에 나오지 못하는 구체적인 이유를 알아야 하는데 그것을 교회에 보고해야 한다고 하더군요.
어이가 없어서 그냥 한번 웃으며 아르바이트한다고 해주세요. 하고 대답 했습니다. 그리고 이어지는 질타에 대한 대답 또한 웃으며 일이 있었다 라고 하고 전화를 끊었습니다.

통화가 끝난 후에 계속 그 통화 내용이 귓가에 맴돌았습니다. 지금까지 한두번 격은 일도 아니고 전혀 새로울 것없는 '교회의 일상' 때문이 아니었습니다. 보이지 않는 전파 넘어로 자신도 힘들다고 이야기 하고 있는 그분에게(이건 아닐수도 있는데 저는 그렇게 느꼈습니다.) 안타까운 마음이 들더군요.
대체 누구를 위해서, 무엇을 위하여 자신이 피 흘리고 있는지 그 대가라는 것이 의로운 것인지..

어디에서도 감히(?) 배설하기 힘든 소소한 이야기였습니다.
우리 사회에서는 배설을 지정된 장소에서만 하라고 하지요. 아무도 없는 완전히 개인적인 공간이지요.

(백수 종욱)
Commented by 님좀킹왕짱인듯 at 2008/04/19 21:46
우연한 기회에 이곳을 접하게 되었습니다.
여러번 눈팅만 하다가, 오늘에야 용기를 내어 짧은 글 남깁니다.

모두들 따뜻한 가슴으로 차가운 글을 써내려가시는군요.

여러분들의 10년 후, 아니 5년 후 모습이 기대됩니다.
물론 여러분들이 속한 교회, 직장, 지역 공동체에 대한 기대이기도 합니다만,

아무튼 여러분 모두 킹왕짱인듯.

실례가 되지 않는다면
앞으로도 계속 엿봐도 되겠죠? ^^
가끔씩은 이렇게 덧글도 올리겠습니다.
Commented by 권영민 at 2008/04/20 22:10
아, 안녕하세요? 반갑습니다. 좋은 말씀과 격려를 해주신 님을 보니, 님이야말로 킹왕짱이신듯 하네요.
늘 오셔서 같이 나누고 대화도 하면 좋겠네요. 우연한 스침을 필연적 만남으로 만들어 가보아요^^
Commented by 종열 at 2008/04/20 23:23
히히 반가워요 ~^ㅁ^ // 웹으로 함께 토론도 하고 그래요 ㅎㅎ ^^
Commented by 이종수 at 2008/04/22 22:07
안녕하세요....영민이 친구 종수에요..ㅋ 여기 저를 아시는 분 꽤 되겠죠?^^
들어오기는 자주 들어왔고, 글도 꼬박꼬박 읽는 편인데 오늘에서야 댓글하나 남겨보네요.
영민이가 왜 보고나서 글도 안남기냐고 해서..ㅋㅋㅋ
영민이글 잘 읽었네요...소감적으라면 좀 길거 같아 생략하려구요.ㅋ..나중에 언제 함..^^;;
이 공간이 변함없이 지속되었으면 좋겠구요....'좋은 글'보다 '마음이 담긴 글'이 가득한 곳이 되었으면 합니다.
화이팅!!(국어문법상 '파이팅'이 맞다지요)ㅋ
Commented by 철학본색 at 2008/04/22 23:03
오~ 종수~ㅋ
너 아는 사람 몇 안된다. 지가 무슨 국회의원인줄 아나?ㅋㅋ
아무튼, 댓글 남겨줘서 고맙다야. 소감도 길게 한번 적어라~^^

아, 이제 말트고 들어왔으니 왕성활동 부탁하네..^^
Commented by 이은희 at 2008/04/23 00:28
종수씨 오랜만~~

얼굴 자주 못봐서 아쉬운데 여기서라도 자주 만나요~

건강하구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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